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눈빛을 빛낼 줄 아는 나영희는 분명 평범하지 않은 여배우이다. 완벽하게 빛나는 블랙처럼 차갑고 도도하지만 날카로운 가시 속에 보드라운 꽃잎을 숨긴 장미처럼 여리고 아름답다. 나영희가 마주한 50대의 시간처럼.

슬립 드레스는 라펠라(La Perla).

슬립 드레스는 라펠라(La Perla).

 

 

작품 속 나영희는 늘 얄미웠다.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에서 이기적인 작은엄마도 그랬고,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철딱서니 없는 엄마도 그랬다. 드라마 <프로듀사> 속 변 대표는 시종일관 표독스러운 눈빛을 빛냈고, 드라마 <가족끼리 왜 이래>의 백설희는 속이 빤히 보이는 얄미운 시어머니였다. 그래도 우리는 그녀를 차마 미워할 수 없었다. 드라마 속 나영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언제나 모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남몰래 가슴 먹먹해하는 서투른 엄마였고, 차가운 표정 뒤 여린 마음을 힘겹게 숨기는 가녀린 여자 그 자체였으니까. 그녀가 구축한 것은 나영희만이 할 수 있는 이런 연기뿐만이 아니다. 하얀 피부와 도도한 눈빛, 가느다란 몸매 그리고 세련된 패션 스타일까지. 사실 나영희는 우리가 생각하는 아름답게 나이 들어가는 여배우의 가장 전형적인 사례일지도 모른다. 스튜디오에 들어선 나영희의 첫인상은 나른했다. 화장기 없는 얼굴과 작은 체구 그리고 농담을 섞어 던지는 부드러운 말투 때문일 것이다. 촬영이 시작되었고 날카로운 언더라인을 그린 나영희는 드라마 속에서처럼 차가운 매력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잘 관리된 50대 여배우의 눈빛과 살결, 그리고 몸이 반짝거리는 순간이었다.

작품마다 패션이나 메이크업이 화제가 되곤 했어요. 그렇게 고급스럽고 멋지게 나이 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새로운 작품을 시작할 때마다 외모부터 설정해요. 작가가 시놉시스를 짜고 캐릭터를 주면 그 인물을 구체화시키는 건 배우 자신에게 달려 있어요. 작가가 그려둔 전체적인 그림 안에 상상력을 발휘해보는 게 재미있잖아요. 예를 들어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서는 천박하면서도 귀여운 면이 있는 엄마를 표현하기 위해 뽀글뽀글하게 파마를 했어요. 화려한 입술 컬러로 색을 더하고요. 드라마 <프로듀사>의 변 대표는 ‘변파이어’라고 불릴 만큼 차갑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었죠. 일단 머리는 날카로운 느낌으로 언밸런스하게 커트하고 아이라인도 차갑게 올려 그려 냉혹한 느낌을 더했어요. 이건 배역 속 인물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나만의 과정 같은 거예요. 이렇게 외모를 설정해두고 나면 역할 속으로 흡수되기가 훨씬 쉬워지거든요.

드라마 속에서 차갑지만 이면은 여린 캐릭터인 경우가 많아요. 실제 성격은 어떤가요?

냉정해 보이지만 사실 정이 많은 편이죠. 싫은 건 죽어도 못하고, 또 어떤 일에는 무서울 만큼 집요해지기도 해요. 그래서 나 자신과의 싸움을 해야 할 때가 많고요. 가끔은 완전 ‘허당’이 되기도 하죠. 이런 양면성 때문에 배우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다양한 성격을 가지고 있으니까.

 

가죽 톱은 이진(Iijin).

가죽 톱은 이진(Iijin).

 

 

촬영장에서 선배보다 후배가 많은 나이가 되었어요. 나영희는 어떤 선배 배우인가요?
조연은 자신의 존재감도 빛내야 하지만 주연 배우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받쳐주는 역할도 충실히 해야 해요. 그러니 편한 선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제가 그들의 문화, 태도를 완벽하게 이해한다면 그건 아마 거짓말일 거예요. 그런데 아무래도 20대의 딸이 있다 보니, 후배들을 좀 더 넉넉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그들에게 배우는 점도 많아요. 특히 최근에 드라마 <프로듀사>를 촬영하면서는 아이유에게 많이 놀랐어요. 며칠씩 밤을 새우는 힘겨운 촬영에도 흐트러짐이 전혀 없더라고요. 최고의 위치에 오른 이유가 있구나 싶었죠.

