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싸’가 되기를 강요하는 시대. 내성적인 성격은 정말 고쳐야 할 단점일까? 타고난 성향을 자신의 강점으로 바꾸는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지금 당장 ‘사회성 버튼’을 켜라!

 

0716-264-1

어느 내향인의 고백

어느 날 친구에게 “난 너무 내성적이야”라고 툴툴거렸더니,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나는 내가 내성적인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열변을 토했다. 지금 써 내려가는 이 글을 내 지인들이 읽는다면 그들 역시 같은 반응을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내향인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나는 내가 혼자 무인도에 떨어져도 넷플릭스만 있으면 평생 잘 살아갈 인간이라 자부한다. 좋아하는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도 충분히 즐겁지만, 나는 여전히 혼자 있을 때 최상의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다.

문제는 사회 생활을 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에디터’라는 직업을 가지면서부터는 혼자 할 수 있는 일들이 현저히 줄었고, 자연스레 외향인이 됐다. 아니, 외향적인 ‘척’했다. 가고 싶지 않은 자리에도 억지로 참가하고, 밝고 활달한 사람처럼 보이려 애썼다. 지나온 시간과 경험이 쌓여 익숙해질 법도 한데, 이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는 내게 해소되지 않는 숙제로 쌓였다. 집에 들어가면 곧잘 입을 닫고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지은 동굴도 소용이 없었다. 원치 않아도 세상의 ‘와이파이’와 항상 연결되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스트레스가 커지면 커질수록 외향적인 성격을 타고난 사람들이 부러웠다. 사실 일이라는 게 타인과 잘 어울리는 데 따른 대가인 경우가 많지 않은가. 아무리 내가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성향이라 할지라도 먹고살기 위해서는 집단 생활을 해야 하며, 사람들과 관계 속에 살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내성적인 에디터인 나는 열등한 인간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당연히 아니다.

내성적이어도 괜찮아

이 문제의 실마리는 ‘내성적’이라는 성격의 재정의에서부터 시작한다. 내성적이라는 건 말도 잘 못하고 소심한 성격을 가진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내성적인 사람입니다>의 저자 남인숙은 사람이 가진 내외향적인 성향이란 자신을 바깥으로 표현하고 못하고로 나뉘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내향인은 물리적, 감정적으로 예민하다. 그래서 바깥세상의 사소한 변수조차 자극이 되고, 잠깐의 외출, 가벼운 상호작용만으로도 피곤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이들보다 많은 충전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사회는 인간의 성향을 ‘인싸’와 ‘아싸’로 나누고 외향인을 기본값으로 설정하며 그렇지 않은 사람을 ‘비사회적’인 인간으로 분류한다. 모든 사람이 외향인이어야 한다는 것은 강압적이며 폭력적으로 느껴질 뿐이다.

돌이켜보면 ‘인싸’가 되길 강요하는 분위기는 어린 시절부터 있었다. 말이 없고 소극적인 행동을 보이는 아이는 ‘웅변학원’으로 끌려가곤 했다. 이 논리는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는 순간에도 드러난다.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을 강조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고쳐야 할 단점이나 부정적인 콤플렉스로 여기고 숨긴다. 이에 대해 남인숙 작가는 “내향성은 그저 담백하게 분류한 성향의 하나일 뿐, 외향성처럼 타고난 대로 살아도 괜찮습니다. 타고난 성향은 고칠 수가 없어요. 대신 내향인이기 때문에 일굴 수 있는 내밀한 행복에 주목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일본의 심리학자 나이토 요시히토도 이 생각에 동의한다. ‘내향적인 성격을 고쳐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단호히 아무것도 바꿀 필요가 없다고 답한다. “내향적인 성격의 관점을 조금만 바꾸면 오히려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어요. 내향적인 인간은 작은 변화와 미묘한 분위기 변화에 민감하죠. 그래서 상대방의 기분을 잘 알아차려요. 섬세하고 감정이입을 잘하며, 공감과 경청을 하죠. 활달하고 재미있어서 그룹에서 주목받는 사람은 아니지만, 겸손해서 호감을 사는 경우가 많고요.” 이렇게 관점을 조금만 달리하면 단점이 장점이 된다. 절대적이고 권위적인 리더가 팀을 이끄는 시대가 아닌, 개개인의 개성과 능력을 존중하고 조화를 생각하는 시대에 내성적인 성향은 오히려 도움이 될 때가 많다.

