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생강 몇 알, 감자 몇 개를 담기 위해 마트 매대 아래에서 무심코 뜯은 속비닐이 플라스틱 쓰레기 대란을 가속시키고 있다. 이 쓰레기 전쟁 통에서 지구와 우리를 구원할 ‘프로듀스 백’의 세계를 소개한다.

 

0629-146-1

1 인도에서 공수한 100% 유기농 면으로 만든 리유즈 백 네트 면 그물 주머니. 상표, 끈, 시접처리 바이어스테이프도 모두 면 소재다. 표백, 염색, 인쇄 등 화학 처리를 하지 않아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다. 5천2백원, 레스 플라스틱 컴퍼니. 2 곡물, 과일 등 무게감 있는 농산물을 살 때 사용하기 좋은 광목 프로듀스 백. 8천원, 더 피커. 3 소스나 커피 등 액체류를 구매할 때 사용하는 다회용 보틀. 고무패킹, 스테인리스 고리로 마감된 뚜껑으로 내용물이 새지 않는다. 3천원대 보르미올리. 4 용설란과 선인장에서 추출한 섬유와 면으로 만든 100% 식물성 소재, 사이살 코튼으로 만든 100% 생분해 비누 주머니. 비누를 필요한 만큼 잘라 구매할 때 유용하다. 거품을 풍성하게 내는 데 도움을 주며 피부 각질 제거도 가능하다. 5천5백원, 더 피커. 5 강화도 소창 생지 보자기. 천과 실 모두 무형광 비표백 처리한 후 3번 삶아 만들었다. 일회용 비닐랩, 봉지 대신 채소, 빵, 과일 등을 싸서 보관하는 주머니, 발포 플라스틱 포장재 대체품으로 활용하기 좋다. 2천1백원, 레스 플라스틱 컴퍼니. 6 파머스마켓에서 장이나 청, 잼 등을 구매할 때 요긴한 다회용 유리병. 5천원대, 볼메이슨. 7 가방 한쪽에 넣어 다니다가 장바구니, 프로듀스 백 등 필요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할 수있는 토트 스트링 에코백. 최대 18kg의 물건을 넉넉히 담을 수 있다. 1만3천원, 더 피커.

 

 속비닐과 지구의 미래

치앙마이에서 살 때의 일이다. 매주 일요일에 열리는 파머스 마켓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일주일 치 식재료를 사고, 아침 겸 점심이 될 만한 식사를 마친 후 단골 커피트럭 앞 파라솔 아래 앉았다. 한 여성이 천 가방 안에서 스테인리스 통을 꺼내 커피트럭 주인에게 건네는 모습이 시야에 들었다. ‘아는 사이인가? 어제 만든 반찬을 주고받나?’ 커피 총각이 되돌려준 스테인리스 용기 안엔 스콘과 케이크 같은 게 들어 있었다. 커피도 챙겨온 보온 물병에 담아간다. 슬쩍 엿본 장바구니엔 뭔가로 가득 채워진 면 주머니와 종이봉투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 안에 플라스틱 비닐봉지는 없었다. 환경단체의 공익 광고에나 등장할 법한 이 멋진 ‘에코 라이프’를 예상치 못한 장소, 비닐봉지와 1회용 플라스틱 용기의 천국인 태국에서 목격한 그때가 내 장보기의 전환점이다. 그날 이후 나는 속비닐 사용에도 가책을 느껴야 마땅한 지구인의 의무를 (조금) 갖게 됐다.

그 바람직한 장바구니에 들어 있던 면 주머니의 이름은 ‘리유저블 프로듀스 백(Reuseable Produce Bag)’이다. 줄여서 ‘리유저블 백’ 혹은 ‘프로듀스 백’이라고 부른다. 온라인 백과사전에선 “재사용 가능한 농산물 가방. 그물이나 무명 소재로 만들며 내구성이 뛰어나고 세탁하기 쉽다. 주로 식료품점의 농산물 코너에서 채소나 과일을 넣을 때 사용한다”라고 정의한다. 구글에서 영어로 검색하면 수많은 디자인의 프로듀스 백이 사용법, DIY로 만들기 등의 정보와 함께 뜬다. 반면 국내 포털 사이트에선 광야의 풀 포기처럼 듬성듬성 발견될 뿐. 프로듀스 백 문화의 확산은커녕, 이런 주머니가 왜 있는지, 어떻게 쓰는지조차 모르는 이들이 많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채소나 과일은 이미 소분한 후 포장해서 파는데, 번거롭게 그게 왜 필요하지?’라는 의구심이 들 수 있다. 나 역시 감자 세 알, 당근 한 개 따위를 각각 비닐봉지에 담으며 ‘장바구니 꼬박꼬박 들고 다니는데 속비닐쯤이야’ 했다. 그런 타협이 이런 수치를 낳았다. 220억 장. 한 해 동안 한국에서 사용된 비닐봉지 총 개수다(2017년 기준). 1인당 사용량도 420장에 달한다. 핀란드 사람이 1년에 사용하는 비닐봉지 개수는 단 4장에 불과하다.

