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지나가고, 첫 장편 영화를 들고 나타난 여성 감독 3인을 만났다. 여자의 길은 여자가 정한다.

 

임선애 | 인간은 다 늙는다

임선애 감독은 수십 편의 영화에서 스토리보드 작가로 일했다. 첫 장편 연출작인 <69세>는 세상을 향해 제 목소리를 내는 69세 여성을 차분하지만 단단하게 비춘다. 그 과정이 아주 더뎌도 상관없다고 한다.

극장에서 <69세>를 볼 기회가 몇 번 있었는데, 될 수 있는 한 그 자리를 피해 다녔다. 고통이 예정된 영화라고 생각했다. 지난밤이 되어서야 겨우 스크리너 계정을 통해 영화를 봤는데, 역시나다.
영화를 검색했을 때 가장 먼저 만나는 간단한 시놉시스가 69세 여성과 성폭행이라는 건 아무래도 쉽지 않을 거다. 영화의 시작 단계부터 그런 반응이 대다수였다. 누가 그런 이야기를 보겠느냐고, 아무도 투자하지 않을 거라는 걱정 어린 조언도 잔뜩이었다. 근데 그럴수록 한번 해보고 싶다는 도전 의식이 커졌다. 개인적인 취향도 작용했고. 특히나 유럽 영화 중에는 장년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가 많지 않나? 샬롯 램플링과 이자벨 위페르 같은 배우가 전면에 나선 영화들이 나를 충족시키는 지점이 있었다. 시나리오 완성 단계에서 상업 영화 노선으로 갈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나니 훨씬 가볍게,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었다. 결국 독립영화 제작 지원을 받아서 완성했다.

영화는 “69세 저, 심효정을 29세 간호조무사 이중호가 성폭행했습니다”라는 외침에 우리 사회가 얼마나 많은 편견을 담아 반응하는지 민망하리만큼 여실히 보여준다. 
영화의 표면에는 노인과 여성, 성폭력이 자리하지만 결국 이 영화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존엄과 명예를 지켜내기 위해 애쓰는 한 인간의 본능적인 투쟁에 관한 이야기다. 의도가 제대로 전달됐다면 영화가 끝나고 난 다음 지금의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까. 인간은 결국 유한한 존재인데 사람들은 자기가 늙는다는 것을 망각하고 사는 것 같다. 모든 인간은 다 노인이 된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 미디어가 노인을 그리는 방식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되짚어보게 되더라. 
처음 예수정 선생님을 만났는데 그러시더라. 기존에 노년을 다룬 작품 대부분은 부부가 해로하는 이야기 아니면 누군가의 할머니, 할아버지로서 젊은 세대가 바라는 이상향에 가깝다고. 귀엽고 포근하거나 괴팍한 노인네 같은 캐릭터 말이다. 현실 세계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그런 캐릭터가 선생님이 보기에는 꼭 판타지같이 느껴지셨다고 하더라.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69세>의 시나리오를 읽고 불편하고 외면하고 싶지만, 현실 속에 존재하는 한 사람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출연을 결심했다고 하셨다.

