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에 많은 영감을 주는 영화, 그중에서도 여행에 관련된 것만 모았다. 여행지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다양한 홀리데이 룩을 볼 수 있는 스타일리시한 여행 영화.

로마의 휴일 | 1953
이런 류의 리스트에 결코 빠지지 않는 영화 중 하나다. 유럽의 한 공주가 로마로 달콤한 휴가를 떠난다는 설정은 지극히 낭만적이고, 플레어 스커트와 봉긋한 블라우스, 프티 스카프를 두른 오드리 헵번은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많은 의상을 선보이지는 않지만 워낙 아이코닉한 오드리 헵번 식의 옷차림인 데다가, 사랑스러운 여자가 어떻게 걷고, 말하고, 웃고, 젤라토를 먹는지 확실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영화는 감상할 만하다. 스타일은 옷으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007 살인번호 | 1962
영화 <007> 시리즈를 정의하는 세 단어는 액션, 사랑, 그리고 스타일이다. 그렇게 우리는 지금까지 젊고 잘생긴 비밀 요원이 완벽한 슈트 핏을 보여주고, 불가능해 보이는 임무를 수행하고, 미녀와 사랑에 빠지는 총 23편의 지독히 세련된 영화를 보고 있다. 거의 다 주옥같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스타일리시한 시리즈를 고르라면 단연 1편 <007 살인번호>를 꼽는다. 우르슐라 안드레스가 단검을 찬 화이트 비키니 차림으로 물속에서 걸어 나올 때 이미 게임 끝. 영화 역사상 가장 아이코닉한 수영복이 탄생함과 동시에 스타일리시한 미녀의 상징인 ‘본드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잉글리쉬 페이션트 | 1996
사파리 룩이 이렇게 낭만적이었던가? 광활한 사하라 사막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는 유틸리티 재킷과 리넨 셔츠, 바람에 나부끼는 스카프를 걸친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와 랄프 파인즈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들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 더 가슴 아프게 느껴진다. 빛바랜 옷차림의 랄프 파인즈가 커다란 천에 아픈 연인을 감싸 안고 사막을 걸어가는 장면은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일 것이다. 또 하나, 꽃무늬 서머 드레스에 밀리터리 재킷을 입고 나오는 줄리엣 비노쉬의 일명 ‘전쟁 통의 시골 처녀 룩’도 무척 예쁘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 1967
요즘 시대에 갱단을 이끈 은행털이범의 이야기를 영화화하겠다고 하면 범죄를 미화한다는 거센 비난에 직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 산업이 한창 꽃피던 1960년대에는 미국 전역을 거침없이 돌아다니며 은행과 주유소를 터는 청춘 남녀의 이야기는 그저 낭만이었다. 악명 높은 보니와 클라이드를 더 매력적으로 만들기 위해 투입된 건 두 톱스타였다. 스리피스 슈트를 차려입은 워렌 비티는 강도보다는 월 스트리트의 금융가처럼 보였고, 펜슬 스커트와 벨티드 코트를 입고 베레모를 눌러쓴 페이 더너웨이는 슈퍼모델 같았다. 그렇게 보니와 클라이드의 흉악한 범죄는 잊혀지고, 영화 속 두 주인공의 스타일은 아직까지 회자되며 패션계에 영감을 주고 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 | 1985
잘못된 결혼과 지나치게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연인은 주인공 카렌의 삶을 고달프게 만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간 날을 추억하게 만드는 건 때때로 찾아온 아름다운 순간들이었다. 푸른 아프리카의 초원을 배경으로 펼쳐진 한 여자의 척박한 인생은 리넨과 울, 면 소재로 만든 20세기 초반 식민지시대풍 의상이 있었기에 결코 초라하지 않았다. 여행할 때마다 선보인 근사한 코트, 사냥 신에서 입은 리넨 셔츠와 미디 스커트, 침실 신의 실크 파자마와 승마 부츠, 가죽 장갑, 챙 넓은 모자 등 수시로 선보이는 멋스러운 액세서리까지, 베이지톤의 우아한 의상에 반하고, 경이로운 아프리카의 자연에 또 한번 반하게 되는 영화다.

