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일하는 것이 영 답답한가? 호텔 객실을 사무실처럼 쓸 수 있다면 어떨까? 호텔에서 ‘재택’ 근무하기.

 

넓은 객실과 테헤란로 전망으로 유명한 파크하얏트 서울의 객실.

2020년의 키워드 중 하나로 ‘재택’이 있었다. 나 역시 처음으로 ‘재택 근무’라는 걸 해보며 여러 가지 변화가 생겼다. 새 랩톱을 구입했고, 서랍에 처박아두었던 마우스패드를 꺼냈고, 존재감을 잃어갔던 데스크 스탠드에 불을 켰다. 커피값이 무섭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됐다. 평소 거들떠도 안 보던 사무실의 무료 캡슐 커피를 그리워하며 결국 캡슐 커피 머신을 들였다.

‘재택 근무’는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냈다. 여러 리서치를 보면 재택 근무 만족도는 40~50대보다 20대가 높았다. 재택의 만족도는 ‘인구수’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었다. 집에 재택 근무를 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면 만족도가 높지만 두 명 이상이라면 만족도가 떨어지는 현상이다. 남들 다 하는 것 같은 재택을 안 하는 회사는 그거대로 문제였다. 올해 재택을 시행하지 않은 회사의 수장들은 꽤나 귀가 간지러웠을 게 분명하다. 재택 문화는 즉각적으로 산업에도 영향을 주었다. 코로나19 이후 전 세계적으로 재택 근무 관련 물품의 소비가 크게 늘어난 것. 의복 소비가 크게 줄었지만 줌 회의를 위한 상의 소비는 이어졌다. 책상, 모니터, 랩탑, 프린터가 불티나게 팔렸다.

식사도 문제였다. 나가서 먹자니 두렵고, 해 먹자니 시간과 에너지가 너무 소요되었다. 그렇다고 라면만 먹고 일하면 슬프니 배달 음식만 먹게 되었다. 재택으로 인해 사생활이 드러나는 것도 문제였다. 줌 회의 뒤로 속옷만 입고 지나가는 연인, 반려견과 반려묘가 키보드를 덮치거나, 아이가 울어 회의를 망치는 일들이다. 그렇다 보니 줌 회의용 뒷배경도 올해 ‘코로나 아이템’으로 떠올랐다.

비즈니스 센터

호텔왕들의 노림수

올해 코로나로 큰 타격을 입은 호텔 업계는 바로 이 ‘재택’의 수요를 감지했다. 좋은 환경, 완벽한 서비스라면 호텔이 일가견이 있다. 객실에만 머문다면 안전한 안식처로 손색이 없다. 올해 간판이었던 쇼디치 호텔을 폐점하는 결정을 내린 에이스호텔은 LA와 시카고 몇 도시에 한정해 객실을 사무실처럼 쓸 수 있는 ‘Ace Hotel Office’를 선보였다. 4시간 75달러, 8시간 125달러로 스텀타운 커피를 제공했다. 메리어트 그룹도 자체 리서치 결과를 바탕으로 재택 프로그램 ‘데이 패스’를 내놓았다. 리서치에 따르면 사람들은 호텔 객실에서 일하는 것에 호의적이었다.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 업무 공간이 없는 작은 아파트에서 느끼는 답답함, 집에서 자녀들이 원격수업을 하는 경우, 뚜렷하지 않은 일과 삶의 경계, 중요한 발표, 프로젝트나 회의 중 방해받지 않고 집중해서 일할 수 없는 환경 등이 꼽혔다. 메리어트 본보이 데이패스는 하루 동안 호텔 객실을 사무실처럼 활용하는 상품으로 오전 6시 체크인, 오후 6시 체크아웃이 가능하다.

나는 올해 재택 근무를 해보며 ‘재택 근무가 맞지 않는 인간’이라는 결론을 내심 내린 상태였다. 다른 방해 요인이 적고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사무실이 아닌 집에서 일할 때는 ‘일 모드’로 전환하기가 쉽지 않았다. 평소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그 사이에서 주고받은 에너지가 곧 영감이 되는 게 에디터의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호텔에서 일하면 다를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언할 수 있다. 호텔을 싫어하는 에디터는 없다.

테헤란로를 수놓은 광고판

파크하얏트 서울에서 재택 근무 하기

국내에서 재택 패키지를 내는 호텔을 알아보니, 단연 파크하얏트 서울이 눈에 들어왔다. ‘비즈니스 앳 더 파크 – 일상의 변화를 원하는 재택 근무자들을 위한 12시간 투숙 패키지, 워라밸과 생산성을 높여줄 모든 것’.

세상에, 노동자들이 원하는 게 여기 다 들어 있었다. 일상의 변화, 워라밸, 생산성까지…!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유연한 체크인 시간이다. 오전 7시부터 11시 사이 체크인을 하고 12시간 동안 이용하는 방식이다. 삼성 타임으로 일할 것인가, 매거진 타임으로 일할 것인가. 나는 매거진 타임으로 선택했다. 매거진 타임은 오전 10시부터 시작된다. 오전 10시 이전에 매거진 에디터에게 전화를 걸면 안 된다는 것은 업계의 불문율이다.