감독 입장에서는 아직 경험해보지 않은 60대의 마음을 그리는 일이 쉽지 않았을 거다.
내가 지금 40대 초반이다. 처음에는 겪어보지 않은 60대 인물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가만히 앉아 생각해보니까 20대 때 내 마음과 40대인 지금의 마음, 그 상태가 똑같더라. 내가 60대가 되더라도 지금 마음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용기를 냈다. 지금의 내 마음으로, 69세 ‘효정’의 마음을 함께 그려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심효정’을 연기한 배우 예수정의 흔들리듯 결연한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뭔지 모를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배우의 얼굴이 지닌 힘이겠지. 
예수정 선생님을 아주 오래전부터 흠모해왔다. 지난 인터뷰도 다 찾아 읽고 잔뜩 긴장한 채로 만났는데 참 따뜻한 분이시더라. 연기는 당연히 완벽했고, 시나리오를 아주 정확히 분석하고 계셨다. 선생님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시나리오를 손봤기 때문에 효정의 말과 행동이 더 정확하고 자연스러워질 수 있었다. 신인 감독인 내게는 예상치 못한 보너스를 받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럼에도 결국 어떤 장면을 어떻게, 어디까지 보여줄지는 감독의 선택이다. 당신은 리얼리즘이라는 명목하에 효정이 겪었을 성폭력 장면을 구체적으로 재현하지 않았다. 
난 거꾸로 불필요한 장면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영화에 묻고 싶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만 하는지. 그게 솔직한 걸까? 영화의 첫 장면은 검은 화면에 소리만 존재한다. 성폭행을 당하는 장면도 아닌 전조일 뿐. 그게 전부다. 다분히 의도한 연출이다.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고도 성폭력과 직면한 여성의 공포와 불안을 표현함과 동시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마지막은 희망을 향해 나아간다. 현실, 비현실을 떠나 자릿한 마음이 들었다.
<69세>의 영어 제목이 <An Old Lady>이다. 번역가와 상의하면서 정확히 알게 된 뉘앙스인데 우리에게 ‘올드’라는 단어에는 어떤 부정적인 의미가 담겨 있지만, 영어권 국가에서는 지혜가 많은, 삶의 경험이 많은 사람을 존중하는 의미가 훨씬 더 크다고 하더라.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기를. 세대 간의 벽이 무너져서 노인과 젊은 층이 좀 더 존중했으면 좋겠다. 그럼 서로가 덜 서글프지 않을까? 효정이 내민 그 한 발걸음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앞으로 나아가는 누군가의 발걸음이 있다면 어둠 속에 숨어 있는 피해자들이 연대할 수 있을 거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햇빛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주 더뎌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 모습을 관객들이 면밀히 들여다봐주기를 바랐다.

8월 20일 개봉 즈음 광화문에서 대규모 집회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개봉과 함께 사회적 거리 두기가 강화되는 등 현실적인 어려움이 닥쳤다. 
걱정이 되긴 했다. 나는 이 영화를 통해 노년 세대를 향한 우리의 편견을 깨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연령이 높다 보니 그 일 때문에 노인 혐오가 더 심해지는 건 아닐지. 그런 분노의 마음이 <69세>라는 제목의 영화 자체에 거부감과 피로감으로 작용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이 영화는 차별받는 한 여성의 이야기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여성 감독의 다부진 활약이 인상적이다. 어떻게 바라보나?
장편 감독 데뷔를 준비하면서 여성 감독들의 행보를 예의주시했다. 작년엔 <벌새>와 <메기>가 있었다. 당연히 반갑고 기쁜 마음이 크지만, 한 가지 아쉬운 건 예산 규모가 적은 독립 영화계에서만 여성 감독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거대 자본이 투입되는 상업 영화계에서는 아직도 여성 감독이 귀하다. 자연스럽게 물음표가 떠오른다. 아직 우리를 믿지 못하는 건가?

내일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개막한다. 한국 최초의 여성 감독인 박남옥 감독을 기리는 ‘박남옥 상’을 수상한다고. 당신에게도 여러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처음 <69세>를 알아봐준 영화제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제작 지원을 받았다. 그래서 의미가 남다르다. 포기하지 않고 끝끝내 완성해냈구나. 장편 데뷔가 좀 늦었는데 그래도 잘했다고 등 두드려주는 느낌이다. 언젠가 박남옥 감독님이 현장에 계신 사진 한 장을 봤다. 등에 아이를 업고 스태프들 먹이려고 손수 솥밥을 짓고 계시더라. 상의 무게를 고맙게 여기고, 다음 영화를 준비해야겠다. 멈추지 않기 위해서. 마음이 가는 이야기 하나를 계속 매만지고 있다.

 

조슬예 | 최종, 완성

<택시 운전사>를 각색하고 <잉투기>와 <가려진 시간>의 각본을 썼던 조슬예 감독은 전천후 이야기꾼이다. 9월 23일 개봉 예정인 <디바>는 그 시작일 뿐, 이제부터 완성해야 할 이야기가 더 많다고 한다.