나이가 들면서 주연에서 조연에서, 예쁜 여자에서 엄마로 역할이 바뀌기 마련이죠. 배우로서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다행히 차근차근 마음의 준비를 해온 것 같아요. 당대에 유명했던 선배 배우들이 뒤로 물러나며 조연으로, 단역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여러 번 지켜보며 난 그때가 되면 좀 더 편안하게 받아들이자 하며 수없이 되뇌었죠. 덕분에 충격이 생각보다 크진 않았어요. 더구나 주인공 한 명이 아니라 여러 인물이 극의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추세로 바뀌고 있잖아요. 이젠 엄마 역할이라고 주인공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는 거죠.

한 시대를 쥐락펴락했던 여배우라면 특히 자신이 나이 들어간다는 사실에 적응하기 힘들 것 같아요.
흰 머리가 늘고 주름이 깊어지는 게 서글프긴 하지만 그 이면에는 분명 시간만큼 채워지는 것들이 있어요. 엄마의 포용력, 연륜 있는 배우의 노련함, 성숙함…. 20~30대의 나영희라면 상상할 수 없었을 새로운 무기들이 생긴 거잖아요? 나이가 우리에게서 앗아가는 것 대신 채워주는 걸 생각해보면 오히려 뿌듯해져요. 대신 아름답게 나이 들어가는 건 저에게도 남은 숙제예요.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이 보이잖아요. 멋지게 치장해도 찌든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보기만 해도 편안한 여유를 가진 얼굴도 있어요. 그런 사람들을 보며 40세가 넘어갈 즈음부터 전 제 얼굴을 아름답게 완성해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

 

레이스 톱은 라펠라.  

레이스 톱은 라펠라. 

 

 

그렇다면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나요?
주름을 보지 말고 ‘나’ 자신을 보려 노력하죠. 욕심 내지 말고 오늘도 딱 하루 분량만큼만 살아내자고 주문처럼 되뇌어요. 그건 하루를 기쁘게 살고 싶다는 의미 같은 거예요. 어제를 후회하고 내일을 미리 걱정하며 현재를 낭비하지 말자는 것.

하얀 피부, 날씬한 몸매까지 완벽하게 자기 관리를 해온 것 같아요. 
그저 전 ‘여자’의 마음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어요. 나이가 먹어도, 엄마가 되어도 우린 여자인 거니까. 객관적으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아름다워지기 위해 뭔가를 노력한다는 것이 중요한 거죠. 사실, 전 전형적인 엄마 역할에는 안 어울리는 외모와 목소리를 가졌거든요. 현모양처형 엄마보다 도시적이고 자기 관리에 철저한 현대적인 엄마 모습에 더 가까울 거예요. 그러기 위해선 나 스스로를 좀 더 타이트하게 유지해나가야 했어요. 경락 마사지를 꾸준히 해서 턱과 목에 군살이 붙지 않게 하려 애썼고, 매일 틈 날 때마다 스트레칭을 했죠. 허리가 안 좋은 편이라 거창한 운동 대신 되도록 많이 걷고 집에서도 끊임없이 움직여요. 하다 못해 장아찌라도 담그면서요. 우리 딸이 ‘엄마는 한시도 가만있지를 못해’라고 구박할 정도라니까요.

 

드레스는 미스지 컬렉션(Miss Gee Collection).

드레스는 미스지 컬렉션(Miss Gee Collection).

 

 

나영희만의 피부 관리 노하우가 궁금해요.  
확실히 피부는 부지런하면 달라져요. 오일부터 폼, 워터까지 클렌징은 3단계. 기초 제품도 다섯 가지 이상을 사용해요. 촬영 전날에는 시트 마스크를 붙여서 보습에 신경 쓰고요. 건조하면 안색까지 칙칙해 보이니까요. 부기를 줄이려고 촬영 당일에는 평소보다 한두 시간 먼저 일어나죠.

여전히 가녀린 몸매를 유지하는 비결이 있다면? 
나이가 들면 먼저 턱이 늘어지고 승모근이 솟으면서 목이 굵고 짧아져요. 그게 너무 싫어서 어깨선과 목을 생각날 때마다 마사지해요. 주먹을 쥐고 손가락 마디 뼈를 이용해서 수시로 얼굴선을 훑어주는 거죠. 효소도 꾸준히 마셔요. 몸의 독소가 잘 빠져나가 부기가 줄어드는 것 같거든요. 부기가 결국 군살이 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평소에 습관적으로 달거나 튀긴 음식은 피하는 편이고요.

앞으로 어떤 배우로 남고 싶나요?
언제나 존재감이 큰 배우로 남고 싶죠. 그리고 건강하게 살고 싶어요. 영화 <황금연못> 같은 소소한 노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작품에 출연해보고 싶고요. 내 나이에 맞는 역할을 찾아가고 싶다는 욕심 같은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