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후반 미니멀리즘이 종말을 고한 뒤부터 패션 사조는 한 단어로 정의되지 않는다. 대신 패션 수도 여자들의 스타일이 10년간 강력한 유행을 만들었다. 뉴요커의 시크한 실용주의, 밀라니즈의 번지르르한 글래머, 그리고 멜랑콜리한 프렌치 시크가 물 흐르듯 지나간 지금, 우린 어느 도시의 옷 입기와 태도에 주목해야 할까? 바로‘런던 쿨’이다!

풀오버와 가죽 코트는 셀린(Celine), 블루 셔츠는 띠어리(Theory), 데님 팬츠는 칩 먼데이(Cheap Monday), 목걸이는 슈룩(Shourouk at So’salt), 뱅글은 홀리 폴튼(Holly Fulton at Daily Project), 아이폰 케이스는 쥬시 꾸뛰르(Juicy Couture), 양말은 마르니(Marni), 스트랩 힐은 구찌(Gucci).

풀오버와 가죽 코트는 셀린(Celine), 블루 셔츠는 띠어리(Theory), 데님 팬츠는 칩 먼데이(Cheap Monday), 목걸이는 슈룩(Shourouk at So’salt), 뱅글은 홀리 폴튼(Holly Fulton at Daily Project), 아이폰 케이스는 쥬시 꾸뛰르(Juicy Couture), 양말은 마르니(Marni), 스트랩 힐은 구찌(Gucci).

‘쿨(cool)’이라는 단어는 패션 안에서 영원한 프리패스다. 월마트의 싸구려 티셔츠에 실크 팬츠의 밑단을 더러운 부츠 안에 구겨 넣어 입는다 해도 쿨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곧 ‘스타일’이 된다. ‘쿨하다’는 것은 콜라주 같은 복잡한 조합과 배치다. 또 무언가를 선택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방식이며, 어떤 시대와 현상에 반응하는 ‘태도’다. 단순히 어떤 옷을 입느냐의 문제가 아니란 의미다. 예쁘다, 안 예쁘다,로 구분 지을 수도 없다. 그래서 스타일을 칭송하는 수많은 형용사 중, 세련된 젊은 여자들이 가장 듣길 원하는 말은 두말 할 것 없이 ‘쿨하다!’는 감탄사다. 아름다움과 멋지다는 것에 대한 모든 미사여구를 제압할 수 있는 한마디. “That’s Cool!”

어느 시절이든 ‘쿨’은 존재했다. 30~40년대엔 재즈가 쿨이었고, 60년대엔 케루악을 필두로 한 비트였다. 갱스터와 모터사이클, 로큰롤은 시대를 거스르는 쿨의 상징이며, 70년대는 히피와 약물, 80년대는 펑크와 나이키, 팝 아트와 씨디 플레이어가 쿨이었다. 90년대 이후 사람들은 리버 피닉스나 커트 코베인의 허무와 얼터너티브적 태도를 ‘쿨’이라 믿었다. 이렇듯 쿨은 시대마다 다양한 이름을 달았다. 그리고 그것들은 늘 음악이나 미술과 어울렸고, 그 역설적인 초연함과 반항심, 권위와 거리를 두는 태도는 언제나 패션계를 매혹시켜왔다. 지금 우리는 90년대 중후반 런던을 지배한 ‘쿨’이라는 시대정신에 집중할 필요가있다. 그것은 흥미롭게도 요즘 패션을 이해할 수 있는 멋진 키워드다. 2011년 이순간의 가장 날카로운 패션은 90년대 중후반 런던 에너지를 몸소 체험했던 쿨키즈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기 때문이다.

