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에게 헌신한 남자를 헌신짝처럼 버린 매정한 여자, 이제 막 사랑에 눈뜨기 시작한 앞을 못 보는 여자 …. 사람들은 그 사랑의 결말만큼이나 그녀들이 무엇을 입고 들었는지 궁금해한다. 드라마 속 패션, 우리는 왜 여주인공의 옷차림에 이토록 열광할까?

‘OO 드라마 속 누구의 가방’ , ‘OO 드라마 속 누구의 코트’ 라는 단어를 포털 사이트에서 접할 때마다, 그건 브랜드가 만들어낸 하나의 홍보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드라마 주인공이 한 번 입었다고 무엇이 얼마나 달라질까 의심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사는 세상에서는 모두가 기자가 된다. 브랜드가 나서서 홍보하지 않아도 방송 몇 시간 만에 그들이 입은 옷의 브랜드와 가격이 온라인에 도배된다. 드라마 속 패션 정보만 다루는 블로거나 전문 사이트가 무수히 생겨난 건 말할 것도 없고, 누가 어느 드라마에서 어떤 옷을 입었다는 지극히 단순한 기사가 포털 사이트 메인 뉴스를 장식한다. 그리고 이런 대중의 관심은 당연히, 구매로 이어진다.

드라마 속 패션의 파급효과 홍보 대행사를 오가다 보면 드라마 방영 전에 여주인공이 어떤 브랜드의 옷을 입는지 미리 알게 되는데, 얼마 전 방영을 마친 <야왕>의 수애에게 협찬하고 싶은 브랜드가 줄을 섰다는 소문을 들은 것도 꽤 오래전 일이다. 역시나 <야왕>이 방송되는 날부터 수애가 입은 원피스와 주얼리, 가방 등에 대한 반응이 뜨겁더니, 수애가 들고 나온 토트백 덕분에 당시 공식 론칭을 앞두고 있던 루즈 앤 라운지는수 ‘애가 든 가방’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화제 속에 마무리된 <그 겨울, 바람이 분다>의 송혜교 패션 역시 드라마 패션의 정점을 찍었다. 5년 만의 드라마 복귀작으로 화제를 모았던 송혜교는 드라마 인기에 힘입어 현재 최고의 ‘완판녀’로 등극했다. 그녀가 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라네즈의 립스틱은 방송이 끝난 지금도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고 있는데, 매장에 비치한 테스트 제품까지 바닥난 상태라고 한다. 송혜교가 입고 나온 아페쎄의 코트는 드라마가 끝난 직후부터 전화 문의와 온라인 사이트 주문 폭주로 바로 다음 날 매진을 기록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드라마 속 패션이 날로 뜨거워지는 이유에 대해 브랜드 홍보 담당자와 스타일리스트들은 모두 ‘리얼리티의 승리’라고 입을 모은다. “과거 드라마를 보면 대부분 배역에 관계없이 근사하게 차려입은 모습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달라요. 못살면 못사는 대로, 잘살면 잘사는 대로 극중 캐릭터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스타일을 보여주죠. 그러니까 시청자도 ‘나도 저렇게 입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지요.” 스타일리스트 한혜연은 드라마 패션의 인기도 파파라치 룩과 공항 패션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일상에서 쉽게 시도할 수 있는 스타일이어서 소비자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 같아요. 사실 여자 연예인들은 시상식이나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할 때 화려하게 차려입잖아요. 그런 옷은 실생활에서 입기 난감하죠. 그런데 드라마에는 진짜 입고 싶은 의상이 나오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똑같은 예능이라도 <우리 결혼했어요>나 <1박 2일> 등 리얼 버라이어티에서 착용한 제품은 드라마처럼 홍보효과가 좋아요.” 홍보 대행사 비주컴 최인지 대리의 말이다. 하지만 TV에 나오는 모두의 패션이 주목받는 건 아니다. 한 홍보 담당자는 똑같은 옷을 입어도 그 옷을 제대로 소화하는 배우에게 당연히 눈길이 간다고 말한다. 본인의 패션 스타일을 잘 알고, 그에 맞는 옷을 소화하는 배우가 드라마 속 역할에 완벽하게 몰입할 때, 비로소 드라마 패션이 빛나고 그 배우에게는 브랜드의 협찬이 줄을 서게 된다.

