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걸 다 바꿔버리겠다던 테크노 전사에서 만능 간장 전도사로 나선 오늘날까지, 이정현의 얼굴은 단 하루도 같은 날이 없었다. 여전히 목이 마르다고 한다.

 

레이스 장식의 벌룬 미니 드레스는 미우미우 (Miu Miu), 얼굴에 연출한 플라워 모티브의 초커는 파비아나 필리피 (Fabiana Filippi).

어제 영화 <반도>의 마지막 무대인사가 있었죠.
건대 롯데 시네마에서 마지막으로 관객들을 만났어요. 끝나고 근처 중국집에 가서 함께한 배우, 스태프와 먹고 마셨죠. 우리나라뿐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개봉했거든요. 코로나19로 영업을 중단한 캐나다에서는 <반도>를 시작으로 영업을 재개했대요. 캐나다 박스 오피스 1위 소식도 들려온 터라 분위기가 좋았어요. 곧 미국에서도 개봉하는데 잘됐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훌륭한 한국 영화가 다양한 곳에 소개될 테니까요.

영화를 보면서 마지막 몇 분, 당신이 연기한 ‘민정’의 얼굴이 영화의 분위기를 완전히 전환한다고 생각했어요. ‘이정현’이라는 이름의 존재감을 새삼 생각하게 됐고요.
아우, 저 그런 말 들으면 너무 좋아요. 감사해요.(웃음)

두 딸을 위해 무조건 희생하는 모성애로 마무리하는 듯하더니, 이내 좀 다른 선택을 해요. 
그 해피 엔딩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민정’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 기억나세요? 되게 평범한 사람이거든요. 좀비가 내 자식을 위협하는 세상이 되니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요. 강인한 전투력과 생존력이 생긴 건 엄마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아이들이 없었다면 좀비가 됐거나 631부대 사람들처럼 괴물로 변했을 거예요.

당신을 생각하면 막연히 떠오르는 이미지가 좀 있죠. 영화 <꽃잎>, <파란만장>,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등을 통해 본 어떤 식의 광기, 세기말 테크노 전사, 모던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주방에서 만능 간장을 만드는 모습까지.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그게 이정현이죠. 다 저예요. 제 진짜 모습과 그간 맡은 역할 때문에 생긴 배우로서의 이미지가 섞여 있는 거 같아요.(웃음) 취향이 다양하기도 해요.
워낙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랐고요. 위로 언니만 4명인데 어릴 때부터 같이 모여서 마이클 잭슨이나 마돈나의 노래를 들었어요. 아버지가 LP를 수집하셨거든요. 음악이 끊이지 않았고, 늘 왁자했어요. 엄마는 저희를 자유롭게 키우셨어요. 시험 기간에 늦게까지 공부하고 있으면 들어오셔서 불 끄고 나가세요. “공부 못 해도 된다. 잘 놀고 잘 먹고 건강하면 돼.”

플라워 패턴의 블랙 컬러 시스루 타이 블라우스와 옐로 컬러 슬립 원피스는 MSGM 바이 한스타일닷컴(MSGM by Hanstyle.com).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하네요.
소중한 존재니까요. 제가 감정의 진폭이 큰 역할을 주로 맡았잖아요. 작품을 찍는 동안 역할의 기운이 저에게 스며들 수도 있는데 다행히 그런 적이 없어요. 영화 찍고 와서 폼 좀 잡아볼까 하면 “야 빨리 와서 밥 먹어!” 그런 소리가 막 들렸거든요.(웃음) 집이 늘 시끄럽고 정신없는 분위기니까 처지고 우울하고 그럴 겨를이 없더라고요.

세기말과 테크노에 관한 언급을 빼놓을 순 없어요.
열여섯 살에 <꽃잎>을 찍었어요. 후반 작업을 호주에서 했는데 그때 처음 해외에 갔어요. 레코드 숍에 갔는데 천국이더라고요. 당시 우리나라에는 수입되지 않던 인도 음악이니 제3세계 음악이니 그런 걸 듣고 완전 충격받았죠. 그때부터 좀 다른 음악에 끌렸던 거 같아요. 대학에 가자마자 학과 친구들이랑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가서 처음 테크노를 듣고 ‘이건 또 뭐지?’ 싶더라고요. 완전 반했어요. 원래 제대로 된 테크노를 하고 싶었는데 어느 순간 한국식 멜로디가 더해지고 하면서 ‘와’나 ‘바꿔’가 나온 거예요.

1999년의 일이죠. 그 엄청난 비주얼이 전부 당신의 아이디어라면서요?
여자 가수들이 할 수 있는 콘셉트가 정해져 있었어요. 마냥 예쁜 거, 예쁜 사이보그 콘셉트가 유행이었는데 회사에서는 저도 그렇게 하기를 바랐죠. 남들이랑 똑같은 건 하기 싫더라고요. 아예 방향을 틀어서 가장 동양적인 이미지를 선보였어요. 처음엔 반응이 없어서 망했구나, 싶었는데 첫 무대를 하고 3일 뒤에 딱 터지더라고요. 그 다음부턴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했어요.(웃음)

가수로 승승장구할 때도 당신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연기’가 꿈틀대고 있었던 건가요?
전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가수 이미지가 너무 강했는지 한국에서는 일이 없더라고요. 중국과 일본에서는 드라마를 많이 했어요. 본의 아니게 긴 공백이 생겨버렸죠. 늘 연기에 목마른 상태였는데, 2011년에 우연히 사석에서 박찬욱 감독님을 만나게 됐어요. ‘너무 좋은 배우인데 은퇴한 줄 알았다, 꼭 다시 연기하면 좋겠다’ 고 하시더라고요. 그 만남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감독님의 단편 영화에 불러주셨어요.

