<피에타>에서 흔들리는 표정으로 불온한 삶을 연기했던 이정진이 모처럼 카메라 앞에서 환하게 웃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는 그의 말이 무책임이 아닌 자신감으로 느껴진 건 이정진의 배우 인생이 이제부터 시작일 거라는 분명한 확신에서였다.

셔츠와 니트, 팬츠는모두 살바토레 페라가모.보타이는 코르시네라베돌리 바이 비이커(Cor SineLabe Doli by Beaker). 슈즈는에스콰이아(Esquire).

셔츠와 니트, 팬츠는
모두 살바토레 페라가모.
보타이는 코르시네
라베돌리 바이 비이커(Cor Sine
Labe Doli by Beaker). 슈즈는
에스콰이아(Esquire).

 

재킷은 프라다(Prada).

재킷은 프라다(Prada).

오랜만에 당신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어요. 오늘 촬영 어땠어요?
좀처럼 하지 않았던 콘셉트라 멋쩍긴 했는데 꽤 즐거웠어요. 부끄러워서 괜히 혼잣말도 많이 하고요.

데뷔작인 스카이폰 광고가 생각났어요. 지금처럼 환하게 웃었잖아요.
아, 추억의 광고죠. 10년도 넘었어요. 이젠 많이 늙었죠. 하하.

<도망자 Plan. B>가 마지막이었으니까 드라마는 2년 만이에요. 50부작 드라마 <백년의 유산>에 임하는 각오가 남다를 것 같아요.
주위에서 그런 말을 많이 하더라고요. 트렌디 드라마나 영화를 하지 않고 왜 50부작이냐고. 힘들지 않겠냐고. 굳이 그런 걸 따지지 않는 편이에요. 좋은 시나리오고, 하고 싶은 역할이면 하는 거죠. 그래서 <피에타>도 할 수 있었어요. 그전에 찍었던 <돌이킬 수 없는>이라는 영화도 마찬가지고요. 채널이 어디고, 시간대는 어떻고, 몇 부작이고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아요.

방송이 될 때는 실시간으로 기사가 뜨고, 시청률도 선전하고 있어요.
반응이 심상치 않아요. 걱정스러워하던 사람들도 첫 방송 보더니 재미있다고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하더라고요. 함께 출연하는 선생님들도 쟁쟁하신 분들이고요. 덕분에 현장 분위기도 좋고 기분 좋게 촬영하고 있어요.

채무자들의 돈을 뜯어내며 살다가 재벌 2세 바람둥이가 된 소감은요?
제가 맡은 이세윤은 웬만한 드라마에 다 나오는 캐릭터예요. 드라마의 주인공이거나 주인공의 친구이거나 꼭 이런 남자가 한 명쯤 있어요. 다른 점이라고 하면 이세윤에게 아픔이 있다는 거예요. 결혼하려고 했던 여자를 바로 옆에서 잃거든요. 그래서 자신의 인생에서 사랑이라는 부분을 지우려고 해요. 보기에는 바람둥이 같고, 막 노는 것 같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여자를 밀어내요. 사랑이 끝났다고 믿는 남자인데 그 믿음을 흔들어놓는 사람을 만나게 되죠.

그게 유진 씨죠? 첫 회부터 정신병원에 들어간 비련의 여주인공.
방송된 거 보면 알겠지만 전개 속도가 엄청 빨라요. TLE급 전개라고 기사가 났더라고요. 50부작이면 행복하게 잘 살다가 한 10부쯤 되어서야 시련이 시작되는데, 첫 회부터 여주인공을 정신병원에 보냈으니 그럴 만도 하죠.

웬만한 드라마에 나오는 캐릭터가 되지 않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나요?
비즈니스적인 부분에서는 굉장히 정확하게 말하지만 평소에는 툭툭 던지는 느낌을 주려고 해요. 회사에서 진행되는 장면 외에는 타이를 안 매려고 하고요. 드라마에 나오는 ‘실장님’ 캐릭터 아시죠? 다 똑같아요. 슈트에 넥타이 매고 그 위에 사원증 하나 걸고 있어요.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은 작품에 출연한 엄청난 사건을 또 이야기해야 겠네요. 수없이 말했던 소감, 다시 한번 부탁할게요.
<피에타>를 시작할 때 이렇게 될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생각보다 담담했는데 2013년이 되고 보니까 지난해에 정말 엄청난 일이 벌어졌구나, 싶더라고요.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을 거라는 걸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싸이 형도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냈다고 하지만 영화 쪽에서는 저희 역시 최초의 일을 해낸 거예요. 세계에 한국 영화를 알릴 수 있는 감동적인 현장에, 그 작품에 함께할 수 있어서 기쁘고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그 후로도 경사가 이어졌죠. 최연소 문화 훈장도 받았잖아요.
그러게요. 자꾸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최연소 문화 훈장에다 최근에는 영화배우협회에서 공로상도 받았어요. 안성기 선배님, 이병헌 형, 조민수 누나, 김기덕 감독님과 함께요. 할아버지가 되어서 ‘나 이런 영화 했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작품이 생긴 거죠.