잊고 있던 기억인데 2012년 미장센 단편영화제에서 당신의 단편 <열일곱, 그리고 여름>을 봤다. 영화제 자료를 찾아보니 공식 누적 관객 수가 351명이다.
쑥스러워진다.(웃음) 한국영화아카데미에 다닐 때 찍은 작품이다. 단편 작업을 주로 하던 시기다. 영화를 선택하고 단 한 번도 내 꿈을 의심한 적이 없는 사람인데, 단편을 찍으면서 영화 자체를 다시 생각했을 정도다. 자신감과 자존감이 되게 많이 낮아졌다. 단편영화와 나는 안 맞는 것으로 정리하고 말았지만.

어떤 점이 그렇게 안 맞았나?
단편영화는 순간의 감정이나 이미지를 포착해내는 능력이 중요하다. 앞뒤가 잘려나간 것 같은 짧은 러닝 타임이 전부인데 그것만으로 완결된 드라마를 다 본 것 같은 느낌을 줘야 한다. 나는 그 방식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 것 같다. 폭발력보다는 긴 시간 안에 캐릭터의 동선과 감정을 쌓으면서 다음 스테이지로 나아가는 장편 방식이 더 잘 맞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디바>는 당신의 장편 데뷔작이다. 마침내 때가 왔다.
2013년에 개봉한 <잉투기>의 각본을 엄태화 감독과 함께 썼다. 확실히 좋더라. 그때 글 쓰는 재미를 알았다. 꼭 감독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영화로 밥 벌어 먹고살면 족하다는 쪽이었기 때문에 그때부턴 작가 일을 주로 했다. <디바> 이전에 입봉할 기회가 있긴 했다. 3년 정도 준비했는데 투자가 잘되면 캐스팅이 어그러지고, 캐스팅이 잘되면 투자가 어그러지더라. 결국 엎어졌다.

긴 시간 끝에 거둔 결과다.
처음 제안은 각색 작업이었다. 유영선 감독님이 쓴 버전이 먼저 존재했는데 그 이야기는 공포 영화에 가까웠다. 제작사에서는 아름다운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가 되기를 바라고 내게 각색을 맡긴 거다. 어쩌다 보니 연출 기회가 왔다. 영화의 스토리를 처음 접했을 때부터 강렬하게 끌리는 게 있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이 영화와 끝까지 함께 가고 싶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랬지. 감독이 됐다는 기쁨보다는 이 영화가 드디어 세상에 나오게 된 게 더 기쁘다.

아직은 세상에 나오기 전이라 보진 못했다. 영화의 어떤 점이 당신의 마음을 그토록 강렬하게 잡아끌었는지 궁금하다.
우선 다이빙이라는 소재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다이빙의 매력은 다른 스포츠와 완전히 다르다. 찰나의 순간에 깊은 물속으로 추락한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물 밖에서의 정교하고 아름다운 이미지와 물속으로 추락하는 이미지가 가져다주는 어둡고 우울한 정서의 아이러니도 흥미롭다. 연출적인 측면에서는 물속과 물 밖을 한 화면에 보여줄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물속은 언제나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니까. 아름다우면서도 공포스럽다. 그리고 또….

그렇게 다 말해도 되나? 스포일러는 사절이다.
승자와 패자, 1등과 2등이 분명하게 나뉘는 스포츠의 습성도 녹이고 싶었다. 스포츠에는 필연적으로 경쟁과 열등감이라는 심리가 개입되기 마련이다. 열등감에 대해서는 내가 잘 안다. 늘 안고 살았기 때문이다.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 벽이 단단해 보이지만 실은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다이빙의 수직적 이미지를 보고 있으면 이게 떨어지는 건지, 올라가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바닥과 꼭대기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지금보다 나이를 먹으면 할 수 없는 이야기일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더 욕심이 났다.

