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혜원은 여성이자 엄마인 패션 사진가다. 한국을 넘어 세계 이곳 저곳에서 활동하며 대단한 이름들을 자신의 카메라 앞에 불러들이는 그는 아직 셔터를 멈출 마음이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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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히는 사진가를 보는 건 어쩐지 새로워요. 오랜만인가요? 
10년 만에 찍혀봤어요. 되게 어색하고, 골탕 먹은 느낌도 들고 재미있네요.(웃음) 찍는 거랑 다르게 찍히는 건 아직도 영 어색해요. 내 진짜 모습이 드러나는 것 같아서 쑥스럽거든요.

사진가는 지금처럼 낯선 사람이 앞에 있을 때 무슨 생각 하세요? 
첫인상을 보죠. 직업이 그래서인지 첫 느낌을 오래도록 잊지 못하는 편이에요. 어떤 이유에서든 관심이 생기는 사람이면 사진을 찍고 싶기도 하고요. 그런데 그것도 좀 변한 게, 어릴 땐 나름대로 첫인상을 잘 본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 확신이 있었어요. ‘저 사람은 이럴 것이다’. 타입을 나누고 분류하고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오히려 일을 하면 할수록, 마흔 넘어부터 그러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해요. 내가 본 첫인상이 틀릴 때가 많더라고요.

사진가로서의 시선이나 관심이 가는 피사체도 좀 변하나요? 
관심이 가는 피사체는 계속 변하죠. 예전에 좋았던 인물이 지금도 좋을 확률은 그렇게 높지 않아요. 제 경험이나 나이나 상황에 따라 관심이 생기는 피사체도 계속 달라져요. 우리 딸이 열여섯 살인데요. 요즘 애들은 뭐든 빠른지 친구들 중에 벌써 자기 성 정체성을 결정한 애들이 많대요. 제 아이가 “엄마, 내 친구 중에 걔는 게이래”라는 말을 저한테 먼저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저도 길거리를 다니는 애 중 풍기는 느낌이 좀 다른 애들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하죠. 관심도 생기고요. 또 선거철에 보면 정치하는 나이 든 사람들 보는 것도 재미있어요. 다 비슷한 듯 다르게 생겼잖아요. 사람들이 어떤 얼굴을 보면서 믿음을 느끼는지 생각하고요. 사진가는 그냥 그런 식이에요. 어찌 보면 철저히 자기 위주죠.

그런 다양하고 집요한 관찰자의 시선은 사진가에게 꼭 필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나요? 
당연히. 그래야 찍고 싶은 사람이 계속 생기거든요. 게다가 저는 원래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많아요. 제가 만나는 모든 사람의 라이프에 과도할 정도로 그래요. 그래서 어떤 사람의 작은 변화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에요. 제가 최근 5년 정도 한국을 떠나 미국에 살면서 일했거든요. 당연히 거기서 찍은 피사체의 90%가 외국인이에요. 외국인도 그냥 보통 사람이 아니죠. 모델, 그중에서도 경험이 많은 슈퍼모델이란 말이에요. 어쩌면 오늘 한 번 찍고 다시 만날 일이 없는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 피사체를 만나면 초조해지는 거죠. 내가 뽑아내고 싶은 걸 다 뽑아야 한다는 욕심도 생기고요. 그러다 보면 집요해질 수밖에 없어요.

요즘은 어떤 영역을 찍고 싶으세요? 
피처요. 피처 찍고 싶어요. 미국으로 떠나기 전 10년 동안 <보그 코리아> 하우스 하면서 다양한 피처 영역의 인물을 다 소화했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니까 매달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게 힘들기도 했지만, 참 재미있었어요. 다시 돌아온 서울에선 그런 진짜 사람을 많이 찍고 싶어요. 아티스트든 연예인이든 정치인이든 누구든.

원래 사진가가 되고 싶으셨어요? 
아니요. 고등학교 때 막연하게 미술이 하고 싶더라고요. 디자인이요. 대학교에서 그걸 전공하고 싶었죠. 근데 우리 집안에는 그런 걸 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아버지도 예술을 잘 모르시니까 엄청 반대를 하셨죠. 그때만 해도 예술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인식이 강할 때니까요. 결국 포기하고 남들이 하는 그런 걸 전공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사진을 시작하셨죠? 
사진과 다니는 친구가 있었는데요. 생각해보니까 미술이나 디자인이나 사진이나 다 아름다움을 만드는 일이더라고요. 그 친구 숙제를 돕기도 하고, 같이 공부하면서 꿈을 키웠어요. 그러다 보니까 본격적으로 공부해보고 싶더라고요. 아버지 몰래 유학 준비를 시작했어요. 돈도 모으고요. 정확히 기억나요. 스물네 살 7월에 아버지에게 그냥 통보하고 미국으로 떠났어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셈이죠.

