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일 듯 말 듯 가물거리는 지금이 지나간다. 지는 해를 뒤로 고경표가 씩씩하고 호방한 얼굴로 새 마음을 다짐한다.

 

티셔츠는 앤 드뮐미스터(Ann Demeulemeester), 트렌치 코트와 바지는 YCH, 부츠는 엠포리오 아르마니(Emporio Armani).

당신을 만나러 오면서 생각한 단어가 두 개 있어요. ‘불현듯’과 ‘기필코’.
갑자기요? 기필코는 아닌 거 같아요. 그 말은 의지로 가득 찬 말처럼 보이거든요. 지금 저는 그런 상태가 아니에요. 불현듯이라는 단어가 저랑 어울리는 것 같아요.

드라마 <사생활>이 시작할 무렵 ‘불현듯’ 당신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됐어요. 왜 가끔 그럴 때 있잖아요. 궁금해졌죠.
얼굴이 좀 변한 거 같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시간이 흐르면서 감정이 변하니까 얼굴도 자연스럽게 변한 게 아닐까요? 지금 저는 기대나 희망 같은 마음을 품고 있지 않아요. 절망적 상황이라는 고백은 아니고, 그냥 이 순간에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어요. 어느 날부터 그렇게 됐어요. 좋게 해석하면 한결 편안해졌다고 볼 수 있을 텐데, 실은 타협이라는 걸 저는 알아요. 대체로 무엇에서도 아무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된 것 같아요. 힘이 좀 빠졌다고 해야 하나. 예전처럼 혈기 왕성한 기운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여러 마음이 동시에 담긴 말처럼 들리네요. 그러고 보니 당신의 20대 시절은 훨씬 당돌한 면이 있었죠. 
그땐 꿈이 있었으니까요. 현실을 잘 모르기도 했고요. 매일 매일 희망에 가득 차서 살았던 거 같아요. 저 진짜 그렇게 살았어요. 뭐든 될 수 있을 것 같았고, 제가 맨 앞에 선 사람이 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나이를 먹을수록 단합된 의지의 공유는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런 생각을 자주, 많이 했어요.

코트는 구찌(Gucci).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건가요?
맞아요. 지난 경험에 의한 배움이 분명 있죠. 무엇보다 지난 9월 어머니의 죽음이 지금도 여기에 크고 무겁게 남아 있어요. 솔직히 말하면 저 잘 모르겠어요. 지금 제 삶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그렇다면 ‘기필코’, 교외의 호텔 방에 혼자 웅크리고 있거나, 호텔 밖을 어슬렁거리는 당신의 모습이 스틸 컷처럼 분명했어요. 꽤 쌀쌀한 날이지만 그 모습을 꼭 찍어야겠다고 주장한 이유죠. 
화보 촬영장에서 제가 느긋하게 게으름 피우면 모든 게 다 늦어지는 걸 알고 있어요. 여러 사람에게 폐 끼치는 게 싫어서 일부러 장난도 치고 빨리빨리 하려고 해요. 저 사진 찍는 거 되게 좋아해요. 화보 촬영도 일종의 창작이라고 생각하는데, 배우나 모델은 리드당하는 사람이에요. 주도적으로 판을 깔고 이렇게 상황을 만드는 분들은 따로 있죠. 에디터나 사진가 같은 분들이요. 그걸 따르는 게 맞아요. 좀 춥긴 했지만 즐거웠어요. 너무 잘하셨어요.

덕분에 모처럼 인천까지 왔네요. 인천을 생각하면, 잘 모르겠어요. 저만큼 넓고,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 짐작하죠. 인천 출신이죠? 
뭔가 특유의 거친 이미지가 있죠. 실제로 그런 면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래요. 이 도시만이 가지고 있는 투박함이 있어요. 어릴 때 전 그랬던 것 같아요. 빨리 여기를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어요. 제가 나고 자란 고향이지만 마냥 좋은 기억만 품고 있는 건 아니거든요.

셔츠는 아트스쿨(Art School), 바지는 벨루티(Berluti).

