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길에서 소울 푸드를 만나는 일은 사람을 사귀는 것만큼 특별한 경험이다. 낯선 곳에서 우연히 만나, 인연을 맺은 저마다의 소울 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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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그 뢰스티 |

삶이 쪼그라들었던 2년 전의 일이다. 알프슈타인 산맥의 아찔한 거벽에 낀 에셔 산장 사진에 매료되어 홀로 스위스로 떠났다. 이세상 같지 않고 동떨어져 보이는 아펜첼의 산기슭에 서면 내가 인식하지 못한 세계와 마주하리라. 그런 심오한 마음으로 도착한 해발 1454미터의 수직 절벽은 거대한 자연 그대로였으며, 숭고한 두려움 같은 것이 몰려오기도 했다.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풍경이었다. 늦여름의 여행자들과 함께 야외 테라스에 나란히 앉아 아펜첼 지역 맥주와 치즈 뢰스티를 주문했다. 알프스 치즈를 곁들인 스위스식 감자부침이다. 간단한 음식이지만 에셔 산장 특식으로 여름 한철 평균 14톤의 감자를 소비할 만큼 인기가 좋다고 했다. 베이컨을 잔뜩 올려 내온 뢰스티에서 염소 치즈 특유의 고린내가 풍겼다. 진득하게 갈라지는 감자전을 한입 물자 겉이 바삭하게 부서지고, 갈아낸 감자 속이 입속에서 쫄깃하게 아삭거렸다. 양파 향이 조금 났고 맥주를 오지게 들이켰다. 옆자리에 앉은 독일에서 온 중년 부부와 말없이 미소를 나누며, 거대한 접시를 신속하고 깨끗하게 해치웠다.
아, 엄청난 맛이었다. 하이킹으로 배가 고픈 까닭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감자를 강판에 가는 일을 하며 이 외로운 산장에 머물러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도 그때 먹은 뢰스티가 자주 생각나지만, 요리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그토록 간절하게 보고 싶던 알프슈타인 협곡이 완성한 맛이니까 말이다. 아펜첼 염소 치즈를 구할 수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 신진주(여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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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스비와의 인연 |

고등학생 때 하와이로 유학 길에 올라 인생의 반이 넘는 시간을 하와이에서 보냈다. 지금은 하와이의 여러 여행 브랜드를 홍보하는 일을 하며 주기적으로 하와이를 찾는다. 그때마다 떠오르는 음식은 잘 지은 고슬한 밥을 직사각형으로 다듬고 구운 스팸을 얹어 김에 싸 먹는 스팸 무스비다. 참고로 하와이는 전 세계 스팸 소비국 1위에 빛나는 곳. 스팸 무스비를 주제로 한 축제도 있을 만큼 스팸을 각별히 여긴다. 처음에는 이런 사전 지식 없이, 그저 고향 음식이 그리워 선택한 메뉴였다. 흰 쌀밥이 그리웠으니까. 스팸만 들어간 플레인 무스비부터, 매콤한 스파이시 무스비, 덴푸라 무스비, 데리야키 무스비, 에그 무스비, 치킨 무스비… 무한 변신하는 주먹밥을 단돈 2천원에 즐길 수 있었다. 그야말로 나의 하와이 유학 시절의 동반자였달까. 요즘은 하와이에 가면 마나부스(Mana Bu’s)라는 무스비 전문점을 찾는다. 현지인이 인정하는 최고의 무스비가 있다. 화학 조미료를 넣지 않고, 흰 쌀, 잡곡, 현미, 프리미엄 일본 쌀, 세키한 오코와(영양식 찹쌀밥) 등 다양한 쌀밥의 홈메이드 무스비를 파는데, 쌀밥 본연의 맛에 눈뜨게 해줬다. 스팸 무스비는 스팸이 맛을 좌우한다고 생각했거늘. 질 좋은 쌀과 잘 지은 밥이 무스비의 맛을 좌우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혹 마나부스에 가게 된다면 ‘테리 스팸 라이트’를 맛보길. 왜 스팸보다 ‘밥맛’이 중요한지 알게 될 거다.