배우 신민아가 6년 만에 선택한 영화라는 점이 세간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최근 모습을 보면 한결 자유로워진 느낌이 들기도 해서.
민아 선배는 연기 욕심이 정말 많은 사람이다. 매력적인 캐릭터에 목말라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작품의 좋고 나쁨을 떠나 ‘신민아’를 대상화한 캐릭터가 많았다고 생각한다. 원치 않게 덧씌워진 프레임이라고 할까. <디바>의 ‘이영’이라는 캐릭터는 주체성을 가지고 자신의 욕망을 충실히 밀어붙인다. 그런 캐릭터에 호감을 느끼고 출연해준 게 아닐까. 민아 선배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 많이 의지하며 촬영했다.

이야기를 만들고, 쓰는 일을 이어오고 있다. 궁금한 영역이다.
시나리오가 다른 글, 문학과 다른 건 최종본이 될 순 있지만, 글 자체로 완성본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시나리오와 100% 동일한 영화가 만들어질 순 없다. 영화를 하면서 가장 행복하다고 느낀 순간이 장편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하면서다. 그 시기를 기점으로 내가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어떤 점이 어떻게 달라졌나?
글이라는 게 그렇다. 쓰면 쓸수록 나를 들여다보게 된다. 그럴수록 세계의 중심이 결코 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여러 다양한 이야기를 쓰는 과정에서 이런 사람도 보이고, 저런 사람도 보인다. 그들을 통해 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된 것 같다. 성장과 치유를 경험하기도 했고. 자존감도 많이 높아졌다.

<소셜포비아>, <엽기적인 그녀2>, <가려진 시간>, <택시 운전사>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에 각본, 각색, 각본 개발 등으로 이름을 올렸다.
운이 좋기도 했고, 스스로 노력한 점도 있을 것이다. 매번 다른 걸 쓸 기회가 생겼다. 시도 자체를 즐겁게 생각하며 임하는 편이다. 다양한 이야기를 쓰다 보니 근력이 생겨서 어떤 글을 쓰더라도 어느 정도의 자신감을 갖고 나아갈 수 있게 되더라. 매번 “열심히 해볼게요”라는 인사를 전한다. 그때 태도가 중요한 것 같다. ‘잘 못 할 수도 있지만 열심히 할게요’가 아니라 ‘잘할 수 있어요. 열심히 하면 잘 나올 거예요’라는 태도로 임한다. 마음이 훨씬 건강하고 유연해지더라.

내 글, 내 이야기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는 건 어떤가?
<잉투기> 때 엄태화 감독과 치열하게 의견을 나눠가며 방향성을 확인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최종 그림을 그려보면 늘 엇갈리더라. 엄청 싸웠다.(웃음) 그때 함께 작업한 엄태화 감독이나 <소셜포비아>의 홍석재 감독이 다 동기다. 편한 사이다 보니 시나리오부터 후반 작업까지 감독과 직접 소통할 기회가 많았고, 영화가 완성되는 과정을 전부 지켜볼 수 있었다. 어디까지가 감독의 영역이고, 어디까지는 작가가 욕심을 내도 되는지 자연스럽게 공부가 됐다. 작가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것. 그게 시나리오의 재미다.

당신의 글은, 그러니까 이야기의 출발지는 어디인가?
<디바>는 다이빙이라는 소재가 중요했고, <가려진 시간>은 성인 남자와 소녀의 뒷모습이 담긴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됐다. 작품화되진 않았지만 <침묵>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어린아이가 죄를 고백하는 장면이 처음이었다. 그 다음은 캐릭터다. 내가 그리고자 하는 인물이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또 어떤 선택을 하는지 그게 중요하다. 캐릭터가 만들어지면 이야기나 동선이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디바>의 주연 배우, 제작자, 촬영감독은 모두 여성이다. 여성 감독, 여성 서사 같은 표현이 또 하나의 프레임으로 굳어지는 건 아닐지 조심스럽다. ‘여성’이라는 틀에 갇혀버릴까봐.
남성 감독이 주축이 된 시장에 여성 감독이 들어오고 있기 때문에 여성 감독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 같다. 더 다양한 이야기를 하는 여성 감독들이 유입되고 정착된다면 굳이 성별을 구분 짓는 표현은 사라지지 않을까. 여성 캐릭터도 더 적극적으로 변화해야 한다.