누구나 유년을 보낸 도시에 대한 애증의 마음이 있죠. ‘지방 출신’이라면 마음 한쪽에 품고 살았을 탈출 본능도 그와 관련 있다고 생각해요. 
그땐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면 꼭 그래요. 이곳에 평생 살아야 할까 봐 무서웠죠. 머물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 떠나야 한다는 의지가 큰 원동력이 된 것 같아요.

좀 피곤해 보이기도 해요.
네, 피곤해요. 사실 요즘 피곤하고 힘들어요. 많이.

몸이 피로한 거랑 마음이 힘든 건 또 다르잖아요. 
심적으로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는 거 같아요. 다 그렇겠지만 코로나19의 영향이 큰 거 같아요. 해야 하는 거, 하고 싶은 걸 못 하니까. 워낙 자유로운 성격인데 지금은 모든 게 다 조심스럽잖아요. 또 여기저기 편이 갈리고 싸우고 헐뜯는 걸 볼 때마다 그게 너무 날카롭게 와 닿아요. 사회는 원래 그랬는데 어릴 땐 제가 인지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지금 특히 더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요. 그런 시대와 마주하는 일이 버거울 때가 많아요. 과부하가 걸린 것처럼요.

드라마 <사생활>과 영화 <헤어질 결심>을 연달아 찍게 됐으니 지칠 만하죠.
몸이 힘든 건 또 괜찮아요. 아무런 문제가 되질 않아요. 늘 정신이 문제죠. 마음 편히 운동도 못 하고, 친구들이나 가족들 만나는 것도 신경이 쓰여요. 전 주로 바깥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접촉하며 일하니까요. 가족과 만남도 염려가 돼요. 아버지 나이도 있고, 누나가 둘째 조카를 낳은 지도 얼마 안 됐거든요.

셔츠, 베스트, 재킷, 슈즈는 모두 엠포리오 아르마니, 바지는 밀리언코르(Millioncor).

아까 언뜻 어머니의 죽음을 말했죠. 인스타그램에도 몇 번이나 그리움을 전했고, 오늘 촬영 준비 중에 누군가에게 “그때가 엄마 죽기 5일 전이었어”라고 말하는 걸 봤어요. 함구하는 대신, 매 순간 새기듯 간직하는 게 보였어요.
엄마는 제 모든 것이었어요. 비유가 아니라 사실이 그래요. 제 전부가 사라진 거죠. 엄마의 부재를 매 순간 느끼고 있어요. 그 여백이 늘 훤히 드러나요. 전 모든 걸 잃었어요. 애써 피할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러고 싶지 않아요.

사람은 괜찮은 내색으로 버틴다고 정말 괜찮아지는 존재가 아니잖아요. 
누나랑 아빠가 있지만, 엄마랑은 달라요. 영영 채워지지 않는 게 있어요. 그래서 그런지 제 마음이 좀 달라진 걸 느껴요. 감정의 동요가 없어졌어요. 한없이 좋지도 않고요, 한없이 아프지도 않아요. 다 그런가보다 그래요. 그건 제 문제이고, 배우가 그럼 안 되잖아요. 작은 감정 하나하나에 여리고 예민하게 반응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래서 또 힘들죠. 그냥 이렇게 다 쌓이고만 있는 것 같아요.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믿어보는 건 어때요? 달라지겠죠. 나아질 거예요.
맞아요. 저 그 말을, 그렇게 믿고 있어요.

박찬욱 감독의 신작 <헤어질 결심>을 찍고 있죠. 배우로서, 개인에게 의미 있는 작품일 것 같아요. ‘박찬욱’이라는 이름에는 그런 든든함이 있잖아요. 
세계적인 감독이라는 존경심을 품고는 있지만, 그게 감독님을 대하는 제 태도에 영향을 주진 않아요. 나이 차이가 꽤 나는데도 대화가 멈춰 서거나 어색한 법이 없어요. 그냥 오랫동안 알고 지낸 동료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예요. 제가 감독님의 의도나 생각, 영향을 얼마나 정확히 이해하고 흡수할 수 있을지 그런 걱정뿐이에요. 영화가 완성되면 사람들이 배우 고경표를 좀 다르게 볼 수도 있을 거고요. 어쩌면 왜 그것밖에 하지 못했냐는 욕을 먹을 수도 있겠죠. 그게 무섭진 않아요. 영화 속에서 저는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크기의 톱니바퀴라고 할 수 있어요. 저를 포함한 각각의 톱니바퀴가 어떻게 연결되고 작동하게 될지 저도 너무 궁금해요.