셀린의 2012 리조트 컬렉션이 스타일닷컴에 뜬 순간, 나는 오랜만에 ‘와, 정말 쿨하다!’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다. 피비 파일로는 런던 쿨키즈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녀는 클로에 시절, 여자들이 블루종 재킷과 팬츠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 어느 위치에 주머니가 달려야 쿨해 보이느냐까지 염두에 두고 디자인했을 정도로 ‘쿨’이 패션 DNA인 여자다. 클로에를 떠나는 마지막 선택도 쿨키즈다웠다. 최고의 자리에 있을 때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겠다”는 보도자료 한 장만 덜렁 남긴 채 초연한 표정으로 물러서지 않았나. 패션 피플들은 그녀의 컴백을 학수고대하면서도 내심 ‘대체 어쩜 그렇게 쿨하게 떠날 수 있는거야?’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피비는 골반에 슬쩍 걸친 팬츠와 모터 사이클 가죽 재킷으로 90년대 런던 쿨을 재현했다. 화려한 자카드 꽃무늬 재킷 속엔 티셔츠를 매치했고, 남성용 파자마 룩에는 숄더백을 대각선으로 짧게 맸는데(90년대에 헐렁한 셔츠에 백을 대각선으로 매보지 않은 여자가 있을까?), 그건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쿨해 보였다. 지금 당장 그 사이즈 백을 사서 그대로 따라 메고 싶을 정도로(실제로 피비는 잠옷으로 섹시한 슬립 대신 ‘하일디치&키’의 남성용 파자마를 입는다)! 피비의 절친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제리 스태포드의 말처럼 그녀는 패션을 대할 때 ‘언제나 가장 개인적인 것’을 꺼낸다. 살구색 빈티지풍 원피스엔 록스타 같은 체인 벨트와 장갑을 매치했고, 의도된 천박함이 느껴지는 화이트 플랫폼 힐과 밑위가 긴 화이트 팬츠 룩은 런던의 방종한 로큰롤 그 자체다. 가장 놀랄 만한 것은 셀린의 트레이드마크인 트렌치코트를 입힌 방식. 도대체 이 여자는 무슨 마법 같은 재능이 있길래 그토록 고급스러운 셀린의 트렌치코트를 군용 야상 점퍼 하나 툭 걸친 것처럼 만들까? 그건 ‘브릭 레인’과 ‘톱숍’ 매장 앞에 서서 매니큐어가 다 벗겨진 손톱을 물어뜯고 있는 런던 소녀들이 입는 그런 방식이다. 그순간을 두고 패션 전문가들은 ‘This is London Cool!”이라고 외쳤다.

이렇듯 런던 여자들은 스타일의 균형을 맞추는데 동물적인 감각을 지녔다. 지루하고 고전적인 것은 우스꽝스럽고 짓궂게, 거친 것은 소녀답고 로맨틱하게 만드는 감각 말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다듬은 ‘뉴욕 소셜라이트적’ 취향은 런더너들에겐 거리가 먼 얘기다. 1만 파운드짜리 버킨 백에도 낙서를 하고 해골이 그려진 브로치를 다는 것이 영국 여자들이니까. 얼마 전 도버 스트리트 마켓 꼭대기의 로즈 베이커리에서 본 여자는 세련된 런던 여자의 전형적인 몸집과 스타일이 눈에 띄었다. 제비꽃 컬러의 마르니 재킷에 꽃무늬 빈티지 블라우스와 클로에의 잘 빠진 팬츠를 입은 뒤 어이없게도 머리엔 커다란 데이지 꽃을 달고 있었다. 파리 여자들이라면 꽃 대신 샤넬 백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것은 히피와 캠핑, 시골 농장에 대한 영국인들만의 아련한 향수 같은 것이 느껴지는 옷차림이었다.

티셔츠와 야구 점퍼는 호레이스(Horace at Daily Project), 스터드 뱅글은 홀리 폴튼, 목걸이는 슈룩, 체인백은 샤넬, 플라스틱 뱅글은 루이비통(Louis Vuitton), 유니온잭 반지는 버틀러 앤 윌슨(Butler&Wilson at Darlingyou),데님 팬츠는 커렌트 엘리엇(Current Elliot at Detail)

티셔츠와 야구 점퍼는 호레이스(Horace at Daily Project), 스터드 뱅글은 홀리 폴튼, 목걸이는 슈룩, 체인백은 샤넬, 플라스틱 뱅글은 루이비통(Louis Vuitton), 유니온잭 반지는 버틀러 앤 윌슨(Butler&Wilson at Darlingyou),데님 팬츠는 커렌트 엘리엇(Current Elliot at Detail)

