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가 서점가를 점령한 듯하지만 소설은 여전히 문학의 닻이다. 최근 1년간 출간된 소설 중, 쿵! 하고 마음을 두드린 그 소설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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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 은모든

최근 관심사 중 하나가 ‘안락사’이다. 은모든 작가의 <안락>은 한 할머니가 스스로 자신의 삶을 마감할 때를 정해두고 주변을 정리하는 과정, 그리고 가족과의 관계를 그린 소설이다. 길지 않은 작품이고 그런 상황을 겪어본 적이 없지만 소설 속 상황에 감정을 이입하며 읽었다. 죽음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준비해가는 사람의 표정이 어떨까… 사람 사는 이야기를 좋아하는데 읽는 내내 나의 할머니의 얼굴이 무척 보고 싶었다. 개인적인 경험과 겹치면서 여운이 오래 남았다. – 이영진(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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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모든 사람에게는 단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이는 단 하나의 사랑만이 남는다는 낭만적인 비유가 아니라 어떤 사랑이든 오로지 하나의 이야기로만 기록될 수 있다는 잔혹한 현실에 가깝다. 모든 이야기의 엔딩은 결국 책의 첫 페이지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사랑을 더 하고 더 괴로워하겠는가, 아니면 사랑을 덜 하고 덜 괴로워하겠는가?’ – 정지원(프리랜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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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맨션> 조남주

‘타운’에 진입하지 못한 이들이 모인 장소 ‘사하맨션’. 언뜻 SF적인 세계관이지만 단단히 잘못된 세상, 고장 나기 일보직전인 등장인물들을 비추는 문장에서 지금의 우리를 자꾸만 상기하게 되는 건 왜일까? 전작 <82년생 김지영>으로 본인 표현대로 ‛본의 아니게 페미니즘 열풍의 주역’이 되어버린 조남주 작가는 세상이 분명히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하고 있다는 것을, 그 변화에 소설 또한 일조할 수 있음을 믿는다. 무기력과 비관이 팽배한 시대. 혹시 나도 조금 더 세상이 나아지는 데 힘을 보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 소설이다.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된 여성 등장인물들을 하나하나 살피는 것도 즐겁다. – 이마루(<엘르> 피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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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개의 산> 파울로 코녜티

소년들의 아름다운 성장소설이면서, 아버지와의 화해를 담은 감동 가득한 가족소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주하는 산 자체, 자연을 경외하는 소설가의 문장이 몹시 근사하다. 조금 딴 이야기로 흘러가지만, <여덟 개의 산> 덕분에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TV프로그램이 전 세대에 걸쳐 인기 있는 이유를 비로소 납득했다고 할까. – 장선정(비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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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권여선

이야기 중간에 독하게 품어졌다 부옇게 사라진 ‘복수’라는 단어를 곱씹는다. 찰나처럼 스쳐갔던 울분들을 떠올린다. 삶은 두렵고 어렵다. 마흔이 된 나는 십대와 이삼십대 때 가졌던 불안과 지금의 불안이 과연 다른 것인지 궁금하다. 여전히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지 못한다. 권여선 소설 <레몬>은 다시 한번 삶에 대한 두려움과 삶의 고통을 한눈에 그려낸다. 그러나 누가 더 치명적인지 모를 각자의 슬픔 앞에서, 나를 위한 작가의 조용한 기도를 듣는다. 오늘도 ‘평범하게 평화롭게 평온하게’. -이정미(아르테 문학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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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쓰치의 첫사랑 낙원> 린이한

가슴에 상흔으로 남겨진 소설이 있다면,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이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믿을 수 없고, 또한 정면으로 바라볼 수도 없었던 소녀는 자신을 사랑한다는 선생의 말을 믿기로 한다. “선생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몇 번씩 되뇌지만 삶과 영혼은 점점 닳아간다. 문득문득 팡쓰치를 떠올린다. 지난 주말 <그것이 알고 싶다>에 ‘영광 여고생 사건’이 다뤄졌을 때에도 나는 다시 팡쓰치를 떠올렸다. 정도가 다를 뿐, 여성으로 태어났다면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다양한 성폭력에 노출된다. 그것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데 우리 모두는 너무 오래 걸렸다. 죽은 작가가 남긴 비명 같은 소설. 소설이 아닌 소설이다. – 허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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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 앤드루 숀 그리어

이제 곧 쉰 살을 눈앞에 둔 레스(less)는 소설가다. 데뷔작은 그럭저럭 성공했지만 두 번째 작품은 그것보다 덜(less) 성공했고 세 번째 작품은 두 번째 작품보다 더 덜(less) 성공했으며 네 번째 작품은 출판사로부터 반려됐다. 불행은 계속된다. 헤어진 남자친구 -아, 레스는 게이다- 가 결혼식 초대장을 보내온 것이다. 레스의 인생은 점점 더 줄어(less)들기만 한다. ‘퓰리처상 역사상 가장 과감한 선택’은 늙어가는 인간을 위해 바쳐졌다. 잃어버리지 않으려 발버둥쳐도 자꾸만 빼앗아가는 인생 앞에서 레스는 종종 굴욕을 느끼지만, 레스의 굴욕은 오히려 독자들을 해방시킨다. – 박혜진(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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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보는 자들의 밤> 빅터 라발

스티븐 킹은 여전히 건재하다. ‘넥스트 스티븐 킹’이라 자처하는 작가들은 그동안 수없이 등장했지만 위대한 일인자인 킹에 근접한 이는 없었다. 그런데 어쩌면, 그 진정한 후계자를 드디어 찾은 것 같다. 2018년 영미권 환상문학상과 호러문학상을 휩쓴 빅터 라발의 <엿보는 자들의 밤>은 평범한 일상 너머에서 악의적으로 꿈틀거리는 신화와 전설을 거장의 솜씨로 그려낸다. 구전 설화라고만 생각했던, 21세기와는 아무런 관련 없다고 생각했던 믿음의 체계가 가정 폭력과 유괴, 납치, 살인 등의 현실적인 범죄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출몰한다. 인종차별과 여성혐오라는 급박한 의제는, 사회적 약자들의 처절한 외침으로만이 아니라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공포로 그려진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절대로, 절대로 SNS에 자신의 개인 정보와 가족의 얼굴이 노출되는 사진을 올릴 수 없게 된다. – 김용언(<미스테리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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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축

역자는 소설에 나오는 다른 고유명사들과는 달리 ‘라파우’를 ‘태고(太古)’라는 말로 옮겨 밀어붙인다. 태고나 라파우나 폴란드에 그런 마을은 없다. 시간과 공간이 중첩되는 환상적인 장소, 거기에서 인간은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버티고 살고 죽는다. 절찬리 방영 중인 <아스달>이 떠오르는데, 그 둘의 공통점은 연원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이고, 다른 점은 연원에서 뻗어나가는 진실의 방향이다. 태고의 이야기 줄기는 인간의 삶과 역사에 닿는다. 나는 아무래도 후자를 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서효인(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