니트는 구찌, 바지는 피스워커(Piece Worker).

서해의 일몰이 내려다보이는 스위트룸에서 어쩌면 내내 위태로운 말을 이어오던 당신이 작품과 연기를 말하기 시작하니 좀 달라지네요. 박찬욱 감독은 새삼 왜 당신을 선택했을까요? 
그러니까요.(웃음) 그걸 모르겠어요. 여쭤보지 않았거든요. 저도 궁금해요. 감독님과의 작업이 배우로서 어떤 전환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잘 모르겠어요. 그냥 제 몫을 충실히 수행하고 싶어요. 흠이 되지 않도록. 영화에 대해선 뭐라 말씀드릴 수 없지만, 여러모로 참 신선해요.

필모그래피를 예쁘게 잘 관리하는 배우도 있죠. 당신은 어때요?
전 그냥 이것저것 다 해요.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는 거 같아요. 주인공이 싫다는 게 아니라 주연이든 조연이든 그런 비중이 작품에 출연하는 데 기준이나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그냥 배우를 하고 싶은 거니까요.

연기에 대한 생각은 어때요? 자기만의 기준이 있나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든 와 닿았으면 좋겠어요. 당연한 거죠.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주는 배우가 되고 싶고요. 작품에 참여하는 순간은 제가 삶을 살아가는 순간들이기도 하잖아요. 그 순간이 즐겁다면 그거로 됐어요. 훌륭한 작품을 만나고, 흥행에 성공하는 작품에 참여하고 그런 건 배우 고경표의 입장이자 포부인 거잖아요. 고경표의 삶의 시간들이 즐겁기를 바라요. 그게 제일 중요해요.

자기 흥에 취하고 싶지 않다는 말로 들리네요. 배우라는 직업에 함몰되고 싶지 않다는 말 같기도 하고. 
생각을 심는 거죠. 다짐하듯. 이기적인 욕심을 내고 싶지 않아요. 제 일은 공통의 화합이어야만 해요. 저는 톱니바퀴예요. 제 생각엔 배우는 주체적인 예술을 하는 예술가가 아니에요. 좋은 전달자인 거예요. 캐릭터를 표현하는 나만의 방식이 존재할 수 있지만, 그조차 그릇 안에 온전히 담겨 있는 상태여야만 해요. 그릇을 벗어나는 건 결과의 좋고 나쁨을 떠나 본질적으로 실패한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티셔츠는 스투시×릭 오웬스(Stussy×Rick Owens), 재킷은 김서룡(Kimseoryong), 바지는 8 바이 육스(8 by YOOX), 부츠는 셀린느 옴므 바이 에디 슬리먼(Celine Homme by Hedi Slimane).

최근에는 뭘 결심했어요?
티 내지 말자. 그 누구에게도.

티를 좀 내도 되지 않아요?
<어벤져스>에서 헐크가 그러거든요. “내 비밀은 항상 화가 나 있다는 거”라고요. 웃고 떠들 때조차 항상 슬픈 상태인데 그걸 드러내서 뭐해요. 이러다가 무너질 때도 있겠죠. 근데 결국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하는 것도 저 자신이에요.

어쩌면 당신은 어떤 고비를 넘고 있는 것 같네요. 꼭 그런 얼굴이에요. 
우리 1월호부터 너무 우울하고 불안한 이야기나 나눈 것처럼 보이진 않겠죠? 지금 느끼고 있는 걸 솔직하게 이야기했을 뿐이에요. 문제없어요. 오늘은 그런 다짐의 순간, 결심의 시간이었다고 생각해요. 저 잘 살 거예요.(웃음)

재킷과 바지는 김서룡. 목걸이는 스칼렛또블랙(Scalettobla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