〈보그〉를 위해 일하는 런던의 패션 저널리스트 플럼 사익스는 “뻔한 것들을 찢고 부수고 파괴하는 것이 런더너의 취향이다”라고 언급한 적 있는데, 바로 그 점이 동시대 여자들로 하여금 런던 쿨에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피비는 “런던은 굉장한 에너지를 지닌 도시다. 파리에서 로맨티시즘을 습득했다면 런던에선 특유의 에너지와 반항적인 기운 속에 20대를 보냈다”고 말했다. 자신이 성장한 도시에서 얻은 에너지가 이렇듯 강렬한 것일까? 셀린 모델의 표정과 포즈, 사진의 톤 앤 매너 역시 만만치 않다. 반항과 허무함이 뒤섞인 90년대적 포즈와 표정 말이다. 사진은 의도적으로 균형이 맞지 않았고, 모델은 커트 코베인처럼 머리를 늘어뜨린 채 골반을 틀거나 팔짱을 끼고 있다. 쿨하다! 우아함? 극도의 세련됨? 고급스러움? 그런 표현은 완벽히 어울리지 않았다. 그건 분명히 셀린식 프렌치 룩을 기반에 둔 런던 출신 쿨키즈만이 보여줄 수 있는 태도였다. 〈세대를 가로지르는 반역의 정신, 쿨〉이라는 책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쿨한 사람은 어떤 일이든 어려움 없이 산뜻하게 처리하고, 실속 있게 처신하면서도 속물 티를 내지 않고, 문명의 이기를 능란하게 다루면서도 초연해 보이고, 쾌락을 좇으면서도 자기 절제에 철저하며, 냉소적이면서도 타인을 배려할 줄 알고, 일상에 찌들지 않고 게임 하듯 유연하게 삶을 꾸려나간다.” 파일로를 위한 완벽한 문장처럼 느껴지지 않나!

‘지방시=오드리 헵번’이라는 공식을 완전히 지운 리카르도 티시 역시 90년대 런던 쿨키즈 대열에 있다. 그가 90년대 중후반, 센트럴 세인트 마틴 재학 때부터 지금까지 가장 큰 영향을 받은 디자이너는 단연 헬무트 랭이다. 랭은 90년대 쿨의 상징적 존재다. 당시 랭의 정돈된 두뇌 속에서 나오는 초연하고 차가운 재단에 매료되지 않은 패션 학도들은 없다. 티시는 몇 시즌 동안 고스와 로맨티시즘을 절묘하게 뒤섞은 룩에 랭의 이미지를 대입해 호평 받았다. 덕분에 그의 옷에선 90년대 중후반의 향수가 느껴진다(그것은 셀린에서도 발견된다). 티셔츠에 대한 무한한 애정, 야구 점퍼를 단순하게 변형한 재킷, 핀업걸을 그린 스웨트 셔츠, 기름기 흐르는 실크 스커트 수트에 괴짜 같은 모자의 매치, 꽃무늬에 간호사 같은 뿔테 안경을 씌우는 반항은 런던이라는 도시에서 습득한 ‘쿨’이다. 그 기괴함이란! 전설적인 패션 에디터 리즈 틸버리스는 “세상의 짓궂고 기괴하고 별나고 로맨틱한 것들을 뒤섞은 후 ‘이것이 바로 최첨단’이라고 자신만만하게 주장한다”라고 런더너를 정의했다. 이번 시즌 지방시는 그런 의미에서 최첨단 그 자체다. 티시의 ‘런던 쿨’은 자신의 옷 입기에도 적극적으로 반영된다. 체크 셔츠와 낡은 티셔츠, 커다란 농구화, 스웨트 셔츠, 한 번도 빨지 않은 것 같은 낡은 데님 등. 킴 존스나 맥퀸 같은 이스트 런던 출신의 디자이너들과 공통분모를 이루는 옷차림이다. 티시의 개인적 스타일은 그가 이탈리아 출신임을 잊게 할 만큼 지극히 런던 스트리트풍이라는 사실이 재미 있다.