영화를 완성했다. 다음은 뭔가?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
<디바>를 찍느라 한동안 글을 못 썼더니 그립더라. 촬영 끝나고 실컷 썼다. 뭘 또 하기는 한다. 정해진 게 있다.

 

윤단비 | 끝여름의 성장

국내외 관객과 평단의 뜨거운 지지를 받는 <남매의 여름밤>을 연출한 윤단비 감독은 인위적인 사건보다는 자연스러운 정서를 담고 싶다. 그가 눈부신 여름날을 선물하고 떠나자마자 금세 가을이 왔다.

다사다난한 시절에 극장에 걸렸지만 잔잔한 여운을 남기며 관객을 모으고 있다. 뿌듯한가?
어려운 시기에도 극장을 찾아준 관객에게 고마운 마음이 크다. 시기를 생각하면 좀 더 복합적인 감정이 들긴 하지만. 이 영화가 타고난 운명이려니 생각한다. 그런 사주를 쥐고 태어났구나. 여러모로 쉽지 않은 상황이지만 자기 길을 잘 가고 있어서 기특하다. 나는 그저 뒤에서 묵묵히 응원하고 있다.

SNS에서 관객들의 반응을 살폈는데 흥미롭더라. 영화가 사람들의 곤두선 마음을 가만히 진정시키는 것 같았다.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내가 온전히 좋아하는, 내게 떳떳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다른 사람의 평가나 취향은 그 다음의 문제였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 자신의 어린 시절과 경험을 환기하거나 투영할 수 있기를 바랐다. 여백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작업해나갔는데 많이들 그 여백 때문에 이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다. 마음속에 품고 있던 각자의 기억을 상기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이 영화를 편안하게 생각하는 게 아닐까.

첫 장편 영화의 주인공으로 옥주와 그 가족을 선택한 이유는?
내가 많이 담겨 있다. 전에 몇 개의 단편을 만들었는데, 영화 속에 내가 직접 개입하거나 드러나는 방식으로 작업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내 이야기면서 내 이야기가 아닌 척, 쓸데없는 외피를 많이 두르게 되더라. 감독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영화에 담는 것일 텐데, 막상 나는 그런 용기를 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장편이니만큼 최대한 솔직하게, 가장 잘 아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어린 시절에 본 텔레비전 속 가족이 전부 화목해 보이길래 자주 놀랐다. 우리 집이 이상한 건가? 다들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데 우리 가족에게만 결함이 있는 걸까?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때의 마음을 영화로 담고 싶었다.

용기를 냈다는, 비로소 훌훌 털어냈다는 뜻으로 들린다.
다 맞는 말이다. 나를 드러내는 일, 내 이야기를 하는 게 두려웠던 것 같다. 영화를 완성하고 확실히 변했다. 한결 홀가분한 마음이다.

노스탤지어는 상처의 다른 말일지도 모른다. 특히 가족에 관한 노스탤지어는 더더욱. 아픈 기억일수록 미화되기 쉽다.
가족이라는 게 그런 존재인 것 같다. 영화에 등장하는 가족이 처한 상황이 마냥 행복하지는 않다. 모두 어떤 결핍을 안고 살지만, 특히 사춘기 고등학생 옥주에게 더 크고 아프고 이상하게 와 닿는다. 영화는 옥주의 시점에서 만들어졌다. 그건 곧 나의 지난날을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다. 어떻든 상처는 아물었고, 그 시간을 지나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다. 나름대로는 괜찮게 지내고 있다.

아빠와 고모를 바라보는 옥주의 눈에는 원망과 미움이 가득하다. 그 어른들이라고 딱히 악의가 있는 사람들도 아니다.
아빠와 함께 할아버지 집에서 지내게 된 남매 옥주와 동주, 거기에 고모까지 합세한다. 근데 이 어른들이 할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내려 하거나 자기들끼리 집을 파니 마니 하는 게 옥주 눈에는 비정해 보인 거다. ‘어쩌면 저렇게 이기적일 수 있지?’. 나이를 먹고 보니까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던 그 어른들을 연민하게 되더라.

