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루어>의 9주년에 나무액터스의 뿌리 깊은 배우들이 함께 했다. 배우이자 한 사람으로서의 내면을 고요하게 들여다보는 흑백 영화 뒤엔 그들의 영화적 열정을 응축해 담은 또 한 장의 영화가 있다. 무성과 유성, 흑백과 컬러, 장르와 장르를 오가며 완성된 영화적 순간들.
보니 파커(Bonnie Parker)와 클라이드 배로우(Clyde Barrow)는 2인조 은행 강도다. 지명수배 끝에 경찰에 포위되어, 그 유명한 차량 총격으로 최후를 맞이했다. 이들의 이야기는 많은 책과 노래 그리고 영화로 만들어졌다. <보니 앤 클라이드(Bonnie and Clide)>, 우리나라에서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로 불리는 이 영화를 김소연은 촬영 전 1주일 동안 두 번이나 봤다. 촬영 하루 전까지 소속사를 사이에 두고 문득문득 그녀의 연락을 받았다. “가발을 써도 되나요? 그래야 느낌이 날 것같아요. 지금 머리 길이가 애매할 것 같아요.” “장총을 들면 서부 영화가 같겠죠?” “이 장면은 어때요? 난 이 장면이 좋은데!” 같은 꿈을 꾸고 있다는 건 여러모로 좋다.
김소연은 그런 배우다. 사진을 한 장을 촬영하기 위한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꼭 진짜가 되어야만 하는 배우. 아름다운 사진한 장보다 무엇인가 만들어보는 것을 더 좋아하고 보내준 시안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서 두 번 세 번 영화를 보고 자신의 것으로 꼭꼭 삼켜서 그 감정을 숨쉬듯 내뱉는다. 그래서 촬영은 숨막히게 이뤄졌다. 뜨거운 양철지붕처럼 달아오른 서울의 아스팔트 위로 시원하게 폭우가 쏟아진 날이었으니 날씨 또한 완벽했다. 생전 담배 근처에도 안 가봤을 것 같은 그녀가 사진가가 불을 붙여 건네준 담배를 손에 들었고 촬영이 시작되었다. 1920년대 대공황 시대에 활동했던 보니와 클라이드의 이야기는 역시 베트남 전쟁으로 뒤숭숭했던 1967년에 영화화되었다. 만약 이 영화가 21세기로 온다면 바로 이런 모습일 것 같다. 베레모 대신 스모키 메이크업, 판탈롱 팬츠 대신 긴 다리를 내놓은 그녀처럼.
“여배우라면 한번쯤 욕심을 낼 캐릭터예요.” 다시 거울 앞에 앉은 김소연이 말했다. 보니와 클라이드는 대등한 관계다. 19세의 보니가 21세의 클라이드를 만나고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둘 사이는 공정했다. 갱들의 다툼에서 인질이 되는 여자가 아니라 똑같은 갱이라는 게 보니가 전설이 된 이유다. “저는 그 장면이 가장 마음에 들었어요. 영화 속에서 클라이드가 사진을 찍어주잖아요? 장총을 들고 차 위에 다리 한쪽 올리고요. 백치미도 조금 느껴지지만 당당하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 애티튜드가 좋았어요. 놀랄 만큼 용감해요.”
촬영이 끝난 후엔 다음 작품을 위해 감독과의 미팅이 예정되어 있었다.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 <대풍수>다. 모더니스트의 대명사인 김소연이 사극이라니. “<가비>에서의 경험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정말 공들여서 만든 세트며 스타일링 같은 것 말이에요. 사극을 꼭 하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영화 <가비>로 한번 경험을 해보니까 드라마로도 경험해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들었어요. 뭐랄까, 적당한 때가 있잖아요. 배우가 이 캐릭터를 해야 할 것 같은 적당한 때. 가족을 제외하곤 다의외라는 반응이죠. 하지만 가족은 예전부터 제게 사극을 한번 해보라고 종용했어요! 정말 잘 어울릴 거라고 말이에요.”
어린 시절부터 배우 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지금도 모든 역할에, 모든 장르에 호기심과 설렘을 가지고 있다. 그녀가 연기하고 싶은 건 이 세상의 모든 인물과 모든 사건이 아닐까. 그녀가 화보를 연기하고 즐기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화보는 배우에게도 흔치 않은 기회니까 늘 해보지 않은 걸 해보고 싶어요. 이번엔 <보니 앤 클라이드>를 했으니까 다음엔 <화양연화>를 해보고 싶고요. 하지만 작품을 하는 마음은 반대가 되었어요. 원래는 늘 강렬한 캐릭터를 원했어요. ‘신 스틸러’가 되고 싶었던 마음이 이제 조금씩 바뀌고 있어요. 잘 어우러지는 역할의 매력을 이제 알게 된 것 같아요. 보여줘야 하는 연기가 더 쉬워요. 숨어 있는 연기가 더 어렵고요. 그래서 요즘은 그런 생각을 더 많이 해요.” 늦어도 11월에는 그녀의 새로운 모습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약초를 캐러 다니고 음양오행에 대해 논하는 김소연을 말이다. 그 새로운 작품과 처음으로 악수하기 위해 그녀는 스튜디오의 문을 열고 빗속으로 걸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