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나라는 여름만이 계속된다. 어떤 배우가 가진 연기에 대한 태도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영화 <만월>의 촬영을 마친 김희애를 방콕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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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재킷, 스커트는 구찌(Guc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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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롱 슬릿 베스트, 화이트 스커트는 3.1필립 림(3.1 Phillip Lim). 슈즈는 지안비토 로시(Gianvito Rossi). 귀고리는 이에르 로르(Hyeres Lor).

2년 전 하와이에서의 인터뷰를 다시 찾아봤어요. ‘우리 인연이 4박 5일짜리일 수도 있고, 계속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런데 4박 5일로 끝난다고 해도 나쁜 것은 아니다’라고 했었죠. 가끔 그 말이 떠오르곤 했어요. 
진심이에요. 길다고 좋은 인연은 아니라는 걸 많이 봤거든요. 긴 인연이 악연으로 끝나는 것만큼 안타까운 일도 없는 것 같아요.

다시 만나도 좋은 것이고, 다시 못 만난다고 해도 슬픈 것만은 아니라는 게, 피천득 시인의 수필 같은 이야기였어요. 많은 걸 겪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죠. 
그때 기자님이 잘 정리해서 써주신 것 아니에요? 하하하.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 건 참 특별한 일이죠. 작품을 같이한 사람들도 잘 못 만나요.

현장에서 뜨겁게 일하고 헤어지는 건가요? 
뜨겁게. 주로 뜨거운 역할을 많이 맡아서 뜨거운 게 좋아요. 난 뜨거웠는데, 저쪽은 밍숭맹숭하면 섭섭하죠. 나는 밍숭맹숭인데 상대가 뜨겁게 연기해주면 고맙고 부끄럽고요.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 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뜨겁게 해줘야지란 생각을 해요. 거의 다 뜨거웠던 것 같아요. 후회 없이 했다고 생각해요.

함께 연기하는 배우의 호흡은 얼마나 중요한가요?
잘하는 사람이랑 하면 소름이 끼치거든요. <아들과 딸> 할 때 정혜선 선생님이 그랬어요. 정말 아들만 생각하는 엄마의 얼굴인 거예요. 소름 돋은 게 시작이었어요. 저렇게 상대역을 해주어야 한다는 걸 그때 느꼈거든요. 내 것을 하기 바쁘니까 못했는데 내가 상대 배우를 위해 최선을 다하면 그게 결국 나를 위해서도 좋은 것이라는 것을 이제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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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과 스커트는 살바토레 페라가모(Salvatore Ferragamo). 버터플라이 날개 모티브 이어링, 버터플라이와 골드볼 참 네크리스, 버터플라이 모티브 테니스 브레이슬릿, 실버 버터플라이 참 뱅글 브레이슬릿, 버터플라이 레이어 링은 모두 판도라(Pand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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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워 프린트 드레스, 트렌치코트, 크리스털 버클 디테일 뮬, 트러플 컬러 블레이클리 백은 모두 마이클 마이클 코어스(Michael Michael Kors).

요즘은 유튜브로 옛 드라마를 볼 수 있어요. <폭풍의 계절>, <아들과 딸> 같은 유명한 드라마는 물론이지만, <산 넘어 저쪽> 같은 작품은 새로웠어요. 톰보이 역할로 쇼트 커트를 하고 나오더라고요. 당시 시대 분위기, 사고방식이 드라마에 고스란히 담겨 있더군요. 역사이자 기록이죠. 
정말 좋은 세상이야.(웃음) 그 당시에 그런 캐릭터가 거의 없었어요. 그 후에 더 생겨나고, 여자들도 쇼트 커트를 많이 했던 걸로 기억해요. 사실 요즘도 완전히 독립된 여성으로 살기 쉽지 않아요. 서울 같은 대도시의 일이지…. 저는 운이 좋아서 거의 다 주체적이고 멋있는 역할을 했던 것 같아요. 대리만족을 느끼면서 했죠. 배우의 최대 혜택을 누렸어요.