처음부터 패션 사진을 꿈꾸신 건가요? 
그건 아니에요. 원래는 파인 아트를 하고 싶었죠. 인물 사진에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요. 저는 원래 스틸 라이프를 좋아했으니까요. 어빙 펜의 스틸 라이프도 좋아했고요. 그때 학교에서도 잘한다 잘한다 하고, 여기저기서 상도 많이 받다 보니까 졸업할 때쯤엔 나름대로 들떠 있었죠. 대학원까지 졸업하고 교수가 되는 게 목표였어요. 그때가 2000년 초인데 막 IT 관련 이슈가 뜰 때였잖아요. 그쪽으로도 관심이 생겨서 관련된 공부를 더 시작하게 됐고요. 한 1년 정도 지났나, 결국 사진이 찍고 싶더라고요. 그때 제 인생을 바꾼 수업 하나를 듣게 됐고요.

그게 뭐죠? 
교양 과목으로 ‘네이처 오브 포토그래프’라는 수업을 들었어요. 이를테면 사진의 본질에 관한 수업이었는데, 그 수업에선 오로지 ‘왜?’만 묻더라고요. 교수는 내가 사진을 잘 찍든 못 찍든 아무 관심이 없었어요. 오로지 왜 이 사진을, 왜 이렇게 찍었는지 이유만 물어봤어요. 그전까지 저는 어떻게든 잘 찍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거기서 미치겠더라고요. 그때 진짜 많이 울었어요. 답답하고 속상해서요. 그때 처음으로 내가 진짜 어떤 사진을 좋아하는지 많이 생각했는데요. 결국 연출 사진이더라고요. 한 장의 사진 안에 굉장히 다양한 스토리와 장치와 인물이 담긴 연출 사진이요.

제프 월 같은 연출 사진가를 말씀하시나요? 
맞아요. 결국 제가 가장 좋아하고, 하고 싶은 사진이 그거였어요.

연출 사진은 어떤 의미에서 일종의 화보라고 볼 수도 있죠. 
그러니까요. 그때부터 미국에서 연출 사진 위주의 작업을 많이 했는데요. 그때만 해도 한국에선 그런 스토리텔링이 담긴 사진이 흔치 않았어요. 대부분의 패션 매체에서 제 포트폴리오를 좋아하더라고요. 덕분에 일을 많이 하게 됐고요. 정말 우연한 기회에 패션 사진을 시작하게 된 거죠. 저도 돈이 필요했으니까요. 파인 아트만 하려면 돈이 정말 많이 들거든요. 원래는 돈을 좀 벌어서 다시 제 작업을 하려고 했어요. 뭐 결국 뜻대로 되진 않았지만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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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매체와 일하셨지만 10년간의 <보그 코리아> 하우스 경험은 각별한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요? 
미운 정은 티를 내면 안 되니까(웃음) 곱고 큰 정을 나눈 매체라고 말할게요. 고마운 존재고요. 함께 걸어온 길이 있죠. 그 시행착오를 저도 함께 겪었다고 할 수 있어요. 어쩌면 지금도 그렇고요. 우리나라 패션 매거진의 역사가 이제 25년 정도 된 거잖아요. 패션 매거진의 존재가 단단하게 완성되기 전에 그 중심에 함께 있었던 거죠. 그러다 보니까 의미도 있었지만 아쉬움도 남는 것 같아요. 제대로 된 패션을 보여주지도, 혹은 지금처럼 패션을 향유하는 세대를 자유롭게 표현하지도 못했다는 아쉬움이요. 아무튼, 시간을 갖는 의미로 한국에서의 일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떠났던 거였어요.

미국에서의 생활은 어떠셨어요? 사진의 끈을 놓지 않고 여러 작업을 하셨잖아요. 
처음에는 많이 지쳐 있었죠. 그래서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고, 그냥 천천히 기다리면서 작업을 했죠. 사진이라는 게요. 절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요. 함께 하는 사람이 가장 중요해요. 내가 일하고 싶은 사람, 나와 일하고 싶은 사람을 알아 보는 일, 그리고 관계를 만드는 일이요. 시간이 흐르고 사람이 쌓이다 보니까 이런저런 기회가 좀 생겼죠. 덕분에 미국에 있을 때도 다양한 일을 할 수 있었어요.