– 김나혜(아이커넥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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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꼼땀과 잡채밥 |

벌써 10년 전 일이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호주 서쪽의 퍼스로 향했다. 당연히 ‘워킹’은 뒷전이었고 ‘홀리데이’가 먼저였다. 어느 날 와이너리 투어가 출발하는 페리 선착장에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별 의심 없이 택시에서 내리고 보니 퍼스에서 지대가 가장 높은(아마도) 킹스 파크에 도착해 있는 게 아닌가. 당시에는 그곳이 어디인지 짐작도 못했지만, 페리 선착장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었다는 두려움과 나름 거금인 투어 비용을 날렸다는 생각에 속이 쓰렸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숙소에 닿자 한식이 간절하게 먹고 싶었다. 어떤 여행지에서도 한식이 생각난 적은 결코 없었다. 한데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해 어느 베트남 식당으로 들어갔다. 덮밥처럼 보이는 메뉴를 대충 골랐다. 이 궁여지책이 두고두고 그리운 음식이 됐다. 바로 ‘꼼땀’이다. 두들겨 얇게 편 양념 돼지고기를 그릴에 구워 밥 위에 올려주고, 돼지 껍데기와 살코기를 잘게 잘라 볶은 사이드, 각종 채소, 달걀찜과 달걀프라이까지 한가득 곁들여주는데, 잡채밥 비슷한 맛이 나는 게 아닌가. 새콤매콤한 새우 국물 요리 ‘깐 쭈아 똠’까지 곁들여 먹고 나니 하루의 고단함이 스르르 풀렸다. 다 먹고 일어설 때쯤 내 사정을 들은 투어 회사로부터 다음 날 새로운 투어에 합류하라는 메시지를 전해 들었다. 완벽한 해피 엔딩. 지난해 7년 만에 퍼스를 다시 찾았을 때도 가장 먼저 이곳을 찾아 똑같은 메뉴를, 운이 좋게도 똑같은 자리에 앉아 먹었다. 최대한 다양한 음식을 먹는 여행자의 법칙에서 벗어나 두 번이나!

– 장새별(<바앤다이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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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그 쌀국수 |

3년 전 5월, 미국 동부로 2주간의 여행을 갔을 때다. 슬프게도 음식이 입에 안 맞아 고생을 했다. 비상용으로 챙겨간 햇반과 고추참치로 끼니를 이어갔고, 먹는 즐거움이 사라진 2주간의 여행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정신적, 심리적 허기가 더해져 남들이 찬양하는 여행지의 매력도 덜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러던 중, 별 기대 없이 우연히 들어간 워싱턴 로슬린 역 근처의 베트남 쌀국수집 포75(Pho75)는 내 지친 몸과 마음을 완벽히 채워준 곳이었다. 이곳은 쌀국수 외에 다른 메뉴는 팔지 않는다. 월남쌈이나 샐러드조차 없다. 오로지 국물 있는 쌀국수만 내며 토핑이 차이 날 뿐이다.
국물을 한입 들이키자 진한 감동이 입속으로, 마음으로 밀려 들어왔다. 다른 음식은 그렇게 밀어내더니, 이 집의 쌀국수는 내 입에 자석처럼 달라붙었다. 이곳이 유명한 건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워싱턴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최고의 포 집으로 소문난 오랜 맛집이었다. 이후 다시 워싱턴DC를 방문할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싹 비운 감동의 한 그릇 때문에 미국 갈 기회가 생길 때마다 근처 쌀국수집을 찾아가는 취미가 생겼다.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고 싶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꼭 워싱턴 DC를 다시 방문해 포75의 진한 국물의 감동과 여운을 느끼고 싶다. 아, 참고로 여긴 ‘Cash Only’다.

