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연수가 ‘불행’을 응시한다. 7년 만의 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은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다.

 

7년 만에 소설을 출간하며, 네이버 오디오클립에 ‘오디오 연재’라는 독특한 방식을 취했어요. 직접 낭독을 했고요.
500매 분량의 시 같은 소설을 쓰려고 했어요. 뒷부분은 연재를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처음엔 제가 직접 낭독을 하는 게 꺼려졌어요. 그러다 코로나가 터지면서 사회적 분위기가 위축되었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제가 직접 낭독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겠냐 하길래 설득당했죠. 그럼 한번 해보자, 안 해봤으니까.

해보니 어땠어요?
녹음하는 동안에 생각이 바뀌었어요. 제 작품이니까 읽기가 확실히 쉽더라고요. 어디서 끊어야 할지를 다 아니까요. 다른 사람이 하면 다르게 끊을 테니 의미가 달라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중간에 백석이 쓴 글이 있는데 저도 그걸 녹음할 때 실수를 엄청 했어요. 어렵기도 하고 제가 쓴 글이 아니니까 호흡이 안 맞더라고요. ‘백석 부분은 백석이 직접 해야겠구나….’

문학 관련 플랫폼도 많이 달라졌어요. 문예지에 연재하던 기존 방식이 웹사이트나 블로그를 지나 ‘오디오 연재’까지 왔으니 말이죠. 홍보채널도 팟캐스트, 인스타라이브, 유튜브로 바뀌었죠.
사람들이 어떻게 듣나를 생각해봤어요. 들으니까 손발이 자유롭잖아요. 주로 산책을 하거나 이동 중에 듣더라고요. 제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상황에서 소설을 듣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도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구나’라는 발견을 한 거죠. 그리고 두세 번씩 듣더라고요. 그게 제일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어요. 제 소설을 두세 번씩 읽어줬으면 했지만, 겨우 읽어냈는데 어떻게 몇 번씩 읽겠어요. 그런데 녹음을 하니까 사람들이 여러 번 듣기도 하고 책이 나오면 다시 깊이 있게 읽어주고요.

새로운 독자층이 생긴 걸까요? 아니면 기존 독자들이 오디오까지 듣는 걸까요?
댓글을 보면 일단 낯익은 분들이 많아요. 그분들 말고 드러나지 않는 분들도 많겠죠? 한 번씩 들어본 분들은 있겠죠. 1~2화는 굉장히 많이 듣잖아요? 그런 식으로 접하는 분들은 새로운 독자일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른 작가들에게도 오디오 연재를 권해주고 싶나요?
권하고 싶어요. 유튜브와는 또 다르죠. 저는 유튜브에 나가서 ‘영상화’하는 것에는 거부감이 있어요. 이건 텍스트가 음성으로만 나가는 것일 뿐, 연기를 하는 것은 아니죠. 때문에 책이 가진 것을 그대로 가지고 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영국에 있을 때 BBC 라디오를 들어보면, <전쟁과 평화> 같은 걸 쭉 낭독하더라고요. 몇 주 동안 무미건조하게 낭독만 하는데, 그게 부럽기도 했었어요. 우리나라도 그런 방송이 있으면 듣고 싶었어요.

본래 단편으로 쓴 작품이라는 게 흥미롭네요. 어떻게 뻗어나간 건가요?
길게 쓰고 있는 소설이 있는데, 그건 계속 붙잡고 가고 있어요. 10년 전에 연재를 시작했었는데 끝이 안 났어요. 끝을 못 낸 상태로 가지고 있어요. 다른 긴 작업을 할 수가 없어서 단편으로 조금씩 썼죠. 사람들이 연작임을 알 수 있게 ‘기행’을 주인공으로 해서 단편을 세 편 정도 발표해놓았죠. 그걸 장편으로 썼어요. 길게 가는 프로젝트는 잠깐 쉬고.