솔직히,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좋아했었나요?
솔직히 좋아했어요. 감독님의 작품을 보면 영화의 데드라인을 만들어준다는 느낌을 받아요. 영화 안에서 ‘이렇게까지 해도 된다’는 그 데드라인을요. 10년 전 영화 <나쁜 남자>만 봐도 그래요. 사랑하는 여자를 창녀로 만들고 그걸 지켜보는 내용은 정말 충격 그 자체잖아요. 처음 감독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을 때 ‘왜 하필 나지?’라는 생각도 했어요. 그러고는 시나리오를 읽었는데 술술 잘 넘어가는 거예요. 재미있게 읽었지만 못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어요. 자신이 없었거든요. 결국 감독님에게 넘어가서 이틀 만에 하겠다고 했죠.

셔츠와 스카프는 구찌(Gucci).팬츠는 미하라 야스히로 바이 무이(Mihara Yasuhiro by Mue).

셔츠와 스카프는 구찌(Gucci).
팬츠는 미하라 야스히로 바이 무이
(Mihara Yasuhiro by Mue).

김기덕 감독은 왜 이정진이 ‘강도’여야 한다고 하던가요?
저도 한번 물어본 적이 있는데 그냥 같이 하고 싶었대요. 자세하게는 이야기 안 해주더라고요. 원래 그런 낯간지러운 이야기는 잘 안 하세요.

촬영을 2주 만에 끝냈다고 들었어요. 그게 정말 가능했나요?
촬영을 결정하고 언제 촬영하냐고 물어보니 일주일 뒤에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생각했죠. ‘아, 다른 배우에게 이야기했다가 잘 안 되어서 급하게 나한테 왔구나’ 하고요. 근데 그게 아니었어요. 가장 처음으로 제게 연락했다는 거예요. 끝까지 안 한다고 했으면 어쩔 뻔했냐고 물으니 제가 할거라고 확신을 하셨다나요? 그러고는 촬영 들어가서 2주 만에 끝났어요. 반신반의했는데 정말 가능하더라고요. 주변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김기덕 감독이랑 영화 찍는다며? 잘 찍고 있냐?” 그러면 “다 끝났어” 그랬죠.

촬영장 환경이 어려웠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어느 정도였나요?
제작비가 1억이었어요. 일반 영화 제작비가 20억에서 30억인 거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액수죠. 좀 더 시간이 있고 여유가 있었으면 뭔가를 더 해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그건 욕심인 것 같아요. 한번 더 찍고 싶을 때도 있었는데 정말 그럴 시간이 없었어요. ‘시간 없어, 이걸로 가야 돼’ 하면 ‘네’ 하고 짐 싸곤 했어요.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으니 가능한 일이겠죠. 고생도 많이 했는데 베니스는 충분히 즐기고 돌아왔나요?
행사 일정으로 스케줄이 빡빡했어요. 끝나고 좀 더 있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어요. 제가 나가야 다른 배우가 들어올 수 있거든요. 그래서 끝나고 저는 파리로 갔어요.

왜 하필 파리였어요?
파리를 경유하는 비행기표였거든요. 파리는 처음이었어요. 아무것도 몰라서 감독님이 가보라는 데만 찾아 다녔어요. 알려주신 대로 찾아 다니면서 ‘아, 여기가 방돔 광장이구나, 에펠탑이구나’ 했어요. 베니스 영화제를 다시 한번 대단하다고 느낀 게 사람들이 저를 많이 알아보더라고요. 불어로 말하니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중간에 ‘피에타’는 들리더라고요. 그래서 나 맞다면서 사인해주고 그랬죠.

나이가 드는 걸 즐기고 있나요?
원래도 조급한 편은 아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팽팽한 긴장감을 조절하는 힘이 생겨요. 느슨하게도 하고 팽팽하게도 하고 뭔가 저 스스로 조율하는 느낌이랄까요.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들과 자연스럽게 소통하는 방법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요즘 재미있어요.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거든요.

그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꼽아보자면요?
프로골퍼 노승열이라는 친구가 91년생인데 함께 골프도 치고 친하게 지내요. 배우 친구도 있고, 장사하는 친구도 있고, 기업 CEO 형들도 있고 나이와 직업을 막론하고 두루 알고 지내요. 그들을 만나서 뭔가 특별한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에요. 요즘 누구 노래가 좋다더라, 무슨 영화가 재미있고 어디가 맛있다더라, 하는 소소한 이야기를 해요. 다방면에 걸친 서로의 얄팍한 지식을 나누는 거죠.

이렇게 사람들도 좋아하고 자유로운데 배우로 절제하며 사는 거, 답답하지는 않아요?
배우들에게 있어 착해야 한다는 기준이 좀 높은 것 같아요. 저는 그냥 나쁘지 않은 선에서 자유롭게 살려고 해요. 범죄는 저지르지 말아야지, 그 정도예요. 매니저 없이 혼자서도 잘 돌아다니고,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사니까 딱히 그렇지는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