11월의 어느 날, 나는 캐멀 코트에 구두까지 신은, 비즈니스 우먼 차림으로 파크하얏트 서울 24층에서 체크인했다. 기내용 사이즈 리모와 – 올해 한 번도 비행기를 타보지 못했다. 이것이 올해 트렁크가 집밖으로 나온 유일한 순간이었다 – 에 랩톱과 마스크, 충전기, 휴대폰 충전기, 원고를 쓸 자료, 간단한 뷰티템, 원고를 위해 봐야 할 두 권의 책, 허리가 편한 바지를 쑤셔 넣은 상태였다. 빠르고 간편한 체크인 후 내게 2106호의 카드키가 주어졌다.

2106호의 문을 열자, 통유리창 밖으로 건너편 건물에 붙은 엘지 TV 광고 속 거대한 호랑이…아니 재규어와 눈이 마주쳤다. 올레드 TV의 선명함을 뽐내는 광고였지만 곧 깨달았다. 객실 어디에 있든 재규어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매서운 눈초리로 놀지 말고 눕지 말고 일하라고 말하는 듯했다. 재규어를 편집장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나의 재택을 망치지 않으려 온 나의 구원자!’

호텔의 통창 밖에는 오후의 테헤란로가 선명하게 펼쳐져 있었다. 운 좋게도 날씨가 아주 좋았고, 도심공항타워. 글래스타워, 아셈타워 등 비즈니스 빌딩이 아주 가까운 듯했다. 저기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들처럼 나도 일하리라.

재택 패키지답게 객실에는 깜찍한 데스크용 스탠드가 마련되어 있었다. 랩톱과 자료를 세팅하고, 객실의 커피 머신으로 커피 한 잔을 내렸다. 객실 서비스로 얼음 바스켓을 부탁해서 유리잔에 얼음을 넣고 커피를 부었더니, 아이스 아메리카노 완성. 캡슐은 6개가 제공되고 추가로 더 제공된다고 하니 일할 때마다 벤티 사이즈로 커피를 마셔대는 두 후배들이 생각났다. 음악도 틀 수 있지만 호텔에 온 기분을 느끼기 위해 해외 뉴스 채널을 틀었다. 어딜 돌리든 ‘트럼프냐 바이든이냐’ 미 대선 보도가 한창이었다. 패키지 혜택 중 하나는 비즈니스 센터 같은 편의 시설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팀원들과 함께 회의실을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후배 C는 인천에서 영상 촬영 중이었고, 후배 J는 스튜디오에서 6가지 호떡을 굽느라 비즈니스 센터에서 일하는 호사는 누리지 못했지만….

인룸다이닝

여러 통의 메일에 답하고 나니 어느덧 점심 시간이 훌쩍 지났다. ‘비즈니스 앳 더 파크’에는 룸서비스 5만원 크레딧이 포함되어 있다. “재택 근무에서 식사 문제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대면이 중요한 때에, 레스토랑 방문을 꺼릴 수 있는 손님을 위해 룸서비스 크레딧을 생각했습니다.” 파크하얏트 서울의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민지영 지배인의 설명처럼, 끼니는 재택 근무자에게 중요한 문제다. 크레딧으로 객실에서 식사를 할 수 있는 건 매력적인 장점. 인룸다이닝 메뉴를 펴고 고뇌에 빠졌다. 갈비구이 정식이 딱 5만원이었고, 돈카츠카레나 보타르가가 올려진 링귀니를 고르면 감자튀김도 먹을 수 있었다. 한방갈비탕도 좋아 보였고, 호텔에 빠질 수 없는 버거, 클럽 샌드위치도 물론! 호기롭게 주문한 것은 역시 갈비구이. 30분 뒤 갈비 두 대와 더덕구이, 조개된장국이 정갈하게 차려진 식사가 도착했다. 양념이 촉촉이 배어든 갈비를 먹으며 생각했다. 이런 환경이라면 매일 재택 근무를 해도 좋겠다고.

노동자의 근무 시간이라면 일반적으로 8시간을 말한다. 파크하얏트 서울의 재택 패키지는 12시간을 제공하니 4시간만큼은 호텔을 즐기는 데 써도 좋겠다. 수영장에서 느긋하게 저녁 수영을 즐길 수도 있다. 이번엔 수영복을 가져오지 않았지만 피트니스 클럽과 수영장 이용이 무료다. 사우나도 유료로 이용할 수 있다. 파크하얏트 서울의 사우나는 아담하고 프라이빗하기에 서울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사우나였다. 30분 스파 트리트먼트를 10%, 전 레스토랑 업장을 10% 할인해주는 혜택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객실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화강암으로 된 욕실에서 커다란 욕조에 물을 받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았다. 욕조의 TV로 야구 경기를 봤다. 크레딧은 이미 다 썼지만 에라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감자튀김도 시키고, 돈카츠카레도 시켰다.

욕실의 전망

덜 마른 촉촉한 머리로 창가에 있는 라운지 체어에 누웠다가, 침대에 엎드렸다가 하며 빈둥거리는 사이 삼성역 사거리는 퇴근하려는 사람들의 불빛으로 가득해졌다. 재규어가 눈을 빛내도, 이제 저녁시간이 되었으므로 빈둥거림도 떳떳하다. 12시간 체류면 충분할 것 같지만 호텔 침대에 누우면 누구나 생각이 바뀔 것이다. 숙박을 할까, 재택 패키지를 이용할까. 사치스러운 고민을 해보는 것도 역시 손님의 몫. 그사이 어둠이 내리고 코로나 시대를 틈탄 12시간 동안의 체류가 끝나가고 있었다. 비즈니스 앳 더 파크는 2020년 12월 31일까지 이용할 수 있다. 가격은 날짜에 따라 차등이지만 숙박비보다 저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