발산하는 캐릭터를 선호했나요? 
배우가 변신하는 것을 곧 도전으로 평가하잖아요. 강한 캐릭터를 맡으면 재미있죠. 그런데 한 역할을 하면 같은 역할만 계속 들어와요 ‘후남이(<아들과 딸>)’ 같은 걸 맡으면 계속 비슷한 역할만 들어오고, ‘화영(<내 남자의 여자>)’ 같은 센 캐릭터를 연기하면 계속 불륜, 팜므파탈 역할만 들어오고, <밀회>를 한 후에는 연하의 남자와 사랑하는 역할이 왔어요.

전작과 비슷한 역할이면 고사하는 편인가요?
아무래도 피하고 싶죠. 대중도 계속 같은 걸 보고 싶어 하지 않잖아요.

<허스토리>가 큰 도전이었다고 여러 번 말했지만 사실 매번이 도전 아니었나요? 
<허스토리>는 모든 것을 발가벗고, 신인처럼 올인한 작품이었어요. 잘해내겠다고 마음먹은 게 아니라 망신당하면 안 된다, 피해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만 했어요. 그냥 내가 없어졌으면 싶었어요. 사투리를 잘 쓰는 사람들도 연기자로서 뭔가 큰 걸 갖고 있는 것 같아 부러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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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은 막스마라(Max Mara). 무당벌레 & 클로버 이어링, 무당벌레 펜던트 네크리스, 로즈골드 하트 체인 네크리스, 클립참 장식 실버 체인 브레이슬릿, 클립참 장식 로즈골드 메시 밴드 브레이슬릿, 플라워 모티브 레이어 링은 모두 판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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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원숄더 드레이핑 디테일 드레스, 블랙 레더 러플 디테일 와이드 벨트, 블랙 시어 글러브는 모두 막스마라.

다음 작품은 어떤 기준으로 선택하실 건가요? 
그런 것 없어요. 하하하. 날 원하고 시나리오 재미있으면 ‘웬 떡이냐, 하겠습니다!’ 바로 그래요. 이렇게 말하면 겸손으로 봐주시더라고요, 진짜인데요. 최근 뉴욕 시티발레단의 수석 무용수였던 웬디 휠런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감동적으로 봤어요. 자꾸 캐스팅에서 제외되어 감독을 찾아갔더니 ‘나는 네가 자꾸 나빠지는 것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라는 거예요. 지금은 할 수 있지만 하면 할수록 보여질 텐데 그걸 보여주고 싶냐는 거예요. 나도 생각을 해봤죠. 배우로 나이 들었다고 어디 숨어 있거나, 끝까지 현역에서 당당하게 자기의 늙어가는 모습을 동시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멋있냐고 묻는다면 전 후자예요.

그렇게 할 생각인가요? 
작품이 저를 부른다면. 나는 기자님 같은 에디터, 배우, 매니저, 메이크업 아티스트, 스타일리스트들이 아주 오래 일했으면 좋겠어요. 오래 하는 사람을 귀하게 생각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얼마나 많은 경험과 능력이 필요해요? 기자님도 꼭 오래 일하세요. 흰 머리 나서도 많이 만나고 싶어요. 스타일리스트, 매니저들도요. 호기심에 잠깐 했다가 사라지지 말고. 그러려면 각 분야에서 경제적으로 안정도 되어야겠죠.

하하. 노력하겠습니다. 여전히 노력하는 게 있나요? 
모든 걸 노력하죠. 관리한다고 하지만 재미없거나 힘들다면 못했을 거예요. 하루하루 쌓이다 보니 한 달이 되고 일년이 되고 지나보니까 그게 저의 뷰티도 되었고, 건강 유지도 됐어요. 어떻게 보면 바보 같지만 잘 살아왔던 것 같아요. 가족도 중요하죠. 각자 열심히 인생 살다가 안위를 걱정해주고, 잘되길 빌고 저희는 그렇게 살거든요. 여기 와서도 한 번 통화했나? 애들 아빠도 저와 스타일이 비슷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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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니트 슬리브리스 원피스, 화이트 니트 벨티드 카디건, 화이트 스트랩 슈즈, 화이트 메탈볼 디테일 스퀘어 백은 모두 마이클 마이클 코어스.

