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트 패션의 질주 속에서도 진득하니 자신의 감성으로 옷을 짓는 디자이너 8인의 성정을 들여다봤다. 그들의 패션을 향한 지독한 열정, 이번 시즌 옷 입기에 관한 매력적인 팁, 그리고 우리가 패션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을 기록했다.

모델이 입은 시퀸 장식의 실크 드레스와 귀고리, 지춘희가 입은 실크 재킷과 스커트는 모두 미스지콜렉션(MissGee Collection).헤어&메이크업| 지선, 토미(고원)

‘어느 봄날의 환희’ 지춘희

데이지꽃이 망울을 터뜨리고, 은빛 파도가 일렁이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모티프로 한 지춘희의 2011 봄/여름 컬렉션은 어느 봄날의 환희 같다. 30여 년간 디자이너의 길을 걸어온 지춘희는 이제 그만 치열함을 벗고 싶다고 했다. 자연스러운 것, 아름다운 것, 소중한 것을 되짚어보다 보면 어느새 다음 시즌의 테마가 잡히곤 한단다. 다만 한 가지 변함없이 지키고 있는 것은 ‘여성의 옷은 여성스러울 때 가장 아름답다’는 디자인 철학이다. 여자의 몸을 아름답게 드러내는 실루엣과 우아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천연 소재를 고집하며 지춘희만의 옷‘ 미스지콜렉션’이 탄생한다. 자연에 순응하는 것만큼 세월을 앞서가는 게 없다는 것을 깨달은 지금, 그녀는 치열하게 새롭기보다는 한결같은 멋 안에서의 자연스러운 변화를 추구한다. 지춘희는 물었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옷, 새로운 브랜드를 만날 수 있는 이 급변하는 패션계에서 누군가는 변화보다 잘 지키는 역할을 자청하는 것도 괜찮지 않겠냐고. 이제 자신은 후자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옷을 입는 사람도 맹목적인 유행을 좇기보다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차림을 근사하게 만드는 법을 깨닫는 것이 더 행복할 거라고 조언한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자신만의 감성으로 느리게 걷기를 택한 지춘희는 자신의 옷처럼 따뜻한 봄날의 환희로 반짝이고 있었다.

지춘희가 꼽은, 옷장에 꼭 갖춰야 하는 클래식 아이템 세 가지
1 화이트 블라우스
깨끗하게 잘 다린 화이트 셔츠나 블라우스는 여자를 언제 어디서나 우아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빛낸다. 열 벌의 다채로운 디자인보다 한 벌의 멋진 클래식 화이트 셔츠를 간직하라.

2 데님 팬츠
자신의 몸에 잘 맞는 데님 팬츠는 나이와 유행을 불문하고 당신을 젊고 근사하게 만든다. 워싱이 화려하지 않은 디자인, 허리와 골반에 잘 맞는 실루엣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3 캐시미어 카디건
부드러운 캐시미어 카디건은 비싼 값을 한다. 봄에 입기 좋은 너무 두껍지 않은 캐시미어 카디건을 어깨에 툭 걸치거나 손에 드는 것만으로도 클래식한 옷차림이 된다.

모델과 김재현이 입은 실크 소재의 별 프린트 드레스와 슈트는 모두 쟈뎅드슈에뜨(JardindeChouette).

