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멋쟁이들은 어떤 삶을 살며, 어떤 옷을 입고, 어떻게 스타일을 완성할까? 그녀들의 옷장을 들여다보고, 취향과 스타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의상은 모두 개인 소장품.

의상은 모두 개인 소장품.

 

 

곱게 빗어 넘긴 회색빛 머리, 소매에 러플이 달린 저지 소재의 드레스를 입은 진태옥이 고요한 미소로 반긴다. 오는 9월부터 루브르 박물관에서 시작되는 전시 준비 때문에 아틀리에가 엉망이라고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80세를 넘긴 진태옥의 모습은 모든 여자가 바라는 노년의 완벽한 모습이었다. 주름이 진 눈가에는 인자함이 깃들었고, 눈빛은 소녀처럼 맑았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너무나도 잘 아는 여자는 우아하게 나이 드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취향과 스타일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취향은 유전자에 녹아 있어요. 그리고 자기가 살아온 역사를 내포하고 있죠. 취향의 결과로 눈에 보여지는 것이 스타일이 아닌가 생각해요. 미적인 유전자는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그게 온전하게 발전하려면 자기 경험, 정서, 환경 등이 축적되어야 해요. 그런데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습관처럼 자리 잡으면 취향과 스타일이 일치하는 순간이 와요.

언제 그것이 일치되었다고 느꼈나요?
저는 굉장히 일찍 그것이 일치되었어요. 물론 젊었을 때는 실패도 하면서 도전과 변화를 즐겼지요. 그게 50대였는지 60대였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침에 흰 셔츠에 검정 팬츠를 입고 거울 앞에 섰는데 흑백의 조화를 보면서 ‘이게 나이구나, 내가 이것을 향해 그 많은 시간을 디자이너로 살아온 거구나’ 하고 느꼈어요. 여기가 종착역이라는 생각이요.

그렇게 다져진 취향은 어떤 것이죠?
심플, 모던, 미니멀.

미니멀과 모던은 어떤 거라고 생각하나요?
미니멀이란 자기 몸에 붙어 있는 각질을 떼어내는 것과 같아요. 자기를, 욕심을 내려놓아야 하지요. 때로는 아프기도 하죠. 그건 의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에요. 제 철학과 신조이기도 하지만 살아온 환경이기도 해요. 어머니가 신학을 공부하셔서 굉장히 담백한 생활을 하셨어요. 남편과 일찍 사별해 화려한 색을 입지 않으셨죠. 세상을 조금 알아가고 미의식이 생기고 난 후, 과거를 되짚어보니 소박한 환경에서 자라 이런 정서를 갖게 된 거였어요.

남보다 탁월한 오감을 타고난 것이 삶을 피곤하게 만들진 않나요?
전혀요. 길을 가다가 손톱만큼 작은 노란 꽃을 본 적이 있는데 너무 아름다워서 꽃에게 말을 건넨 적이 있어요. ‘너는 누구를 위해서 태어났니?’라고 물으니 꽃이 ‘당신을 위해서요’라고 대답했죠. 아침 햇살이 구름에 물들 때처럼 아주 사소하지만 아름다운 것을 마주할 때면 이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 제게 주셨고, 그 사실이 감격스러워요. 그래서 행복하죠. 하지만 작업을 할 때는 고통스러워요. 욕심 때문에 자꾸 무엇을 더하려고 하는 거예요. 떼어내고 덜어내고 내려놓아야 하는 과정은 힘겹죠. 욕심을 부리면 주제를 잊어버리기 쉬워요. 욕심을 버리면 여백도 생기고 아름다움도 생기고 남에게 감동도 줄 수 있죠. 작은 것에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결국 욕심이 없다는 거예요.

욕심을 버리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나요?
쉽지는 않아요. 철저히 단순해지고 담백해지는 순간은 죽음이 앞에 서 있을 때겠죠. 이런 철학이 디자인을 할 때면 흔들려요. 디자이너인 저를 흥분시키는 물질적인 것을 탐하는 것 자체가 욕심이니까요. 그래서 프리다 칼로 전시를 못 가고 있어요. 곧 컬렉션을 준비해야 하는데 그의 그림을 보고 흔들리까 봐서요. 언젠가  마크 로스코의 전시를 보고 눈물이 났어요. 그의 그림엔 관중을 압도하는 거대한 컬러와 평면밖에 없는데 그 안엔 무한한 감동이 있었죠. ‘왜 나는 이 사람이 주는 단순함의 감동을 줄 수 없을까’라고 고민도 해요. 디자이너의 인생과 인간의 인생을 언제 완전하게 합일시켜야 하는가가 제가 가진 숙제이죠.

진태옥이 만든 옷은 여성의 여성성을 최대치로 끌어낸다는 느낌이에요.

사실 옷은 디자이너가 완성하는 것이 아니에요. 입는 사람이 완성하는 거죠. 그래서 제 옷을 입는 사람들이 소중해요. 나이가 들어서 백발이 되고, 주름과 검버섯이 생겨도 아름다운 여자이기를 갈망하고, 그러한 철학을 가진 여자가 제 옷을 입기를 바라요.