사회성 버튼을 켜라

이제는 바깥세상에서 능숙한 사회인으로 살아남기 위한 숙제만이 남았다. 내향인의 장점은 살리면서 대외적인 관계를 스트레스로 치환하지 않기 위한 핵심은 ‘사회성 버튼’에 있다. 이렇게 생각을 달리해보자. 외향적인 척하며 나와 맞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한다, 본성이 아닌 거짓을 연기한다는 생각으로 괴로워하지 말고, 이제는 외향적으로 구는 자신의 모습도 자신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내향인에게는 ‘인싸’와 ‘아싸’를 오고 가는 두 가지의 옵션이 주어진다. 필요할 때 ‘사회성 버튼’을 켜서 내 안의 다른 자아를 앞세워 선택적이고 주도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구스타프 칼 융이 말한 ‘페르소나’와 비슷하다. ‘가면’이라는 단어 뜻을 그대로 받아들여 ‘거짓’과 연결 짓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그는 페르소나를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다. 상황에 따라 다르게 쓰는 페르소나 모두는 우리 자아 중 하나일 뿐이다. ‘사회성 버튼’을 켠 내 모습도 나라고 생각하고, 자신을 규정하는 의미 있는 사건들이 모두 사회성 버튼을 켰을 때 일어났었다는 사실을 되뇌어보라. 다만, 사회성 버튼을 켠 상태에서도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다. 내 본성 안에서 최대한 적극적이려고 노력한다는 정도로 받아들이자. 그 정도로도 충분하다.

TIP 직장에서 ‘사회성 버튼’을 누르는 법

1 ‘기계적’으로 켜라
사적인 관계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할 대외적인 관계가 숙제처럼 느껴질 때는 사회성 버튼을 ‘기계적으로’ 켤 것. 이렇게 생각하면 적어도 관계를 억지로 이어나가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연민을 느끼지는 않을 테니까.

2 열심히 일한 자, 충전하라
내향인의 스트레스는 쉬면서 충전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뭔가 특정한 방법으로 해소하는 것도 어느 정도 충전이 된 이후부터 가능하다. 그러니 평소 가족이나 동료 등 주변 사람들에게 나는 특정 시간 동안 쉬어야 하는 사람임을 인지시킬 것. 스트레스가 더 큰 분노로 바뀌기 전에 말이다.

3 웃는 게 반이다
내향인이 대화에 잘 끼어들지 못하는 것은 그 집단에서 주류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민한 내향인들은 좋은 반응이 보장되지 않는 집단에서는 쉽게 말을 하기 꺼려한다. 회식 자리나 동료들의 대화에 끼어들기가 어려워 곧잘 “왜 이렇게 말이 없어?”라는 말을 듣고 있다면, 열심히 웃으면서 대답만 잘 해도 ‘적응 못하는 조직원’ 딱지는 피할 수 있을 것이다.

4 경청과 질문은 미팅의 치트키
비즈니스 미팅에서는 말을 기술적으로 잘하고 많이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크다. 하지만 의외로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좋은 대화가 된다. 침묵이 계속 이어지면 간단한 질문을 던져볼 것. 단, 단답식이 아니라 상대의 관심사에 따라 여러 담론이 나올 수 있을 만한 것으로 골라라. 경청과 리액션만 잘해도 충분하다.

5 얕은 관계도 인정하라
‘사회성 버튼’을 켠 채 만든 인간 관계가 내향인에게는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 있다. 관계에 대해 수렴적으로 생각하기 마련인 사람일수록 일부러라도 이런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친밀한 사람들과만 지내는 삶은 좁고 불안정하다. 그러면 그 관계에 집착하게 되고 그 안에서의 상호관계에 점점 예민해진다. 오히려 얕은 관계에서 좋은 영향을 받을 수도 있으며, 새로운 기회나 영감도 얕은 관계에서 얻어질 때가 많다는 걸 명심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