드라마 속 패션 스타일이 만들어지기까지 드라마 속 패션 스타일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감독, 작가, 스타일리스트, 배우 등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이 모여 콘셉트를 논의한 뒤에 배역에 맞는 패션 스타일이 만들어진다. 보통 드라마가 기획되면 캐릭터를 잡고 구체적으로 발전시키는 기간이 적어도 3개월 이상은 걸린다. 어떤 스타일의 옷을 입을 것인지 뼈대를 정하고, 주인공이 이야기의 전개 과정에 따라 변하는 캐릭터라면 의상 역시 변신 단계를 미리 구상해놓는다. 대부분 이 과정에서 주로 어떤 브랜드를 입을 것인지, 주요 협찬사는 어디인지가 결정된다. 드라마 소재에 따라 협찬사가 정해지는 시기가 천차만별인데, 보통은 드라마 기획 단계부터 브랜드 협찬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배경과 소재가 패션 브랜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질수록(예를 들어 주인공이 패션 회사를 다닌다거나) 더욱 그렇다. 공식 계약을 하는 주요 협찬사의 경우 드라마 전체의 분위기를 좌우할 수 있기 때문에 제작사의 제작 PD와 감독, 작가진이 결정에 유달리 공을 들일 수밖에 없다. 노골적으로 광고하는 억지 PPL은 오히려 시청자에게 반감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실제로 드라마 <신사의 품격>에 프로 골퍼 역으로 나왔던 윤세아는 드라마 속에서 레노마 스포츠의 모델로 활동하며, 실제와 PPL이 구별되지 않을 정도의 실감 나는 장면을 만들었다. 덕분에 당시 레노마 스포츠 제품은 연일 완판 행진을 이어갔고, 드라마의 인연이 계속되어 윤세아가 실제 레노마 스포츠의 모델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렇게 공식적인 협찬 루트가 있는 반면, 브랜드 간 과열된 홍보 경쟁 부작용도 적지 않다. 주인공이 가방을 1회 들 때 얼마 하는 식으로 브랜드와 스타일리스트 사이에서 중간 역할을 하는 브로커가 등장할 정도다. 협찬 내용도 구체적인데, 어떤 제품이 어떤 형태로 몇 분간 노출, 누구에게 어떤 상황에서의 노출 등으로 정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 다니는 회사를 비추는 장면에서 협찬 브랜드의 로고가 노출되는 건 얼마, 주인공이 선물을 사러 협찬 브랜드의 매장에 가서 옷의 장점을 이야기하는 건 얼마, 이렇게 상황과 배우의 급에 따라 협찬가도 천정부지로 뛰어오른다는 후문이다. 최근에는 드라마 PPL만을 전문으로 다루는 PPL 홍보 대행사도 생겨나, 브랜드와 연예인의 단순한 협력 관계를 오히려 복잡하게 만들기도 한다. 단계가 복잡한 만큼 협찬 비용이나 요구 조건도 까다로워져 드라마의 극 전개보다 협찬 브랜드의 노출이 주가 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홍보를 담당하는 입장에서 협찬하고 싶은 배우도 따로 있지만, 협찬하고 싶은 드라마도 따로 있어요. 특히 <시크릿 가든>과 <신사의 품격>을 연달아 히트시킨 김은숙 작가와 마니아층이 많은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가 그렇죠.” 한 홍보 대행사의 브랜드 담당자는 협찬 의상을 극중에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작가의 힘도 무시할 수 없다고 전한다. “공식 협찬사를 무시하면서 드라마를 찍을 수는 없어요. 하지만 스타일리스트 입장에서 주인공의 처지나 분위기에 맞지 않는 억지 협찬은 곤란해요. 인기 있는 드라마일수록 감독과 작가, 스태프들이 그 점을 잘 이해해주는 편이에요. 결국 스태프들의 손발이 잘 맞아떨어질 때, 진정한 드라마 패션이 탄생한다고 볼 수 있죠.” 배우 김희선, 박시연 등의 의상을 담당해온 스타일리스트 박희경의 말이다. 결국 일부의 부작용을 제외하고, 진짜 완판녀들은 철저히 계산된 스타일링을 통해 만들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 업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예전과 달리톱 ‘스타 =완판녀’라는 공식이 전부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실제로 <야왕>에서 재벌가 여인을 연기했던 김성령은 전형적인 재벌 룩에서 탈피해 국내 디자이너의 의상과 명품 브랜드를 적절히 섞어 입는 세련된 스타일링으로 모든 브랜드가 협찬하고 싶어 하는 새로운 완판 배우로 등극했다. 최근 방송을 시작한 <남자가 사랑할 때>의 신세경은 극중 송승헌에게 선물 받을 의상을 직접 스타일리스트와 상의한 끝에 결정했다고 전해졌는데, 덕분에 송승헌이 신세경을 사랑하는 설레는 감정이 입체적으로 살아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인기 드라마에 인기 작가가 있는 것처럼, 배역에 어울리는 멋진 스타일을 하고 나오는 배우에게 시청자가 진정한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