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영은 그 어떤 초조함도 원망도 없이 자신의 시간을 살아간다. “저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마치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처럼.

 

퍼프 소매 백 리스 톱, 밑단 레이스 디테일 쇼츠는 모두 세실리에 반센 바이 분더샵(Cecilie Bahnsen by Boon the Shop).

당신을 만나니 어쩐지 시계부터 보게 되네요. 드라마 <카이로스> 때문이죠. 지금 이 촬영이 아니었다면 뭘 하고 있었을 것 같아요?
집에서 넷플릭스를 보고 있을 것 같아요. 드라마 촬영이 끝난 후로는 주로 집에 있어요. 그동안 책을 너무 안 읽어서 책도 다시 읽고 있고 고양이랑 놀아주고, 집 청소도 하고요. 고구마 사놓고 마늘종 장아찌도 담가두고요.

장아찌를 담갔다고요?
백종원 만능 양념장으로 담가서 아주 쉬워요. 손님 오면 나중에 제가 만들었다고 자랑하려고요.

<카이로스>를 보면서 인생이 결국 선택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오늘의 이 화보와 인터뷰도 당신의 선택이겠죠? 왜 선택했어요?
화보 촬영으로 저의 다른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이 항상 있어요. 가수분들은 앨범마다 다양한 콘셉트로 작업을 하는데 배우는 작품이나 광고에서의 모습만으로는 한정적인 것 같거든요. 화보로 여러 이미지를 해보면 ‘비슷한 거 해봤어’ 하면서 다른 과감한 것도 해볼 수 있을 것 같은 거예요. 이번에 머리 자르고 ‘이런 모습이 있었어?’ 하는 반응이 많았는데, 얼굴은 똑같이 저잖아요? 제가 안 보여드리면 모르는 거니까요.

안 그래도 작품을 위해 머리를 잘랐다는 게 미담처럼 전해졌어요. 여전히 여성 배우가 머리를 짧게 자르는 게 파격인가 봐요.
삭발 정도는 해야 파격이 아닐까요.(웃음) 저는 감독님한테 반삭도 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건 감독님이 안 된다고 하셨어요. 지금 이 머리도 제가 설득했어요. 리딩 날 제가 그냥 자르고 갔거든요.

덕분에 동글동글한 버섯 머리가 되었고, 극중 애리도 현실성을 입었어요.
애리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아픈 엄마를 공부해가면서 부양하는 걸 봐서는 특별한 인물이죠. 돈 버는 것 외에 에너지를 쏟는 모습이 되면 시청자가 볼 때 몰입이 깨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공시를 준비하는 분들이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아니까요.

또 한편으로 애리는 행복한 사람이기도 해요. 서로 사랑하는 엄마와 두 친구들이 있죠.
맞아요. 그런 면에서는 저랑 비슷한 것 같아요. 저도 가족들이랑 투닥투닥해도 사이가 항상 좋아요. 친구도 많지는 않지만 가장 친한 친구 3명은 있고요.

블랙 레더 재킷, 니트 톱, 레더 롱 스커트는 모두 아크리스(Akris). 그레이 롱 부츠는 아쿠아주라(Aquazzura).

<카이로스>는 밤 10시 33분에 모든 일이 일어나는 타임 슬립 드라마였죠. 마지막 메시지가 좋았어요. 지금까지 밤 10시 33분의 1분만을 위해 살아왔다면 앞으로는 매 시간에 충실하게 해달라고 빌잖아요?
성록 오빠(신성록)도 그 대사가 너무 오글거리면 안 될 거라고 걱정했는데, 저는 그 대사가 너무 와 닿았어요. 미래를 잘 살기 위해서는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 그런 메시지였죠. 너무 공감이 갔어요.

인물들은 결국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제자리를 찾아가요. 작가는 ‘한 달 간격의 인물을 병렬적으로 보여주는 구조라 실은 모든 연기자가 1인 2역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동의하나요?
과거의 애리와 미래의 애리가 계속 바뀌는 상황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저는 아무래도 다른 배우들보다는 그런 부분에서 덜 힘들었죠. 현장에서도 재미있게 웃고 떠들다가 촬영 들어가기 전에 혼자 전사 생각하고 대본 보고 감정 잡고 촬영하고 그랬어요.