플라스틱은 그린피스와 미국 엑세터 대학 플리머스 해양 연구소의 연구팀이 발견한 800여 종의 미세 플라스틱을 뱃속에 품은 거북의 목숨만 위협하는 물질이 아니다. 최근의 플라스틱 쓰레기 대란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별 생각 없이쓰는 이 비닐봉투가 머지않아 인류의 삶을 겁박할 수도 있다.

 

알아두면 쓸모 있는 프로듀스 백의 세계

속비닐을 쓰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장비’에 대해 알 차례. 프로듀스 백의 종류는 생각보다 다양하다. 들어가는 내용물마다 특징, 보관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가장 많이 쓰는 건 그물 소재다. 첫째, 숭덩숭덩 뚫린 구멍 사이로 내용물이 잘 보여서, 둘째, 가볍고 신축성이 좋아서, 셋째 통풍이 잘돼 보관이 용이해서. 감자, 양파, 고구마 같은 뿌리 채소를 담으면 따로 옮길 필요 없이 그 상태 그대로 쟁일 수 있다. 튼튼한 광목은 무게가 있는 채소나 과일, 콩이나 귀리 같은 곡물을 사러 갈 때 유용하다. 호주의 환경 전문 블로거 린제이 마일스는 광목 주머니는 안의 내용물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손님이 많은 대형 마트, 상점이 분주한 시간대를 피해 사용하는 것이 요령이라고 귀띔한다. 천이 다른 소재에 비해 좀 더 무게가 있으므로, 저울 계량 시 빈 광목 주머니를 올린 상태에서 영점 조정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소창은 성글게 짜인 평직 면직물로, 위생적인 보관이 필요한 식품을 주로 넣는다. 빵집에서 바게트나 치아바타, 사워도우 같은 식사 대용 빵을 즐겨 사는 편이라면 소창이 비닐봉지를 대신해줄 것이다. 그 밖에 액체류, 가루 등을 담기 좋은 유리병, 반찬통이나 도시락통으로 사용하는 다회용 용기도 ‘비닐봉지 없이 장보기’를 돕는 요긴한 도구다.

이 모든 ‘주머니’가 가져야 할 공통의 미덕이 있다. 오염되면 쉽게 빨 수 있는 소재인가? 삶을 수 있나? 가격표를 쉽게 붙이고 뗄 수 있는가? 린제이 마일스는 여기에 ‘좀 더 환경 친화적인’ 선택을 돕는 고려 사항을 덧붙인다. 재사용한 천으로 만든 제품인지, 혹은 재사용이 가능한 소재인지 확인할 것. 만약 구매할 계획이라면 탄소 발자국을 최소화하기 위해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주문할 것, 폐페트 같은 쓰레기를 재활용해 만든 제품을 살 것. 가장 좋은 건 당신의 집에 있는 안 쓰는 커튼 천을 잘라 크기와 용도에 맞는 주머니를 직접 만드는 일이다.

 

실천으로 가는 멀고 험한 길

속비닐을 안 쓰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비닐뿐 아니라 박스, 테이프, 스티로폼, 충전재, 아이스팩 같은 어마어마한 잔여물을 남기는 온라인 장보기를 끊는 일이었다. 속비닐을 자꾸 의식하다 보니 과잉 사용이 눈에 거슬렸다. 왜 물티슈나 세제 같은 공산품을 굳이 비닐에 담아 중복 포장할까? 아보카도와 두부를 따로 담는 이유는? 국내 최대 대형 마트가 단순히 제품을 분류할 목적으로 사용한 속비닐은 매회 2~4장이 넘었다. 그 안에 있는 내용물도 이미 1회용 비닐, 플라스틱 박스로 포장된 제품이라는 게 더 큰 문제다.

그물과 소창 소재의 프로듀스 백을 챙겨 동네 마트로 갔다. 애호박과 파, 바나나, 아보카도, 시금치, 피망 등을 살 계획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프로듀스 백을 꺼낼 일이 없었다. 공판장, 슈퍼마켓으로 통하는 동네 마트에선 이미 비닐봉지, 스티로폼 용기, 비닐랩으로 꽁꽁 동여맨 완제품만 쌓여 있다. 가져간 게 아까워서 한쪽에 날것으로 쌓인 고구마 일곱 개를 충동구매(?)했다. 무게 계량을 돕는 점원에게 가져가 내용물을 꺼내어 저울에 달아달라고 말했다. 그와 동시에 ‘아주머니’의 눈빛에서 강력한 저항과 짜증을 읽었다고 말한다면, 과장처럼 보일까? 단언컨대, 내가 그분의 딸이었다면 등짝 한 대 세차게 후려 맞았을 것이다.