작가들은 연재를 계속 이어가지만, 단행본으로 나와야 책이라고 인식하는 독자가 대다수일 거예요. 7년을 어떻게 보냈어요?
2013년에 단편집을 냈고 2014년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죠. 시급하게 그 일에 대해 써야겠다는 욕구가 많이 일었어요. 그해 겨울부터 단편 소설로 그 이야기를 계속 썼고, 산문을 많이 썼죠. 시간이 그렇게 빨리 지나갔어요. 책을 내는 것과 쓰는 건 약간 다른데요. ‘쓰는 행위’는 빨리 써서 그 시절의 발언을 해야 하거나 독자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해요. 책을 낼 때는 완성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출판하려면 조금 더 다른 게 필요하다는 저의 기준이 있는 거죠. 그래서 그때 썼던 글들은 그대로 남아 있어요. 출판사에서는 그걸 단편으로 묶어내자고 얘기했는데 저는 글쎄… 하고 있는 상황이에요.

아직 뭔가가 비어져 있는 느낌이군요.
네, 책이 되기에는 조금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시간이 지나며 시의성이 없어지면서 글이 어떻게 이해될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그렇게 지내온 것 같아요, 2014년부터 2018년까지는.

김연수와 김연수의 소설은 청춘이기도 하고 청춘의 표상 같기도 했어요. 그사이 독자도 작가도 시간이 흘렀고요. 앞으로는 어떻게 흘러갈까요?
같이 늙어가는데요.(웃음) 인생은 굴곡이 있더라고요. 마흔이 되면서부터 생각해야 할 일들이 많이 생겼어요. 돌아가신 분도 계시고 아픈 사람도 있고… 또 사회적인 일들도 있죠. 세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 어쨌든 우리가 문학을 계속 하는 건, 세상에 대한 우리의 해석을 내놓고, 긍정을 갖고 그걸로 힘을 얻어서 살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매우 해석하기 어려운 상황이 많았어요. 비관적으로 보고 있는 제 자신도 인정을 해야 되겠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더라고요. 저는 제 자신이 망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웃음)

그러한 상황에서, 왜 백석이었나요?
비관적이지만 어쨌든 끝까지 가보자 해서 계속 썼어요. 비관이면 비관을 쓰고, 낙관이면 낙관을 쓰고, 절에도 가보고요. 그걸 지나고 나니까 또 다른 게 열리더라고요. 저는 이 소설을 쓰면서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쓰는 도중에 위로를 받았죠. 백석이라는 사람도 되게 비관적인 사람이었어요. 백석이 망가져가는 과정이 있어요. 이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굴복하는 방법 하나가 있었는데, 약한, 작은 굴복이죠. 그런데 이 사람은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가버리는 거예요. 사회에 굴복을 안 하고 문명 전체에 굴복해버린 셈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제 판단으로는 시를 쓰지 않겠다. 시를 쓰지 않으면 그냥 죽어야 하는데 자살은 안 했어요. 34년을 더 살았단 말이죠. 그래서 이게 뭔가를 생각해보면 어떤 세계가 망했어요. 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데도 끝이 안 났어요. 그 세계가 남아 있는 거죠. 그 남아 있는 세계를 이 사람은 보기 시작한 거죠.

형벌 같기도 하네요.
형벌 같은데 그 새로운 세계가 열린 거죠. 열려서 자기 앞에 있는, 자기가 지금까지 알던 세계는 스스로 문을 닫았음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은 사람에게는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그 세계를 살겠다는 의지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의지에 저는 주목하게 됐어요. 자료를 뒤져봤더니 6.25전쟁 끝나고 나서 사람들이 정말 동물처럼 살고 있더라고요. 그런데도 사람들이 어쨌든 세상을 계속 만들어가더라고요. 평범한 사람들의 힘. 그 힘은 본능적인, 살려는 힘 같은 느낌이었어요. 예전에는 그런 힘에 대해서 주목을 못 했어요. 사람들이 살려는 힘은 정치체제나 사회적 압력보다 훨씬 강하구나 하는 걸 깨닫게 됐죠. 이 중년에 깨달으니까 아, 정말 대단하다… .(웃음)