작년의 마지막, 올해의 처음에서 새삼스럽게 떠오른 생각이 있어요?
십대 때는 구체적으로 목표를 세웠어요. 이번엔 간결하게 작년보다 나은 올해를 살고 싶어요. 코로나가 덜했으면 좋겠고요. 가족들이랑 시간 보내는 것도요. 올해는 어떤 약속이든 15분 정도 일찍 다니는 걸 목표로 하고 있어요. 과한 목표는 설정하지 않으려는데, 오늘 늦어버렸어요.

괜찮아요. 폭설 때문이니까. 그나저나 당신에게도 다시 돌리고 싶은 순간이 있어요?
저는 후회되는 게 없어요. 다 아쉬웠을 수는 있어도 그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생각해서 지금 돌아간다고 해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아요. 후회하지 말자. 부족하더라도 제가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 같아요. 나머지는 다 제가 감수해야 하는 거죠.

블랙 테일러 재킷, 레이어드 스커트는 모두 민주킴(Minjukim). 블랙 힐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당신에 대한 독특한 이야기를 보았어요. 유명해지면 유괴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어머니가 어릴 적부터 연기를 시켰다고요. 사실인가요?
네 맞아요. 얼굴이 알려지면 목격자 진술 확보에 유리하지 않을까 생각하셨다고 하더라고요.

독특한 해결법이네요. 당시에는 유괴 사건이 많았어요.
제가 어머니의 그런 면을 많이 닮은 것 같아요. 어머니는 저보다 더 예쁘세요.

처음 어머니 손에 이끌려 아역 배우를 시작했던 때도 기억하고 있어요?
네, 연기 못 해서 잘리고 춤 못 춰서 잘리고 그러다가 말귀를 알아듣기 시작하면서부터 욕심부렸던 기억이 나요. 엑스트라도 하고 보조 출연할 때 제가 대사 있고 샷을 받는 친구들을 보면서 높아 보이는 아저씨 찾아가서 “쟤는 대사가 있고 저는 없어요?”라고 했대요.

스스로 선택해서 연기를 한 건 언제부터였어요?
9살쯤에 칭찬받으면서 재미를 느낀 것 같아요. 오디션 가서 다른 애들 가르치고 잘난 척하고 저도 못 하면서…(웃음) 그렇게 욕심이 생기고 오디션도 열심히 다녔던 것 같아요. 그때부터는 제 의지가 있었던 것 같아요.

당시에도 아역 배우로서는 흥미로운 작품을 했어요. <여선생 VS 여제자> 영화를 좋아하거든요. 15세 관람가 영화였는데 그때 열세 살쯤 되었나요?
그 작품이 어떤 느낌인지는 커서 알았어요. 어렸을 때는 그냥 당돌한 애구나 생각했어요. 저도 뭔지 잘 모르고 했던 것 같아요.

전작인 <화유기>, <메모리스트>, 이번 <카이로스>도 그렇고 독특하고 강렬한 이야기에 끌리는 편인가요?
저만 할 수 있는 걸 하고 싶다는 욕심이 늘 있는 것 같아요. <화유기>에서는 좀비 소녀와 아사녀였는데 그게 조금 어려운 역할이라고 생각해서 잘하고 싶었어요.

네이비 투버튼 재킷, 네이비 쇼츠는 드리스 반 노튼(Dries Van Noten). 블랙 롱 부츠는 아쿠아주라.

저팔계인 이홍기 씨와의 호흡이 좋았어요.
홍기 오빠는 눈빛이 되게 진정성 있었어요. 약간 멜로 라인이었는데 뭔가를 하진 않지만 서로 절절하고 눈빛이 너무 좋더라고요. 저도 덕분에 집중할 수 있었어요.

이제 한동안 휴식기를 가질 예정이라면서요? 뭘 할 건가요?
매번 하는 다짐이긴 한데 이번엔 진짜 쉬어야 할 것 같아요. 그래도 너무 오래 쉬면 불안하긴 해요.

배우에게 필요한 능력이 있다면 우선 연기력이겠죠. 해보니 또 뭐가 중요한 것 같아요?
몸 쓰는 것? 일단 체력이 좋아야 하고요. 특히 주연배우는 체력이 중요한 것 같아요. 그 외엔 연기만 잘하면 되는 것 같아요.

연기로 어떤 경지에 오른다는 게 가능할까요?
그런 분들이 분명히 계신 것 같아요. 우리나라의 수많은 대선배님들. 알 파치노, 로버트 드니로 같은 분들 보면 확실히 있어요.

당신도 그런 배우가 되는 게 목표인가요?
좋죠. 그런데 결코 죽을 때까지 다가설 수 없다고 하더라도 제가 직업으로 삼는 일이기 때문에 책임감을 가지고 거기에 다가설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죠. 절대 못 한다고 해도요.