인천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2층 양옥집과 콩국수를 말아 먹거나 수박을 쪼개 먹거나 마당 텃밭을 가꾸거나 하는 여름의 감각이야말로 영화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는 제3의 주인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그 집을 보자마자 반해버렸다. 공간 자체에 이미 캐릭터가 깃들어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캐릭터를 제거하기보단 그대로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집에 맞게 원래의 시나리오를 고친 부분도 많다. 계절은 처음부터 여름이어야만 했다. 아버지는 신발을 팔러 다니고, 옥주가 자전거를 타고 내달리는데 춥고 삭막한 겨울 풍경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으니까. 근데 영화의 마지막은 겨울이어도 좋을 것 같았다. 시간이 좀 흐른 다음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에 대해서 오랫동안 고민했다.

개인적인 취향이긴 하지만 마지막이 겨울이었다면 영화를 향한 애정이 지금보다 덜했을 거다.
그렇다면 다행이다.(웃음) 감독으로서 계절의 변화를 담고 싶다는 단순한 욕심이었는지도 모른다. 가만히 생각해봤다. 시간이 흘러도 가족은 그 자리에서 그렇게 살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더라. 아무런 변화 없이 똑같이.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게 맞을까 싶어 그만뒀다.

여름밤, 평상에 앉은 아빠가 고모에게 대뜸 그런다. “찬 바람 불면 서글퍼지더라”. 갑자기 뚝 떨어진 장면이 여기에 남아 있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뭐 하나를 더 아끼진 않는다. 여름이 버겁게 느껴질 땐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이고, 겨울에는 고독함이 더 크게 와 닿는다. 어둑해질 무렵 창밖의 다른 집 불빛만 봐도 다 행복해 보이는데 나만 덩그러니 놓인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영화를 찍기 전에 스태프들 사이에서 그 장면이 맥락과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 뜬금없는 마음이 좋았다. 그게 진짜 아빠의 마음이라고 생각했거든. 다행히 완성된 영화를 보고 나서는 스태프들이 시나리오에서는 느끼지 못한 어떤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라고 말해줘서 안도했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여름의 끝자락에 이런 이야기를 나누니까 진짜 좀 쓸쓸해지는 것 같기도 하네.

어른이 되기 전까지 광주광역시에서 산 것으로 안다. 그곳에는 현존하는 유일한 단관 극장 ‘광주 극장’이 있다.
거기서 처음 영화라는 친구를 알게 됐다. 크고 오래된 극장인데 어떤 날은 2~3명의 관객이 객석을 지킬 때도 있었다. 겨울에는 난방이 제대로 안 되는지 보온병을 안고 영화를 봐야 할 정도인데, 누구 말마따나 꼭 무등산 정상에서 영화 보는 느낌이 들 정도다.(웃음) 거기에 있는 시간이 너무 좋았다. 광주에서 나고 자라면 뭔가 그런 게 있다. 대학은 광주의 국립대에 진학해서 거기서 직장 다니고 결혼해서 평생 살아야 할 것 같은, 그게 당연한 거라는 인식이 있다. 그 암묵적인 분위기가 무서웠다. 거창하진 않더라도 무언가를 창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광주 극장에서 틀어주는 영화들이 지적 허영심을 충족해준 게 사실이다. 남다른 취향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 거기서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 이미 멋있는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으니까. 영화를 다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었다.(웃음)

당신에게 영화는 어떤 존재인가? 오글거리는 답도 좋다.
영화는 내 삶의 전부다. 누군가에게 영화는 단순한 오락이나 잠깐의 일탈일 수 있겠지만, 내게는 정체성 그 자체다. 처음 <앙리 랑글루아의 유령>을 보고 놀랐다. 전쟁 통에서 필름을 지키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을 보고 저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준 건 내 주변에 가득한 영화의 유령들이다. 그들이 항상 내 곁에 있다. 그 영화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나저나 옥주와 그 가족은 지금 행복할까?
글쎄, 행복할 것 같다. 어쨌든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고 있을 거로 생각한다. 지금 내가 그런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