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고 말고 할 권리가 나한테 없다고? 사유리가 기증 정자로 엄마가 된 것보다 그 사실에 더 충격을 받은 사람에게 고한다. 여성인 우리는 선택할 권리가 있다.

 

정자 기증의 세계

어느 날 딩크족인 선배와 나눈 대화다. “어느 날인가 주방에서 내가 먹을 음식을 만들고 있는데 갑자기 이렇게 평생 나만 챙기며 사는 삶에 회의가 들더라.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나이가 되고 보니 아이 생각이 나.” 딩크족에 ‘이상적인 모델’이 있다면 그의 삶일 거라고 생각할 만큼, 선배와 아이는 잘 섞이지 않는 쌍이었다. 내가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나면 결혼은 할 수 있지만 아이는 글쎄”라고 확신에 차서 떠벌리고 다닌 건 주변에 ‘내 선택에 만족한다’고 말하는 N년 차, 1N년 차 딩크가 꽤 많으며, 그들의 삶에서 내가 선택하고 싶은 결합의 형태를 봤기 때문이다. 그 쓸쓸한 자조를 들으며 마음이 내려앉았다. 저 마음이 몇 년 후 내 마음이 되지 않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 지금이라도 ‘결혼할 만한’ 사람을 찾아 나서야 하나? 난자 냉동을 진지하게 알아봐야 할까? 결혼 생각이 거의 없었던 만 38세 비혼 여성은 그렇게 조급함에 사로잡히는 아홉수의 마수에 속절없이 걸려들었다. 다행히 늦지 않게 정신이 돌아와서 “애 때문에 결혼할 순 없다”고 (방황의) 끝을 맺었다. 불의의 사고(?)로 애가 덜컥 들어선다면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낳아서 키울 순 있겠지만…. 2017년에 개봉한 영화 <매기스 플랜>의 그레타 거윅처럼 결혼 없이, 성관계 없이 ‘정자’만 받아 아이를 갖는 상상도 아주 잠깐 해본 건 사실이다. 그건 영화에서나, 아니 비혼 출산이 수십 년 전부터 공론화된 유럽, 미국 같은 나라에서나 ‘겨우’ 꿈꿔볼 만한 일이겠지.

방송인 후지타 사유리가 그 판타지 같은 일을, 적어도 6천여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먼 서구 세계에서나 가당할 법한 일을 자기 인생에 실현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한국 여성들은 적잖이 충격받았다. 6만1000여 명의 ‘좋아요’와 4000여 개의 댓글이 달린 ‘아들 엄마가 됐다’는 소식을 뜻하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정자를 기증받을 수 없다니. 인류사에 ‘정자 은행’이라는 선택지가 생겨난 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찬반 논쟁에 대한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내겐 비혼 남성이 정자를 기증하는 것은 자유지만 비혼 여성이 정자를 기증받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더 ‘쇼킹’했다. 물론 스무 곳이 넘는 정자 은행을 보유한 미국처럼 원하는 조건을 가진 정자를 인터넷으로 구입해 택배로 받는 수준까지 기대하진 않는다. 다만 전 세계의 정자 은행이 공시하는 ‘정자를 기증받을 수 있는 비배우자의 신체적, 경제적 조건’을 갖춘 여성이 단지 ‘비혼’이라는 이유로 기증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10명 중 3명이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답한 시대에(2020 통계청 조사), 이 규제가 ‘아이를 낳지 않을 권리(임신 중지)’에 ‘죄’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여성의 몸을 국가가 통제하려는 것과 뭐가 다를까? 정자를 기증받아 하는 비혼 출산은, 정말로 불법의 영역인가?

불법은 아닌데 합법도 아닌 법

결론부터 말하면 그런 법은 없다. ‘국내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시험관 시술 대상자의 배우자가 있는 경우 의료기관이 그 배우자의 서면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배우자가 없는 경우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는다. 보건복지부 대변인은 지난 11월 한 회견에서 “한국에서도 정자를 기증받아 비혼모가 출산했을 때 처벌받지 않는다”며 법적으로는 비혼 출산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배우자가 없을 경우 해당 칸을 비우면 된다는 뜻이다.