일하는 엄마시잖아요? 
네, 딸은 제게 가장 중요한 존재죠.

사춘기 딸과 엄마의 관계는 어떤가요? 
시크하죠.(웃음) 저는 걔를 진짜 좋아하는데, 걔는 저보단 덜 좋아할 수도 있어요. 아, 어쩌면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 걸 모를 수도 있겠네요. 저는 만약에 제 딸이 제가 일하는 걸 원하지 않으면 내일이라도 당장 사진 그만둘 수 있어요. 그 정도로 중요한 존재라고 보시면 돼요.

아이로 인해 사진가로서의 커리어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처음 미국 가려고 마음먹은 이유는 솔직히 저도 저지만 우리 딸을 다른 환경에서 공부시키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좋은 환경에서요. 근데 딸에게는 그렇게 말 안 했어요. 나 때문에 간다고 했죠. “엄마는 미국에서 일해보고 싶은데, 혹시 너도 생각 있으면 같이 가자. 가서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자.” 뭐 그렇게요. 근데 딸이 안 간다고 했으면 아마 저도 안 갔을 거예요.

여러 감정이 드는 말이네요. 아이가 있는 엄마이자 여성 사진가가 흔하지 않다는 점도 그렇고요. 
아이가 있는 여성 사진가가 진짜 없죠. 특히 한국에는. 저와 조선희 실장님 정도인 것 같아요. 그게 참 대단한 일이라고들 많이 그러더라고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고, 직업인으로서 분명히 커리어에 제한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저는 제 딸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하고 싶은 거, 좋아하는 게 굉장히 많은 아이인데요. 그 마음을 잃지 않고 계속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어쩌면 이 땅에선 그마저 쉽지 않겠죠. 제가 이렇게 보니까요. 자아와 자존감이 강한 여자아이들이 어른이 될 때까지 그 마음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아 보여요. 엄마로서, 또 같은 여자로서 그걸 지켜보는 게 안됐죠. 그렇기 때문에 지금 여성들이 더 당당했으면 좋겠어요.

최근 여성 패션 사진가가 늘고 있는 건 분명 반가운 일이라고 믿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지금 조선희, 목나정, 신선혜, 안상미, 김선혜 등의 이름들이 활동하고 있고, 스튜디오마다 여성 어시스턴트들도 많아요. 또 사진과에 강의를 나가봐도 여자 학생들이 아주 많더라고요. 그거 보면 기분 좋아요. 더 많아져야겠지만요. 물론 그들 중 얼마나 진짜 사진가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생각하면 얘기가 달라지긴 해요.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해요. 저는 제가 여자인 게 좋거든요. 패션 사진가로 살아남는 일이 어렵긴 하지만, 분명히 그런 제한 속에서 무언가를 성취했을 때 성취감도 더 클 거라고 믿어요.

현실을 비난하고 푸념하기보다 계속 용기를 북돋우려 애쓰시는 것처럼 보여요. 
그게 낫잖아요. 그래도 힘들어요.(웃음) 힘든 건 힘든 거니까요. 그렇다고 육체적으로 버티지 못하고 뭐 그럴 정도는 아니에요. <얼루어>의 하우스 스튜디오 여성 사진가인 차혜경 실장도 씩씩하게 잘하잖아요.

사진가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은 뭘까요? 
나도 몰라요.(웃음) 알면 좀 가르쳐줘봐요.

언젠가 구본창 선생님은 같은 질문에 성실함이라고 답하셨어요. 
저는 자유로움이라고 생각해요. 비록 저는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지만요.

정말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하셨나요? 
48년 동안 제가 살아온 시간이 그래요. 그 시간이 쌓인 게 강혜원이잖아요. 남들처럼 학교 다니고, 공부하고, 결혼하고, 애 낳고, 일하고 그렇게 살았는걸요. 제가 유일하게 감동하는 사진이 뭔 줄 알아요?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의 사진을 봤을 때예요. 딱 보면 달라요. 그건 그 사람이 사진을 얼마나 잘 찍는지, 얼마나 많은 사진집을 보면서 공부했는지 그런 거랑 아무 상관없어요. 자유로움을 노력하고 흉내 내고 공부한다고 될까? 아닐걸요. 그래서 저는 예술가는 되지 못했어요. 그래도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