한편 90년대 런던 클럽 키즈이자 당시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거칠 것 없는 펑크 신봉자, 킴 존스는 이번 시즌부터 루이 비통 남성복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내정되었다. 던힐과 멀버리, 움브로 등에서 일한 그는 늘 런던 스트리트 쿨을 기반으로 열광적 지지자들을 형성했다. 그의 첫 루이 비통 남성복 역시 ‘여행’이라는 비통 철학 위에 자신만의 런던 스트리트 풍 유머와 실루엣을 더해 호평을 얻었다. 미국인인 채 언제나 파리의 밤 문화와 런던 스트리트 문화에 매료된 마크 제이콥스 역시 존스의 친구이자 팬으로 유명하다(그를 비통으로 끌어온 것도 제이콥스의 영향이 크지 않았을까?). 중년 아저씨처럼 후덕한 외모와 달리 동물을 사랑하고 귀여운 캐릭터를 좋아하는 존스는 런던 출신답게 다채로운 컬러와 스트리트 스타일에 대한 독특한 감각을 지녔다. 또 전공 덕분인지 그래픽적 터치도 묻어 있다. 이런 젊고 신선한 감각 덕분에 디자이너들이 좋아하는 디자이너로도 유명하다. 제이콥스는 물론 톱맨, 컬러풀한 이스트 런더너들인 헨리 홀랜드와 카세트 플레이어의 캐리 멘데즈에까지 영향을 미쳤으니까. 그것은 펭귄 모양의 머니클립과 넥타이 핀을 진중한 코트 위에 꽂는 유머 같은 것. 페인트와 때묻은 티셔츠를 입고도 예쁜 꽃을 드는 영국 남자 특유의 뒤틀리고 짓궂은 장난과 엉뚱한 아이디어는 사랑스럽다 못해 쿨하다. 실제로 제이콥스는 어느 인터뷰에서 “킴 존스는 늘 쿨하다. 움브로부터 던힐까지 그의 모든 작업들을 동경한다”라며 그의 쿨한 감각에 애정을 보였다.

런던에서 일하는 사진가 전승환은 킴 존스의 루이 비통 입성으로 90년대 런던 스트리트 쿨이 컴백할 것으로 예측한다. “몇 년 전 붐박스와 헨리 홀랜드 같은 이스트 런더너들이 조명 받았을 때, 패션계가 런던에 주목하지 않을까 다들 기대했었다. 90년대 말, 갈리아노, 맥퀸, 맥카트니 등이 파리 하우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를 차지했을 때처럼. 두 시즌도 안 돼 조용히 사라졌지만 피비 파일로와 킴 존스라면 다시 ‘런던 쿨’을 트렌드 중심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예측대로라면 셀린과 루이 비통이라는 고급스러운 레이블을 통해 보다 세련되고 정제된 형태로 90년대 ‘런던 쿨’이 부활될 것이다.

그런가 하면 스텔라 맥카트니와 클로에에서 물러난 한나 맥기본 등 런던 쿨키즈들은 패션과 스스로의 삶 속에서 자기 세대 여자들이 원하는 것들을 발견해왔다. 90년대 중후반부터 패션에 매혹된 채 20대를 보낸 세련된 개인주의자들이다. 그들의 옷엔 로큰롤과 로맨티시즘, 클럽의 열기와 미니멀리즘에 대한 집착이 엿보인다. 그것이 ‘90년대 런던 쿨’이다. 남성복에 대한 설득력 있는 취향과 섀빌로우에서 영향을 받은 시원시원한 테일러링, 도도하게 흐르는 럭셔리, 꽃무늬와 풀오버 니트, 빈티지 같은 목가적이고 향수가 깃든 것들을 모던하게 다루는 재능, 자기 방식을 고집하면서도 어떤 금기가 없는 옷들. 그것은 “외출하기 직전 거울을 보며 반드시 무언가 하나는 뺀다”라는 케이트 모스를 떠오르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모스야말로 90년대 런던 쿨의 핵심!).

런던 남서부에 살며 때론 패션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시간을 만들 줄 아는 사람들. 어쨌든 런던 쿨키즈들의 패션을 대하는 방식(개인적 경험들과 거리문화, 그리고 하이소사이어티의 융합)은 동시대 디자이너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또 그들이 만든 옷은 현재 여자들로 하여금 ‘예뻐지고 싶다’ 보다 ‘쿨해지고 싶다’ ‘멋지게 보이고 싶다’는 열망을 불러일으킨다. 과거 샤넬이나 생 로랑이 여자들에게 걸었던 마법처럼. 런던 쿨키즈들이 해냈던 것처럼 부디 누군가 쿨함을 뜻하는 다른 용어를 만들 수 있기를! 하지만 그때까지 그들을 향해서는 ‘바로 그 단어’를 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How Coo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