‘나는 왜 시를 다시 시작했을까’ 이 대목을 여러 번 반복했어요. 불행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하죠.
잃어버린 게 많은 사람이니까요. 자신이 잃어버린 걸 다 시로 남겨놓은 건데 시는 남는데 대상은 다 없으니까 사람으로서는 불행하다고 생각해요. 백석이 불행한 사람이라고 하면 많은 분들이 동의를 못 하세요. 저의 관점으로는 되게 불행한 사람이에요. 인생을 일찌감치 실패한 사람에 가깝거든요. 그런 와중에 시들이 나왔잖아요. 시인으로서는 불행하다고 볼 수 없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불행하죠.

구성과 기법 면에서는 굉장히 소설 같은 작품이죠. 달리 말하자면, 요즘 많이 읽히는 소설과는 다른 작품이고요. 최근 트렌드를 따라가야 된다는 압박은 없었나요?
제가 등장할 때부터 소설 자체가 조금 가벼워야 한다. 영화처럼 써야 한다, 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그땐 제가 어렸으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난 내 걸 할 거야’ 하는 게 가능해서 그런 글을 썼어요. 2015년부터 문단에 여러 변화가 생겼죠. 저도 나이가 들었고요. 나이가 드니까 도태된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제 또래의 모든 작가가 그런 고민을 하더라고요. ‘저런 식으로 글을 써야 하나? 저런 식으로 활동을 해야 하는 건가?’ 하는 고민이 저도 깊었고요.

모두가 같은 고민을 하는 거군요. 독자도 같은 고민을 할 거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20대 독자라면 어떨까요? 이 소설을 좋아할까요?
젊었을 때는 안 읽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이 들었는데 아무도 안 읽어주면 쓸쓸할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저도 디킨스는 지금도 읽어요. 서사를 짜서 이야기를 긴장시키고 좀 풀어주고 상징을 깔고… 그런 문학적인 작업을 배웠고 저도 그런 소설들을 읽었고요. 그리고 저는 오랫동안 선배 소설가들이 일구어왔던 문학적인 기술이 있다고 믿거든요. 이게 지금 와서 없어질까? 이건 계속 갈 것이다. 디킨스 소설 같은 건 21세기에도 계속 있을 거라고 믿고 있어요. 그런데 불안하긴 해요. 불안하다가 ‘아니야… 20대 독자들도 그걸 읽을 거야…’라고 생각하고 가기로 한 거죠. 소설에서 바뀌지 않아야 할 부분은 분명히 있어요. 그건 제가 양보를 못 하겠어요. 망하고 아무도 안 읽더라도….(웃음)

한편으로는 독자를 믿고 있는 것 같은데요?
드라마의 캐릭터와 소설의 캐릭터는 다르거든요. 사람들은 다 이야기로만 생각하니까 소설 캐릭터가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거죠. 하지만 소설의 독자들은 소설의 전통 안에서 지금 소설을 읽고 있어요. 그 사람들이 없어질 수 없다고 생각해요.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 존재하고 있어요.

<일곱 해의 마지막>을 보면 아무래도 2001년의 <굳빠이 이상>이 떠오릅니다. 그때와 지금 당신은 어떻게 달라졌나요?
그때는 나이가 어렸고, 쓰고 싶다는 욕망이 굉장히 강했을 때예요. 저의 자아가 컸을 때…비대했죠.(웃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 보여주고 싶다. 그래서 더 표현을 많이 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이상 같은 사람에게 끌렸던 거죠. 자아를 키워서 키운 자아 때문에 실제 자아가 사라지는 형태니까. ‘저 사람은 어떻게 해서 한국문학사에 명작이 됐을까? 당대의 평가가 안 좋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를 못 하는데 어떻게 저 위치에 올랐을까?’가 그때 저의 궁금증이었고요. 지금은 저의 자아가 작아져서 소설을 쓰는 데 방해가 되고 있다고 생각해요. <굳빠이 이상>으로 치자면 이야기의 흐름이 깨지더라도 제가 깨달은 것들은 그냥 막 넣었어요. 과유불급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소설의 완성된 흐름이 중요하기 때문에 저의 시시한 깨달음은 안 들어갔으면 좋겠어요. 저의 자아가 없이 기능적인 소설만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지금은 해요. 그것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있어요. 내가 쓰지 않고 받아 적는 몸에 가까운 거죠. 그냥 막 받아 적기만 할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웃음) 그런데 그건 안 되니까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을까 많이 생각해요. 백석의 이야기와 어울리는 생각이었어요.