롤리타 | 1997
탄력 있는 몸, 붉게 물든 입술이 보기만 해도 설레게 하는데, 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롤리타는 팬티에 가까운 짧은 쇼츠에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톱을 입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온 집안(과 주인공 험버트의 마음)을 들쑤셔놓는다. 그녀를 처음 만난 순간도, 롤리타는 하늘하늘한 서머 원피스 차림으로 스프링쿨러가 돌아가는 잔디밭에 엎드려 있었다. 흠뻑 젖은 채로! 어디 그뿐인가, 엄마가 죽고 새아빠와 단둘이 긴 여행을 떠났을 때에도 그녀는 시종일관 육감적인 스타일을 고수한다. 성적 매력으로 똘똘 뭉친 여자아이가 남자에게 얼마나 파괴적인 존재인지 보여주는 이 영화에서 롤리타의 옷은 하나같이 지나치게 짧고, 타이트하다. 갑자기 성장한 몸 때문에 모든 옷이 작아진 건지 애매모호하지만 이 독특한 드레스 코드는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무척 사랑스럽고 섹시했다.

굿바이 엠마뉴엘 | 1977
1970년대 에로틱 영화의 붐을 일으킨 엠마뉴엘 시리즈는 그저 그런 야한 영화가 아니었다. 특히 실비아 크리스텔이 주연을 맡은 1편과 2편, 그리고 3편인 <굿바이 엠마뉴엘>은 방콕, 홍콩, 발리, 세이셸 등 이국적인 로케이션을 배경으로, 주인공 엠마뉴엘이 내재된 욕망을 발견하며 관계의 영역을 끊임없이 탐험하는 모습을 그린다. 아름답고 부유한 라이프스타일, 매혹적인 자연과 당대 최고 디자이너들의 우아한 의상은 수많은 러브 신만큼이나 뜨거웠고, 영화의 설득력을 높였다. 지상 낙원 같은 곳에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끓어오르는 욕망을 어떻게 주체할 수 있을까? 스타일은 매혹의 필수 조건이라는 것을 엠마뉴엘 시리즈는 여실히 보여준다.

델마와 루이스 | 1991
일탈을 꿈꾼 델마와 루이스의 이틀짜리 로드 트립은 예상치 못한 살인으로 얼룩지면서 둘을 도망자 신세로 만들었지만, 그 일련의 과정에서 선보인 여행 룩은 더없이 멋졌다. 데님 재킷과 데님 셔츠, 하이웨이스트 청바지, 소매를 아무렇게나 말아 올린 티셔츠, 복고풍 선글라스와 카우보이 모자는 그 자체로 하나의 룩을 완성했고, 이후 수없이 많은 패션 화보의 영감이 되었다. 절벽을 넘어 하늘로 날아가는 자동차, 꽃미소를 자랑하는 젊은 브래드 피트까지 러닝타임 내내 볼거리로 가득하다.

블루 라군 | 1980
세기의 미녀라 불렸던 브룩 쉴즈의 가장 예쁜 시절을 담았다. 바다에서 조난당한 두 아이가 낯선 섬에서 생활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두 주인공은 대부분 나체로 등장하지만, 그중 몇 안 되는 옷 입은 장면이 아주 예쁘다. 바다에서 건져 올린 짐 가방에서 꺼낸 빅토리아풍 화이트 드레스가 필요에 따라 짧아지고 해체되며 진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식탁보, 레이스 등 천 조각을 얼마나 다양하고 예쁜 방법으로 몸에 두를 수 있는지 보여준다. 여름철 해변 룩을 위해 참고하기 좋을 듯!

업 앳 더 빌라 | 2000
예쁘고 우아한 여자의 삶은 그녀를 가만 두지 않는 남자들로 인해 고달파질 수밖에 없는 걸까? 서머싯 몸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휴양을 위해 피렌체의 예쁜 빌라를 찾은 젊은 미망인이 머나먼 타지에 가서도 세 명의 남자로 인해 다양한 해프닝과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는 이야기를 그린다. 남자들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여주인공은 어떤 영화에서든 특유의 고상한 아우라를 풍기는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가 맡아서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데, 그녀는 바이어스 컷 드레스, 투피스 앙상블 같은 세련된 옷을 입고 모자와 장갑을 항상 맞춰 착용하는 등 완성도 높은 스타일을 선보이며 비밀과 유혹, 살인으로 점철된 이야기를 끌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