정말 곱고 아름다워요. 그렇게 나이 들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요. 
여자이기를 포기하지 마세요. 여자는 그냥 여자인 자체가 아름다운 거예요. 그러기 위해선 거울도 자주 봐야 하고, 미에 대한 관심도 많이 가져야 하고, 자세도 항상 좋아야 해요. 그리고 정신과 육체가 함께해야 해요. 전 아침 7시에 일어나서 수영, 스트레칭, 근력 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해요.

아름다운 여자는 어떤 여자일까요?
지성을 뺀 아름다움을 보는 건 불편하죠. 무엇보다 인간을 사랑해야 해요. 전 자아가 굉장히 강한 사람이었어요. 독선적이었지요. 하지만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깨닫고 상대를 포용하고 이해할 줄 알게 되면서 마음에 여유가 생겼어요. 아름다움이란 남을 돌볼 줄 아는 거예요.

본인이 가장 멋져 보일 때는 언제인가요?
글쎄요. 제가 멋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네요. 여자가 저럴 때가 참 멋있겠다는 상상은 하죠. 남자의 셔츠를 입은 여자가 아침에 일어나 침대 위에 앉아 있어요. 머리카락은 흐트러지고 셔츠가 뒤로 반쯤 젖혀져서 하얀 어깨와 다리가 드러나 있죠. 자연스럽게 흐트러진 모습이 제일 섹시하고 아름다워요. 얼굴과 몸에 세월이 드리워지는 걸 막으려고 인위적으로 성형을 하는 건 인격이 의심되는 행동이에요. 하느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에 그 사람의 장점을 꼭 두었어요. 그대로 늙으면 품격이 되죠.

진태옥 하면 화이트 셔츠를 떠올리게 되는데 평소에 주로 입는 스타일은 무엇인가요?
심플하게 입어요 셔츠와 티셔츠를 주로 입는데, 검정 아니면 흰색이죠. 특히 셔츠를 입어야 마음이 편해요. 디자인할 때는 주로 셔츠를 입죠.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설명하기 어려워요. 우리가 엄마 품에 안기면 편안하듯이, 저에게 셔츠는 그런 거예요.

오늘 입은 의상도 멋져요. 
소매에 러플을 단 스웨트 소재 드레스예요.너무 장식이 많으면 아름다움은 없어지는 것 같아요. 젊었을 땐 커다란 귀고리에 선글라스, 모자까지 쓰고 다녔어요. 지금의 스타일로 오기까지의 과정이었죠. 그런 걸 다 경험하고 나면 결국 본질만 남아요. 젊었을 땐 멋진 것에 관심도 많이 갖고, 멋도 많이 부리고, 해보고 싶은 건 마음껏 하세요.

Her Essential Items

욕심을 버리고 사람을 사랑하며 여자이기를 절대 포기하지 말라 말하는 진태옥의 옷장에는 검거나 혹은 하얀, 단순한 형태 안에 집요하게 섬세한 디테일을 지닌 것들이 들어 있다. 세상의 물질적 취향을 달관한 진태옥이 애정하는 것들.

 

1 “화이트 셔츠는 기본 중에 기본인 옷이에요. 남성의 것이었던 셔츠에 여성성을 더하면 은유적인 섹시함이 드러나죠. 허리를 조이는 코르셋 디테일의 화이트 셔츠는 2002년 컬렉션 작품이에요. 밑단을 불규칙하게 잘라 아방가르드한 느낌도 있죠.”

2 나무를 직접 조각해 만든 안경 케이스.

3 알라이아의 아이패드 케이스는 클러치백으로도 활용한다. 술이 달린 클러치백은 피에르 아르디의 것으로 파티나 음악회에 갈 때 들곤 한다.

4 정확하게 어디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여행 때 구입한 자개 가방이다. 내게로 온 지 벌써 40년이 되었다.

5 토즈의 고미노 슈즈는 편하면서도 스타일이 멋있어 자주 신는다. 송치 소재에 작은 물방울 무늬가 사랑스럽다.

6 세공한 은을 가죽과 매치해 벨트를 만들었다.

7 “메종 마르탱 마르지엘라와 마이키타의 협업 선글라스예요. 마르탱 마르지엘라의 것들은 여백의 미가 느껴져서 좋아요. 파리에 가면 마르탱 마르지엘라의 정신을 느낄 수 있는 라 메종 샹젤리제 호텔에 묵곤 하죠. 나와 생각이 비슷한 디자이너와 공감할 때 행복해요.”

8 인도 여행에서 산 명함지갑. 섬세한 세공이 마음에 들었다.

9 손으로 한땀한땀 정성스럽게 수를 놓았다. 이렇게 공을 들여 작품을 만드는 것은 내 정신을 입고 싶어 하는 이들을 위해서이다.

10 모자를 즐겨 착용해 아틀리에에 여러 종류의 모자를 가져다 놓았다. 요지 야마모토의 울 소재 모자.

11 2003년에 발표한 자개 베스트. 가죽 위에 자개를 하나하나 달았다. 매우 아끼는 컬렉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