작아지다 못해 소멸되면 어떤 이야기가 나올까요?
언제가 되면 소설이 안 써질 수도 있겠죠. 마음에도 안 들고. 맘에 안 들지만 ‘나이가 들면 그런 거지’ 하면서 낼 수도 있겠죠. 그걸 안 하는 게 작가로서 최종적인 완성이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굳빠이 이상>을 쓸 때는 서른한 살 이었어요. ‘너무 쓰고 싶어, 틈만 나면 쓸 거야’로 시작했죠. 마지막은 안 써야 되겠다, 이걸로 끝이 날 거 같아요. 쓰고 싶은 게 있어도 그건 쓰면 안 된다.

<일곱 해의 마지막>과 맞닿아 있는 이야기네요.
초반에는 일만 했던 것 같아요. 그때는 정신없었어요. 책 내는 게 너무 좋아서 1년에 두 권씩 내다가 브레이크가 걸렸죠. 안 쓸 수 있는 힘이 진짜, 마지막, 최종 단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기뻐요. 저만 늙어가는 게 아니라 독자와 함께 늙어가고 같은 일을 겪는다고 생각하면 아주 기쁩니다.(웃음) 이제부터 잘 늙어가야죠. 잘 늙어가고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NEW BOOK 

<하틀랜드> 

코로나 시대는 외면하고 싶었던 계급의 문제를 수면 밖으로 꺼내놓았다. 가장 위험한 사람들은 매일 현장으로 향하는 노동자다. <하틀랜드>는 그중에서도 미국의 ‘가난한 백인 여성 계급’의 빈곤 문제를 냉정하게 들여다본다. 캔자스주의 농장에서 태어난 저자는 10대 임신이야말로 빈곤의 사슬이었다고 말한다. 저자의 어머니, 할머니, 증조할머니도 그러했다. 가난이라는 개인적 경험을 통해 담론을 확장해가는 뛰어난 논픽션이다.
저자 세라 스마시 출판 반비

 

<우아한 가난의 시대> 

작년, ‘우아한 가난의 시대’라는 패션 매거진의 글이 SNS에서 화제를 모았다. 매거진 에디터인 내게 그 칼럼은 으레 보던 그런 내용이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의문을 제기했다. 가난은 그리 쉽게 말하면 안 되는 거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말에도 동의할 수 있었다. 그 칼럼을 썼던 김지선 에디터는 자신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빈곤감의 실체’였다고 말하며 여전히 ‘풍요’를 꿈꾸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런 고백에 하나의 칼럼은 부족했고, 저자는 한 권의 책을 오롯이 할애했다. 망할지언정, 순간을 풍요롭게 살고 싶은 사람을 위하여.
저자 김지선 출판 언유주얼

 

<루스벨트 게임> 

<한자와 나오키>의 작가 이케이도 준이 이번에는 기업 소속 사회인 야구팀을 빌려 경영을 말한다. 물론 이번에도 팀은 연패에 빠져 있고, 해체하라는 요구도 거세다. 존재를 증명하려면 우승밖에 길이 없어 보인다. <스토브리그>, <머니볼>처럼 야구로 경영을 말하는 콘텐츠는 꾸준히 있어왔다. <루스벨트 게임>의 스케일은 이보다는 작을지 모르나 작은 팀, 나아가 개인이라도 경영은 필요함을 말해준다.
저자 이케이도 준 출판 인플루언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