플라워 패턴의 실크 슬리브리스 톱과 슬릿 스커트는 가니 바이 비이커(Ganni by Beaker).

박찬욱, 박찬경 형제가 아이폰4로 찍은 단편 영화 <파란만장>이죠. 극장에서 봤어요.
어머, 그거 정식 개봉한 영화가 아니라 극장에서 본 사람이 귀한데 뭘 좀 아시네요.(웃음) 베를린 영화제에서 단편 황금곰상도 받았어요. 그 작품을 계기로 다시 한국 영화계에 발을 들이게 됐어요.

아주 작은 영화와 아주 큰 영화에 번갈아가며 출연하는 이유가 있어요?
그런 계산은 못 해요. 다양성 영화든 주류 상업영화든 영화라는 본질은 같아요. 서로 좋은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생각해요. 다양성 영화가 용감한 소재나 이야기를 과감하게 쓰는 것도 좋고요. 배우에게 다양한 연기를 시도할 수 있는 현장은 늘 소중하니까 규모에 상관없이 좋은 작품에 참여하는 것뿐이에요.

작은 영화에 출연할 땐 출연료를 안 받거나 스태프의 밥을 사기도 한다면서요?
예산이 빠듯하니까 스태프들이 밥도 못 먹고 촬영할 때가 있었어요. 마음이 아프잖아요. 그 정도는 기꺼이 할 수 있어요. 다 제 돈으로 해요. 회사 돈 아니고.(웃음)

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엄마 닮아서요. 엄마가 바라는 거 없이 퍼주는 분이세요. 음식을 잘하세요. 가족, 친척, 누구의 친구들 다 불러서 맛있는 거 해 먹이는 걸 좋아하셨어요. 김장도 막 300포기씩 해서 다 나눠주고요. 그걸 보고 배운 거 같아요. 받는 거보다 주는 게 좋아요.

요리도 엄마에게 배운 건가요?
그럼요. 저도 엄마처럼 요리하는 걸 너무 좋아해요. 친구들 불러서 맛있는 거 해주는 것도 좋고요. 스트레스가 풀려요. 매주 목요일 저녁에 엄마랑 앉아서 <한국인의 밥상> 보는 게 제 힐링 타임이에요.(웃음) 도마에 칼질하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 없어요.

<반도>도 그렇고, 9월에 개봉하는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등 기회가 닿을 때마다 여성 캐릭터가 주체가 되는 영화를 선택했어요.
감독님들이 볼 때 제 이미지에 강인한 면이 있나 봐요. 주체적인 캐릭터를 많이 제안하세요. 여자가 주인공인 영화가 더 많아져야 한다는 건 모두가 동의하는 지점일 거예요. 여자가 주인공인 상업 영화를 제대로 해보고 싶어요. 흥행에 초점을 맞춘 영화요. 그런 영화들이 잘되면 여성 영화인에게 더 많이, 다양한 기회가 돌아갈 테니까요.

능력 있는 여성 영화인을 모아 작품을 만들어보는 건 어때요? 제작자나 기획자로 나서서.
흥미롭긴 하겠네요. 지금은 작품이 계속 들어오고 있어서 어렵지만, 여유가 생긴다면 도전해보고 싶어요. 윤가은 감독을 아주 좋아해요. 단편 <콩나물> 때부터 너무 좋아했어요. 함께 작업하면 좋겠는데 그분은 주로 아이들과만 작업하더라고요.(웃음)

작품이 계속 들어와요? 꿈꾸던 일이 벌어졌네요?
너무 행복해요. 촬영장 갈 때마다 감사한 마음이에요. 참여하고 있는 작품에 진심을 다하고 있어요. 진짜 잘, 열심히 하고 싶어요.

개봉을 앞둔 영화가 있고, 촬영 중인 영화도 있죠. 어때요?
9월에 개봉하는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은 <시실리 2Km>를 만든 신정원 감독의 작품이에요. 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죽이는데, 이 남자가 안 죽고 다시 살아나는 거예요. 정말 엉뚱하고, 한국 영화에서 처음 보는 캐릭터예요. 지금은 <리미트>라는 영화를 찍고 있어요. 여자 경찰을 연기하는데, 역시나 전혀 새로운 여자 경찰 캐릭터를 볼 수 있을 거예요.

늘 새로운 길을 걷고 싶어요?
기존의 것과 다른 시도를 하는 건 재미있는 도전이잖아요. 저는 계획하지 않아요. 기대도 하지 않아요. 그때그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거예요. 좀 단순하게. 그래야 미련이 없어요.

영화가, 연기가 왜 그렇게 좋아요?
그냥. 좋아하는 거에 이유가 있을까요? 전 현장을 사랑하는 거 같아요. 현장에 있을 때가 그렇게 좋아요. 내 연기와 작품으로 관객 마음을 움직였을 땐 어떤 쾌감을 느껴요. 저는 아직도 연기에 갈증을 느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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