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는 만큼 내겐 ‘공감 피로’가 쌓인다. 강요당한 감정으로부터 나를 지키고, 남과의 관계도 잘 지킬 수는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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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쓰레기를 던지는 사람 VS 받는 사람

마구 화를 분출하거나 거친 욕설을 내뱉는 것만이 공격은 아니다. 오히려 일상 관계 안에서의 피곤함은 소리 없이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상대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취급하는 일도 이에 해당된다. 골치 아픈 감정을 껴안고 있기 버거워 털어놓을 사람이 필요할 때, 그 감정을 받아내는 역할을 언제부터인가 ‘감정 쓰레기통’이라고 부른다. “친구가 자꾸 남자친구에 대한 불만과 상처받은 내용을 이야기해요. 헤어질 건 아니면서요. 처음에는 순순히 들어줬는데 빈도가 잦아지니 힘들어요.” “통화하는 내내 동료 욕을 해서 듣고 있으면 진이 빠져요.” 평소 이런 말을 해본 적이 있다면 ‘감정받이’ 역할을 해봤다는 증거다. 주위를 둘러보자. 친구, 연인, 가족, 동료나 상사 중 일방적으로 감정 쓰레기를 던지는 사람이 한두 명씩 꼭 있을 거다. 이들은 자기 중심적인 성향이 강하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먼저고, 그 상황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긴다. 좋게 말하면 자신의 스트레스를 잘 배출하는 사람들이다. 반대로 거절을 잘 못하고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지인의 쓰레기통이 되기 쉽다. 이들은 ‘나’보다 ‘남’에게 예민하게 반응한다. 도리, 의무 등 도덕적인 잣대를 자신에게 엄격히 들이대고, 좋은 사람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자기 필요나 욕구에 대해서는 둔감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 말은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하다는 뜻도 된다.

 

나도 혹시 감정 쓰레기통?

‘감정받이’ 역할을 자청하고 있는 게 아닌지 걱정된다면, 상대와 만난 후 자신의 에너지 레벨을 체크해보자. 한두 번은 피로 탓으로 돌릴 수 있다. 하지만 집에 도착했을 때 ‘피곤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거나, 심하게 소모되는 느낌, 쉽게 말해 ‘우울이 전염된 것 같다’, ‘정작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전혀 못했다’는 느낌이 자주 반복된다면 감정받이 역할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축구 경기에서 볼 점유율을 보듯 상대와 나의 대화 점유율도 따져볼 것. 상대가 편파적인 점유율을 가져간다면? 그런데 듣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게 아닌, 하고 싶은 말을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문제가 있는 거다.
그렇다면 어쩌다 감정 쓰레기통이 되었을까? 이에 대한 답을 찾고 싶다면 먼저 ‘나는 왜 상대와의 관계를 유지하는가’에 대해 자문해보라. 성유미 광화문 연세필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은 감정을 쏟아내는 사람과의 관계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한 최우선 조건은 바로 ‘자신의 욕구 해결’이라고 말한다. “내 마음속을 먼저 들여다봐야 해요. 상대의 감정을 들어줘야만 하는 욕구가 자리하고 있는 건 아닌지, 어떤 심리적 이득이 있기 때문에 관계를 놓지 못하는 건 아닌지부터 파악해보는 거죠. 분명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내가 얻어가는 부분이 있을 거거든요. 무조건 ‘내가 당했다’, ‘피해자다’라는 식의 문제 접근은 오히려 관계를 망칠 수 있어요.” 누가 봐도 뒤틀린 관계임에도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그 안에 ‘나의 욕구’가 들어 있기 때문일 수 있다는 얘기다. 이를테면 직장에서 내가 승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상사가 나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대한다고 치자. 그런 상황에서는 인간적인 관계는 배제하고, 비즈니스식의 ‘필요’에 따른 접근을 해봐야 한다. 그럼 적어도 상처는 안 받을 수 있다. 위 예에서는 상사를 인간적으로 존경할 수 있는 부분과 일에서 배울 만한 점을 분리해 생각하는 것이 중요 포인트다.

 

감정 쓰레기통에서 벗어나기

상대의 행동에 대한 당신의 반응은 나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종로에서 뺨 맞고 와서 나에게 푼다면 굳이 싸울 것도 없지만 화를 뒤집어쓸 이유도 없다. 어쩔 수 없이 상대의 화를 받아주는 상황일지라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은 붙들고 있어야 한다. 본인 스스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 상대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화살을 받아내는 피해자 포지션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상대에게 단호하게 거절은 못하더라도 선을 긋는 정도는 해야 한다. 어떤 방어도 하지 않는다면 상대는 또 공감 에너지 충전을 위해 당신을 찾을 테니까.

 

TIP 1 너와 나의 손익 계산서 
종이 한 장과 펜을 들어라. 그 다음, 이 관계를 유지할 때 얻을 이익과 손실에 대해 적어라. 손실이 이익보다 눈에 띄게 크다면 오랜 관계에 변화를 일으킬 때가 된 거다. 이 계산이 끝나야 비로소 벗어날 용기라도 내볼 수 있다. 사람 사이에서 손익을 따지는 게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계산으로 최소한 안전거리는 확보할 수 있다.

TIP 2 상대의 영향력 최소화하기
상대를 인생의 심장부에서 멀리 떨어트려라. 이 방법은 타인과 갈등 상황에 부닥치는 것을 싫어하고 싸울 용기가 부족한 사람에게 적합하다. 새로운 모임이나 취미활동을 통해 평상시 ‘그 사람이 없어도 되는 시스템’을 만드는 데 주력하며 자신을 보호하자. 자주 연락하고 만난 이라면 점차 만나는 횟수를 줄여나가는 것도 방법이다. 기존 관계 안에 머물되 거리를 살짝 두어 그 관계가 주는 영향을 최소화하는 거다.

TIP 3 타임아웃 선언 
착취의 관계는 착취당하는 것을 멈출 때 제동이 걸린다. 아주 드물게 화자 쪽에서 멈추는 경우도 있지만 쓰레기를 비우는 쪽은 늘 비워내는 만족을 느끼기 때문에 스스로 멈추지 않는다. 화자가 감정을 쏟아내는 것을 그만둘 때까지 기다리기보다 청자가 스스로 듣기를 멈추는 것을 선택하는 것도 방법이다. 방전된 감정을 충전할 시간을 갖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