‘러키 스타’ 김재현

이번 시즌 김재현은 마치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을 보는 듯한 별 프린트에 즐거움을 한 가득 담았다. “어린 시절 봤던 그림 하나가 제 기억속에 어렴풋이 자리하고 있어요. 노을 지는 풍경의 모습을 네온 컬러로 표현한 그림이었는데, 색감이 환상적이었죠.” 이번 시즌 컬렉션의 영감이 된 그림 이야기를 하는 김재현의 얼굴에는 행복한 동심이 가득했다. 왜 그런 모습 있지 않나. 조금은 달뜨고 격양된 모습. 올해로 10년 차 디자이너가 된 김재현은 욕심과 여유의 팽팽한 줄다리기를 즐기고 있는 듯 보였다. 파리 마레에 위치한 소박한 의상점을 보고, 나도 저렇게 내가 좋아하는 옷을 만들며 소박하게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던 10
년 전의 김재현은 어느새 그 이상을 이뤘다. 이 시대의 여성들이 어떤 옷을 입고 싶어 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타고난 감각과 그 감각을 뒷받침해주는 재단 실력이 지금의 김재현을 있게 했다. 그리고 이번 시즌 70년대의 록 스타의 연인을 생각하며 만든 유머러스한 의상들 역시 간결한 실루엣 속에서 유유히 빛난다. “옷은 즐기는 거예요. 저에게는 최고의 즐거움이자 제 삶의 전부이기도 하죠. 제 옷을 입는 사람들도 저로 인해 더 즐거워졌음 좋겠어요.” 유쾌한 옷으로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디자이너 김재현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짜 러키 스타가 아닐까!

프린트 의상을 멋지게 입는 방법
매 시즌 컬렉션을 통해 여성들이 평소에도 롱 드레스를 즐길 수 있는 방식을 이야기하는 김재현이 제안한다. ‘쿨한’ 방식으로 프린트 드레스를 입는 법에 대하여.
1 프린트에 대한 두려움을 떨친다. 프린트를 잘 활용하면 옷차림에 유쾌함을 가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몇 살은 더 어려 보인다.
2 드레스라고 해서 몸에 붙는 실루엣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더군다나 프린트가 있다면 몸에 착 달라붙는 것보다 조금은 낙낙한 실루엣이 더 근사해 보인다. 여기에 너무 차려입은 티가 나는 이브닝 슈즈보다는 밀리터리 워커나 운동화를 신는다.
3 좀 더 화려하게 입고 싶다면 반대되는 색상의 프린트를 고르는 것도 괜찮다. 뚱뚱해 보일 거라는 고정관념을 고수한다면 멋쟁이가 되는 길은 너무 멀다. 오히려 보색대비가 주는 경쾌한 멋을 선택한다면 만물이 소생하는 봄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모델이 입은 날개 장식의 볼레로와 실크 원피스, 이상봉이 입은 면셔츠는 모두 이상봉 컬렉션(LieSangBongCollection).

‘날개를 펼치다’ 이상봉

그는 늘 이중성과 싸우고 있다.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패션의 예술성과 상업성, 그리고 한국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 그 사이에서 아슬아슬 외줄을 타고 있는 이상봉은 그래서 참 건설적인 사람이다. 언제나 변함없이 끓어오르는 패션에 대한 열정도 그러한 스스로와의 싸움에서 비롯되는 것이리라. 이번 시즌 그의 컬렉션 역시 이중성에서 출발했다. 어릴적 인상 깊게 본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의 영화 <성스러운 피>에서 영감 받아 자유를 갈망하고 구원의 메시지를 상징하는 ‘새’ 모티프를 컬렉션 전체에 관통시켰다. 두 겹으로 천을 덧대거나 절개로 다시 쪼개는 그만의 디자인은 ‘입체’ 라는 아름다움으로 승화되었다. 또 새 모티프는 그래픽적인 프린트인 동시에 새로운 실루엣을 더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그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보라. 결국 이상봉의 이중성에 대한 싸움은 그의 옷에서 하나의 중점을 찾는다. 옷에 대한 고민은 한국 패션의 미래에 대한 고뇌로도 이어진다. 이상봉은 한국적 디자인으로 사랑받고 있기에 그만큼 그 사랑에 보답해야 한다는 강한 책임감을 갖고 있었다. 또 해외 진출에 먼저 성공한 선배답게 후배 디자이너들이 힘든 길로 돌아가지 않도록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싶다고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 패션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진심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내일이면 뉴욕 컬렉션 출장을 떠나야 하는 이상봉도, 그의 고민에 통감하는 기자 역시도 인터뷰를 멈추기란 쉽지 않았다. 우리는 다음을 기약했다. 그는 뉴욕컬렉션에 가져갈 스카프라며 선물을 건넸다. 집에 와서 풀어보니 스카프에는 수묵화로 그린 듯한 ‘벗’이라는 한글이 쓰여 있었다. 벗의 마음으로, 이상봉의 열정이 날개를 달고 앞으로도 높이높이 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옷으로 아름다운 몸 만들기
나는 여자의 몸에 숨겨진 라인을 찾아내는 입체적인 디자인을 즐긴다. 물론 지나치게 과장된 입체감은 아니다. 다만 옷을 입었을 때 살아나는 그 미묘한 차이는 옷으로도 여자의 몸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 운동을 열심히 해서 S 라인을 만들 자신이 없다면 옷을 입을 때 등의 척추부터 엉덩이로 이어지는 라인만큼은 꼭 드러내도록 하자. 특히 원피스의 경우 아무리 낙낙한 실루엣의 옷이라고 해도 ‘뒤태’를 좌우하는 등과 엉덩이 라인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또 상체와 하체의 비율에 따라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의 비례를 찾는 것이 중요한데, 손쉽게 늘씬해 보일 수 있는 방법은 무릎을 살짝 드러내는 치마 길이를 유지하는 것이다.

