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이 시작된 후 1년. 세상은 여전히 같아 보이지만 모든 것은 달라졌다. 그럼에도 모두는 자신의 시간을 살아간다. 그 1년의 기록.

 

한국으로 돌아왔다

몇 달 전, 엘에이 사는 친구가 한국에 와 친구들이 모여 저녁을 먹을 – 지금 생각하면 너무 호사스러운 – 일이 있었다. 친구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 주변에서 최악의 격리 생활을 한 사람이 얘잖아.”

아… 제가 말입니까? 어차피 그 친구나 나나 각자 엘에이와 뉴욕에서 2주 간격으로 귀국해 격리했고, 그전에 최악의 코로나 창궐 지역 미국에서 집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산 건 마찬가지였다. 차이는 좀 있었지만 우리 공통의 힘듦은 천, 만 단위로 나오는 확진자에 대한 바이러스 공포보다 타지에서 살며 가족처럼 의지하고 지내던 사람들과의 접촉이 사라졌다는 데 있었다. 그러다 둘 다 나이 든 어머니 때문에 갑자기 한국에 들어오게 됐다.

두께에 따라 준비한 공항용, 기내용, 취침용 3종 마스크, 좌석과 화장실 닦을 클로락스 페이퍼 한 통, 젤과 스프레이와 스왑 등 종류별 알코올 등을 한짐 짊어지고 덜덜 떨며 비행기를 탔다. 처음엔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보다 온갖 보호장비로 무장한 승무원이 더 무서웠지만, 네 시간 다섯 시간의 비행이 지나면서 점점 알코올을 뿌리는 횟수도 줄어들고 음료를 마시는 여유까지 갖게 됐다. 뉴욕 집에 비하면 안식처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한국은 천국이야.” 나보다 늦게 격리를 시작한 친구가 말했다. 친구의 인스타 스토리에는 풍요로운 한국 배달 음식에 ‘#슬기로운격리생활’이 붙어 올라오고 있었다. 앞서 한국 격리를 체험한 뉴욕 지인들도 그랬다. 몇 달 만에 아이를 밖에서 놀 수 있게 한 친구는 ‘이제야 살 것 같다’고 했다. 강제로 갇혀 있던 2주가 뉴욕에 있을 때보다 훨씬 자유롭다며 한국에서 새로 배운 배달 앱 체험기, 먹을 만한 마켓컬리 냉동식품 추천 등을 단톡방에 앞다퉈 올렸다.

나 역시 미국 집보다 세네 배는 커 보이는 거처, 동생이 가져다놓은 즉석밥 한 상자(쌀이다!)와 각종 반찬, 냉동식품들이 들어차 있는 빈집에서 (비록 싸구려 와인에 의지했으나) 호화로운 격리 생활을 했다. 친구들 말대로 여기야말로 천국이었는지도 모른다. 거의 네 달을 매일 공포에 떨었던 브루클린 작은 집에서 벗어나 코로나19 테스트 음성도 받았겠다, 바이러스 따위는 인터넷에서나 보는 얘기처럼 느끼며, 몸을 잠깐 묶어두어도 마음은 더없이 자유로울 수 있는 곳에 누워 엄마의 최애 <미스터 트롯>을 틀어놓고 게으름의 끝을 실천했다.

하지만 이 넘치는 호사와 2주 뒤에 펼쳐질 그 해방감에 대한 기대를 나는 누리지 못했다. 격리에서 벗어난다 한들 세상은 어제의 그곳이 아니었다. 작은 즐거움이 하루의 군데군데 자리하겠지만, 맘놓고 즐거울 날은 이제 없다. 백신이 모두에게 공급되고 조금은 마스크에서 벗어나고 어느 정도 일상을 되찾게 되겠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 누구도 의심하지 않고 어떤 행동도 비난하지 않은 채 살아도 좋을 그때의 일상은 이제 오지 않는다. 기한이 없는 격리 시대를 시작했다.

– 이현수(미디어2.0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