평생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만약 다른 일이 하고 싶어져도 배우를 은퇴하고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배우는 평생 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작품이 안 들어오면 배우는 백수잖아요. 그러면 편의점에서 알바를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생계 유지를 하잖아요. 그런 건 항상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다른 직업은 항상 열려 있다고 생각해요.

오늘 만나보니 무척 밝고 현실적이에요. 시트콤도 잘할 것 같아요.
저는 너무 좋은데! 때를 기다리고 있어요. 연락 부탁드립니다.

아주 어린시절부터 줄곧 카메라 앞에 서왔어요. 어떤 카메라든 편한가요?
날마다 다른 것 같아요. 평소엔 긴장 안 하다가 어느 날은 갑자기 숨 쉬는 법을 까먹을 것 같은 순간이 있어요. 대사 사이에 침을 어떻게 삼켜야 할지 모르겠고요. 너무 긴장될 때가 가끔 있는 것 같아요. 컨디션이 안 좋을 때 특히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항상 체력이 제일 중요해요.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대중은 보통 불행한 예술가가 명작을 남긴다는 환상을 가지잖아요?
그쵸. 그런 분들도 계시고요. 그런데 저는 가늘고 길게 사는 게 제 목표예요. 그냥 바르고 떳떳하게 살고 싶어요.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 가장 꾸준히 해온 노력은 무엇인가요?
망가지는 건 두려워하지 않아요.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어요. 다만 그걸 두려워하는 순간이 있다면 망가지면 안 되는 인물일 때. 끝까지 고고해야 하는 인물이라면 그 인물은 지켜줘야 하니까요. 저를 포장하려고 하진 않는 것 같아요.

지금은 뭐든 포장하기 좋은 시대인데요. 포장된 이미지를 더 선호하기도 하고요.
결국 포장지는 벗겨야 하잖아요. 그때 실망하면 안 되니까요. 저는 지금 이 모습 그대로가 저예요.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되는 걸 보여줄 필요는 없지만, 일부러 보여줄 필요도 없는 것 같아요. 친구들이랑 있을 때, 스태프들이랑 있을 때도 제가 평상시에 추는 춤, 이상한 노래를 막 불러요. 물론 이런 걸 인스타에 올리진 않죠. 그건 포장지를 쓸데없이 까는 거죠. 속껍질까지. 그래도 소중한 사람들이랑 있을 땐 “웃어줘!” 하는 거죠.

당신에 대해 사람들이 또 잘 모르는 것이 있어요?
딱히 없어요. 제 행동이나 언사를 신중히 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고 노력하고요. 연기할 때도 대본에는 ‘바래요’라고 써 있어도 ‘바라요’라고 발음해요. 되도록 웃고 있으려고 해요.

네이비 셔츠, 블랙 나일론 소재 베스트, 네이비 팬츠, 오렌지 컬러 포인트 슬링백 슈즈는 모두 프라다(Prada).

항상 웃고 있는 얼굴 뒤에는 어떤 마음이 있죠?
제가 궁금해서 현장에 보러 오는 분들도 있을 텐데, 제가 차갑게 하면 얼마나 속상하겠어요. 그러니까 밝게 해요. 그러면 기분 좋잖아요. 그냥 저 스스로 떳떳해지고 싶어요. 댓글 보냐는 질문 많이 받는데 댓글에 ‘차가워 보인다’라고 하면 평소에 표정을 개선하려고 노력해요. 댓글도 나쁜 건 다 봐요. 보면서 이건 고치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댓글을 보다니… 보면서 기쁜 댓글도 있죠?
기쁜 건 무시해요.(웃음) 그러니까 감정을 받는 게 아니라 고칠 포인트만 적는 거예요. ‘바꾸면 되지 문제없어’ 해요. 성인으로 살면서 저도 중심이 조금은 생긴 것 같아요. 일희일비하지 않고요. 조급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제가 할 수 있는 다른 무언가를 하려고 했어요.

그 말을 들으니 2021년의 이세영은 아무것도 걱정 안 해도 되겠어요.
걱정이나 고민은 없어요. 아, 요즘 축구에 빠져 있거든요. 풋살팀에 들어갔는데 코로나19로 못 하고 있어요. 상황이 좋아져서 얼른 풋살을 다시 하고 싶어요. 비록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드리블 능력은 떨어지지만 제가 없으면 팀이 안 돌아가요.(웃음) 그거 말곤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있어요. 행복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