모델이 입은 베스트와 레이저 커팅 장식의 실크 스커트, 이승희가 입은 셔츠와 스커트는 모두 르이.

‘패션을 조각하다’ 이승희

르이(Leyii)라는 이름으로 고요한 손맛의 의상을 선보이는 디자이너 이승희는 남달랐다. 그녀 이름 앞엔 ‘신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지만 일곱 살짜리 딸을 가진 엄마다. 서울 패션위크의 ‘Generation Next’를 통해 이제 겨우 세 번의 쇼를 했다. 그럼에도 파리의 트레이드 쇼인 트라노이(Tranoi)에 두 번이나 진출하는 행운을 안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인답지 않은 자신만의 확고한 디자인이 있다. 그것은 바로 여성스러운 실루엣에 더해지는 쿠튀르적인 손맛이다. 이승희를 만난 날,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유행에 좌우되지 않는 패션을 향한 진정성도. 이번 시즌 이승희는 마블링을 주제로 한 쇼를 선보였다. 누드색, 베이지색, 흰색, 밝은 회색 등의 차분한 컬러 팔레트에 레이저 컷으로 하나하나 태운 마블링 모티프의 장식을 더했다. 가까이에서 보니 더욱 정교한 옷이었다. 여러 조각 천을 이은 흔적이 없어 물었더니 자신은 천에도 숨결이 있다고 생각한단다. 그래서 자르고 붙이고 바느질하면 그만큼 천연 소재가 가진 본연의 아름다움이 죽기에 최소한의 봉제로 옷을 만든다고 했다. 대신 돈이 많이 들겠다는 농을 던지자, 조금 적게 벌어도 제대로 만들고 싶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디자인에서 균형감을 잘 살리는 그녀이기에 물었다. 어떤 디자인을 선택하면 여자의 몸이 좀 더 가느다랗게 보이냐고. 옷이나 체형에 따라 다르지만 원피스를 고를 때에는 드럼통같이 하나로 떨어지는 디자인보다는 허리 위로 절개가 있는 디자인이 훨씬 날씬해 보인단다. 또 실크와 시폰처럼 비슷한 분위기를 내지만 서로 다른 소재가 섞인 옷은 빛의 차이에 따라 한결 세련 돼 보이고 또 날씬해 보이는 효과도 있다고 조언했다. 기본기가 충실한 디자이너는 디자인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옷을 입게 될 사람에 대한 ‘배려’도 함께 담아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