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리즘과 맥시멀리즘 사이 그 어디쯤. 위대한 블랙이 주는 찬란한 위로.

 

본래 블랙은 절제를 가까이 좇는 컬러다. 따라서 미니멀리스트들의 컬러라고도 한다. 1980~90년대 헬무트 랭의 시대를 떠올리면 쉬운데, ‘Less is More’를 주창하며 덜어낼수록 아름답다는 미학을 펼친 당시 디자이너들에게 군더더기 없는 블랙은 화이트와 더불어 떼려야 뗄 수 없는 컬러였다. 물론 미니멀리즘이라고 해서 실루엣을 단순화한 것만이 다는 아니다. 그들은 장식을 채우는 것 대신 소재와 디테일에 집중해 블랙 컬러를 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간결함을 고급스러움으로 치환했다. 또 누군가 블랙 컬러는 기본값이라고 이야기한다. 판매가 되는 아이템이라면 무엇이든 블랙 컬러는 꼭 하나 만들고 마니까. 유행이라기엔 너무 식상한 컬러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게 따지면 블랙 컬러는 유행이 아닌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언제나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주기에 ‘시크하다’라는 표현을 달고 사는 블랙이 아닌가. 그러나 패션신에는 항상 새롭고 참신하며 때에 따라서는 위트까지 완벽히 장착해야만 하는 강박이 있다. 그리하여 2020 가을/겨울의 블랙 룩은 러플이 반복되는 레이어, 다양한 실루엣, 챙이 휘어질 것처럼 넓은 모자나 머리 덮개 등 보다 극적인 그것들이 특히 인기다. 미니멀리즘과 맥시멀리즘 사이 그 어디쯤. 드라마틱하거나 어느 서구 장례식장의 미망인 같거나. 모두 둘도 없이 우아하고 세련된 여인의 짜릿한 블랙 룩이다.

먼저 챙이 넓다 못해 어깨 아래로 흐르는 거대한 모자를 쓴 지방시의 룩을 살펴보자. 몸에 딱 붙는 터틀넥에 걸을 때마다 각선미가 보이는 랩스타일의 스커트를 입은 모델은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번 시즌 클레어 웨이트 켈러는 누벨바그 시절의 영화 포스터와 여성 아티스트 케티 라 로카, 헬레나 알메이다에게서 영감을 얻어 지방시의 아카이브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했다. 프렌치 영화의 새로운 경향을 테마로 잡은 것답게 무심한 듯 우아한 여성의 자태가 런웨이를 가득 메웠다. 뉴욕을 대표하는 두 디자이너 캐롤리나 헤레라와 마크 제이콥스는 각각 검은 베일을 이용해 다른 분위기의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깊게 파인 오프 숄더 점프슈트에 더한 물방울 무늬 베일이 젊은 미망인을 연상시킨다면, 부클레 소재 셋업 스커트 슈트에 볼러햇과 베일을 장식한 착장에서는 역사 속에서 마주했던 여인의 잔상이 떠올랐다. 오프화이트를 이끄는 버질 아블로의 언밸런스한 러플 드레스와 스키아파렐리의 둥근 숄더 라인, 맥스웰과 로다테의 발끝까지 오는 거대한 망토, 지암바티스타 발리의 깃털 장식 코트도 눈여겨볼 만하다. 개인적으로는 컷아웃 디테일의 볼륨 있는 블랙 원피스를 입은 베르사체 우먼이나 광택 있는 오버사이즈 코트에 가죽 꽃 코르사주를 목에 장식한 에르뎀의 룩도 마음에 들었다. 사실, 매일 만나는 블랙의 새로운 면면은 그것 자체로 유의미하다.

메탈 홀스빗 장식의 톱 핸들 투웨이 백은 4천만원대, 구찌(Gucci).

 

챙이 넓은 펠트 모자는 가격미정, 에르메스(Hermes).

 

앵클 스트랩 장식의 스틸레토 힐은 95만원, 아쿠아주라 바이 한스타일닷컴(Aquazzura by ihanstyle.com).

 

벨벳 소재의 튜브톱 드레스는 가격미정, 에트로(Etro).

 

메탈과 레진으로 만든 귀고리는 가격미정, 샤넬(Chanel).

 

독특한 잠금장치의 클러치백은 2백만원대,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