‘일회용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는 제품만 기획 판매합니다’를 모토로 리유즈 백, 리유즈 스트로 등을 선보이는 제로 웨이스트 브랜드 ‘레스 플라스틱 컴퍼니(lessplastic.modoo.at)’의 강신혜 대표는 대부분의 소매점이 리유저블 백의 불모지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경험상 사용하기 가장 어려운 곳은 동네 중형 마트였다. 대형 마트나 백화점 지하 슈퍼의 점원들은 고객 응대 교육이 잘되어 있어 어떻게든 손님의 요구에 맞추려고 한다. 점원이 도와주려고 해도 저울이 0점 설정이 안 되게 고정된 곳도 있다. 이사하면서 동네 마트와 시장, 과일과 채소 가게, 유기농 전문점을 다 돌아다니며 체크했는데, 두레 생협, 한살림, 초록마을 같은 유기농 전문점에서 ‘리유즈 백’을 쓰기가 가장 어려웠다. 이중, 삼중 포장이 심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이 중형 마트, 세 번째가 대형 마트였다. 반면 동네의 소규모 식료품점, 재래 시장에선 리유즈 백 사용이 쉽다. 상인에게 칭찬을 받기도 하고, 덤으로 더 얻을 때도 있었다.”

제로 웨이스트 상점과 문화를 국내에 최초로 도입한 업사이클링 소셜 벤처 ‘더 피커’의 홍지선 대표는 제도의 한계를 짚는다. “소비 편의성을 우선하는 문화, 과도한 위생 관념, 제로 웨이스트 문화가 뿌리내리기 힘든 위생법 등을 꼽고 싶다. 간편한 결제 시스템, 속도와 편의 중심의 배송 시스템 앞에서 프로듀스 백, 다회용 용기 등을 챙겨 원하는 분량만큼만 사는 소비 행위는 매우 번거로운 일로 비춰지는 게 사실이다. ‘밀봉된 포장’이 위생적으로 검증된 제품이라는 인식도 한몫한다. 포장된 제품을 벗겨서 판매할 수 없는 국내의 식품 위생법은 포장재 없는 구매 방식이 확장될 수 없는 결정적 요인이다.”

프로듀스 백은 낭만적 살림 사진을 위한 소품도, 더 이상 쓰면 좋지만 안 써도 큰 문제는 없는 선택지도 아니다. ‘쓰레기 쇼크’로 불리는 플라스틱 폐기물 대란으로 모두의 코앞에 닥친 의무가 됐다. 실제로 유럽연합에 속한 28개국은 2019년까지 국민당 연간 일회용 비닐봉지 사용량을 90개, 2025년엔 40개로 감축하는 것을 목표로 사용을 제한하는 데 동의했다. 우리나라는 2019년 1월부터 대형 마트, 면적이 165제곱미터가 넘는 슈퍼마켓에서 비닐봉지 사용을 전면 금지했지만, 생선과 고기 등 수분이 있는 제품을 위한 속비닐 사용은 법으로 규제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단계적 시행을 위한 일시적 허용일 뿐. 당신의 장바구니 안에 ‘면 주머니’와 ‘통’을 넣어 다녀야 하는 시대가 머지않았다.

 


당신의 ‘프로듀스 백’을 환영하는 장소들

1 더 피커(thepicker.net)
국내 최초로 문을 연 플라스틱 제로, 제로 웨이스트 상점. 환경에 유해한 소재를 배제한 친환경 식품 리빙 용품, 다회용 가방과 주머니, 용기 등을 판매한다. 지금은 온라인에서만 구매 가능하며, 올해 9월 성수동에 새 보금자리를 연다.

2 마르쉐(www.marcheat.net) 
프로듀스 백이 가장 환영받는 시장이다. 장바구니와 개인 식기, 텀블러, 프로듀스 백을 갖추고 구입하는 사람에게 상추 한 포기, 들꽃 한 다발, 5백원 할인 등의 풍요로운 혜택을 제공한다. 프로듀스 백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가장 많이 만날 수 있는 장소이기도.

3 망원 시장 알맹(@almang_market)
시장 내 20개 상점이 함께하는 프로젝트. 지정된 상점이나 카페, 장바구니로 쓸 수 있는 천 가방을 빌려준다. 알맹에서 주최하는 ‘노플라스틱 캠페인 이벤트’에 참가하면 비닐봉지를 사지 않고 물건을 구매한 이들에게 과일, 채소 등을 선물한다.

4 채우장(@Chaewoojang)
제로 웨이스트를 지향하는 보틀 팩토리에서 주최하는 100% 일회용 비닐봉지와 플라스틱 없이 장을 볼 수 있는 곳. 채소, 과일, 곡물, 원두뿐 아니라 세제, 치약 등도 덜어서 살 수 있다. 한 달에 한 번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