반면 의료계의 가이드라인은 상이하다. 대한산부인과 보조생식술 윤리지침에는 비배우자 간 인공수정의 조건을 ‘법률적 혼인관계에 있는 부부만을 대상으로 시행’해야 하며 이를 위해 가족관계증명서, 부부가 각각 직접 서명한 정자은행이용 자필 동의서를 필수 구비 서류로 안내하고 있다. 쉽게 말해 “결혼 생각은 없지만 더 늦기 전에 아이를 낳겠다”고 결정한 비혼 여성이 공공정자은행에서 정자를 기증받는 것은 물론, 상호 합의한 정자 기증자와 산부인과를 방문해도 인공 수정 시술을 받을 방법이 막혀 있다는 뜻이다. 한국 공공정자은행의 박남철 이사장은 징역 2년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이라는 강력한 벌칙 조항을 앞세운 생명윤리법 제24조 1항에 ‘법률로 정해진 동의서’가 이미 내포되어 있다고 말한다. 정자를 기증받아 하는 출산뿐 아니라,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나는 모든 출산과 양육-미혼모, 한부모 가장 등- 현실도 여성의 자율권을 침해한다. 정책의 방향이 비혼을 결혼시키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17년 보건사회연구원의 한 선임연구위원이 ‘혼인, 출산율이 낮은 건 여성의 교육 수준, 소득 수준이 높아진 탓이며, 그에 따라 하향 선택 결혼이 이뤄지지 않는 사회 관습, 또는 규범을 바꿀 수 있는 문화적 콘텐츠 개발이 이루어져야 함. 이는 단순한 홍보가 아닌 대중에게 무해한 음모 수준으로 은밀히 진행될 필요가 있음’이라는 (놀라운) 내용으로 발표한 논문은 여성의 몸을 향한 국가와 정책 수립자들의 뒤떨어진 인식의 수많은 증거 중 하나일 뿐이다.

내 몸은 내 마음

임신 14주 이내까지만 임신 중지가 합법이라는 법개정안을 둘러싼 낙태죄 폐지 운동에 사유리가 쏘아 올린 공까지 맞물려 ‘출산의 자기 결정권’은 어느 때보다 뜨거운 감자가 됐다. 포털 사이트의 검색창에 ‘비혼 출산’을 입력하면 무려 8000개의 기사(12월 9일 기준)가 비혼 출산에 대한 인식과 논쟁, 정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자신을 ‘독신주의’라고 소개한 출판사 에디터 김수연은 이 논쟁이 반갑다는 의견이다. “내 가족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있는데, 그게 결혼을 통해서만 가능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냥 포기했죠. 우리나라에서 결혼은 여전히 여성에게 부당 해고만큼이나 불리한 제도잖아요. 결혼을 하지 않고도 자기가 원하는 가족을 만든 사유리를 보면서 ‘난 왜 저런 생각을 한 번도 못 했지?’ 싶더라고요. 내 미래에 새로운 선택지가 생긴 기분이에요.”

출산의 자기 결정권이 법적으로 보호되는 나라들이 보이는 고출산율은 여성의 권리에 대한 정책이 어느 방향으로 향해야 하는지 객관적으로 알려주는 이정표가 된다. 1990년부터 생명윤리와 관련된 법률 정비로 29~39세 비혼 여성에게 정자를 기증받아 출산할 수 있도록 한 영국, 2015년부터 42세 이하 여성이 정자 기증으로 출산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든 스웨덴, 신생아의 약 10%가 인공수정을 통해 태어날 만큼 비혼 출산에 관대한 덴마크 등의 출산율은 1.7~2% 사이. 이 국가들의 혼외 출산율은 무려 53~57% 사이를 육박한다. 반면 ‘긴급 대응 태스크포스’의 기세로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를 운영하는 한국의 혼외 출산율은 2.2%, 출산율은 0.92%(2019 통계청)로, 전 세계 198개국 중 ‘꼴찌’(유엔인구기금UNFPA 조사)를 기록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건 출산 결정권이 ‘재생산의 기능’이라는 잣대와 완전히 별개로 작동하는 일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아이를 낳거나 낳지 않는 일은 온전히 개인의 영역이다. 국민 10명 중 7명이 ‘혼인, 혈연 관계가 아니어도 생계와 주거를 공유하면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시대임에도 (2020, 여성가족부 가족 형태 인식 조사) 온라인 댓글마다 보이는 ‘사유리의 아이는 아빠의 부재로 불행할 것’이라는 무례한 오지랖은 여전히 ‘정상 가족’만이 가족이라는 편견에 차 있다. 2021년에 이 당연한 팩트를 일일이 상기시키고 ‘주장’씩이나 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나의 임신 중지 이야기>를 쓴 프랑스 만화가 오드 메르미오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여성의 출산 자기 결정권에 대해 “그녀들은 선택을 했고, 그것에 대한 권리가 있다. 아무도 그들에게 반대의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2008년 ‘자발적 비혼모’라는 새 가족 형태를 대중에게 처음 각인시킨 방송인 허수경의 삶이 알려진 이후 출산 자기 결정권의 측면에서 법과 정책은 오히려 후퇴했다. 그로부터 12년 후 사유리는 남성 중심으로 짜인 견고한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에 돌을 투척했다. 이 돌이 당신에게 던진 화두는 무엇인가? 이제 조용히 자신의 답을 찾고 행동할 차례다.

글 | 류진(프리랜스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