여전히 좋은 연기, 좋은 작품에 대한 갈증이 있나요? 
배우들은 인기가 파워잖아요. 부러워요. 대외적으로 알려진 인기 있는 남자배우들은 시나리오를 0순위로 받을 수 있잖아요.

그렇다고 다 잘되는 것도 아닌걸요. 
물론 너무 고르다 보면….(웃음) 자기 역할만 죽여주는 역할이라고 다 되는 것도 아니거든요. 옛날엔 문학작품 같은 드라마가 많았어요. 옛 드라마가 더 드라마다웠던 것 같아요.

영화 <만월>이 크랭크업했죠. 어떤 부분에 마음이 움직였나요?
시나리오가 재미있어요. 나 같은 조건의 여배우가 다 따지면 몇 년에 하나씩밖에 못할걸요? 시나리오가 일단 재미있으면 우선순위에 넣죠. 난 여자고 나이도 많으니까.

저예산 영화죠? 개런티도 적었을 것 같은데요.
적죠. 남는 것 없었어요. 하하하. 밥 사고, 술 사고 더 들어가고.

개런티가 중요한 건 아닌 건가요? 
개런티, 중요하죠.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도 저를 살아 있게 만들어주는 역할이면 적은 개런티로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행복하게 뜨겁게 후회 없이 촬영했고요. 이제 잘되길 빌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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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렌체크 원 숄더라인 보디슈트 셔츠, 글렌체크 점프슈트는 모두 막스마라.

<만월>에서 오랜만에 첫사랑을 찾아 떠나는 ‘윤희’를 맡았어요. 어떤 부분을 가장 고민했어요? 
처음에는 작품으로 다가갔지만 제 감성을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고민을 가장 많이 했어요. 가족애로서 엄마를 이해하고 배려하고 그런 과정을 쭉 그려나가는데 굉장히 감동적이에요. 윤희는 자신을 숨긴 채 살아왔죠. 첫사랑과는 각자의 인생을 살다가 오랜만에 만나게 돼요.

기대됩니다. 언제 볼 수 있어요?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라고 들었어요. 감독님이 참 순수해요. 이런 영화가 다양하게 잘 되어야 돼요. 잘 됐으면 좋겠다.

가을이군요. 그때까지는 어떻게 보낼 계획인가요? 
제주도 집에 좀 있으려고요. 제주도에서나 서울에서나 하는 건 똑같아요. 제주도에서는 먹는 데 좀 더 집중하는 것 같아요. 거의 그리스식이야. 제주에서 난 재료에 올리브 오일 둘러서 먹는데 너무 맛있어요.

이런 화보 작업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감사하지만 아직도 익숙하지 않아요. 하지만 하고 나면 제 앨범이 되고, 자료가 되더군요. 지난 하와이도 이번 방콕도 그럴 거예요. 제가 한 뷰티 브랜드의 모델을 13년을 했는데 쉽지는 않았어요. 뷰티니까 촬영 2주 전부터 늘 조심했죠. 광고 모델이 끝나면서 그 회사에서 저한테 앨범을 만들어줬어요. 남들은 소장용 사진 만들려고 노력하는데, 내 인생에 빛나는 부분이 이렇게 담겨 있구나 싶었어요. 지금은 다른 브랜드의 모델인데 또 너무 좋은 브랜드예요. 제가 운이 좋아요. 늘 고맙습니다.(웃음)

여행에서도 할까, 하지 말까에서는 늘 하자의 손을 들어주더군요.
실수와 실패는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 같아요. 누구나 한 번씩 밟고 지나가죠. 실패가 두렵지만 한편으로는 별로 무섭지 않아요. 또 다른 경험이 있잖아요. 인생이 매일매일 ‘Full of Surprise’죠. 다음 날도 모르고, 매일 다시 펼쳐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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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로 재킷은 막스마라. 빅 스퀘어 콤비 프레임 선글라스는 젠틀 몬스터(Gentle Mon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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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 롱 네크리스는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 슈즈는 지미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