– 김민혜(라스베이거스 관광청 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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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짜이의 향 |

영혼을 위한 여행은 아니었다. 깨달음을 위한 길도 아니었다. 단지 돈이 없을 뿐이었다. 그래서 인도에 갔다. 숙박비를 포함해 하루에 1만원 정도 되는 돈으로 생활했다. 그렇게 한 달을 인도에 있었다. 제대하고 복학하기 직전, 여름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인도 사람처럼 자고 먹었다. 그리고 인도에서 보낸 날만큼 짜이를 마셨다. 인도는 세계 1위 홍차 생산국이다. 하지만 인도 사람들은 수출하고 남은 싸구려 홍차를 마신다. 꽃을 닮은 향기 대신 떫고 텁텁한 맛만 남은 홍차에 카르다몸, 정향, 생강, 팔각과 같은 향신료와 우유 그리고 설탕을 넣어 달이듯 끓여낸 짜이는 인도 어디에나 있었다. 델리의 고급 레스토랑에서는 나비 더듬이 모양으로 콧수염을 기른 종업원이 영국제 찻잔에 짜이를 따라줬다. 공항에서는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종이컵에 한가득 짜이를 담아 팔았다. 그러나 길 위에서도, 티베트 고원지대를 가로지르는 카르둥라 하이웨이에서도, 혜초 선사가 <왕오천축국전>에 소개한 설산과 그 사이를 잇는 낭떠러지에서도 짜이를 팔았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처럼, 아무리 우려내도 사라지지 않는 향신료의 끈질긴 향을 몸에 품고 살았다. 진득한 단맛으로 힘을 내고 눈을 떴다. 악다귀처럼 달라붙는 걸인과 도둑고양이처럼 발걸음 소리가 없는 소매치기, 무표정한 눈동자로 나를 주시하는 수많은 사람들, 그 사이를 짜이의 향이 메웠다. 15년이 지난 지금 한국에서도 짜이를 구해 마실 수 있지만, 흙먼지와 빙하, 그 땅 사람들의 체취와 소리가 없는 이곳에서 짜이의 향은 동물원에 갇힌 사자처럼 울지 않고 달리지 않는다.

– 정동현(푸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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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햄버거로 채운 영혼 |

작년 말이다. 절친한 친구 두 명을 데리고 도쿄에 갔다. 둘은 첫 도쿄 여행이었다. 일본 여행에 일가견이 있는 나만 믿고 따라오는 거라 책임이 막중했다. 매 끼니 음식점을 고르는 일이 미션과도 같았다. 여행 마지막 날 밤. 친구들에게 마지막 만찬을 선물하기 위해 아자부주반의 고급 스키야키집을 방문했다. 그러나 만석. 다른 스키야키집을 다섯 곳이나 더 찾아갔다. 또 만석. 초조했다. 비장의 무기를 꺼내기로 하고 음식값보다 더 비싼 택시비를 내고 시부야로 달렸다. 도착한 곳은 시부야 뒷골목에 자리한 반지하의 햄버거 가게 우피골드버거. 우피골드버거는 외관은 허름하지만 시부야 힙스터들 사이에서는 꽤 오래전부터 알려진 수제버거집이다. 나 역시 일본인 친구 소개로 알게 됐다가 마음속에 저장한 곳이다. 열명 남짓 앉을 수 있는 바 좌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키친과 간격이 매우 가까워서 눈앞에서 패티를 굽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고급 스키야키집에서는 해볼 수 없는 경험이었다. 이곳은 가게 이름만큼이나 버거 이름이 개성 있다. 케빈베이컨 버거, 스티븐소다 버거, 샤를로트 갱스 버거 등. 나는 언제나처럼 기본 메뉴인 ‘우피골드버거’를 주문했다. 사이드는 프렌치프라이와 메시포테이토 중 고를 수 있는데, 내 선택은 무조건 메시포테이토다. 수제 패티, 2장의 치즈, 양상추, 토마토, 피클, 양파로 층을 쌓은 버거와 부드러운 메시포테이토의 궁합은 뜨끈한 국물 없이도 뱃속이 위로받는 느낌이다. 이날도 지친 친구들은 물론 안내하느라 진땀 뺀 내 영혼을 살뜰히 달래주었다.

– 장상민(헤이미스타타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