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이 장기화되면서 바이러스 방역 못지않게 심리적 방역의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코로나19보다 더 빠른 속도로 퍼지는 ‘코로나 블루’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코로나19’ 확진자가 되는 꿈을 꿨다. 곧 잠에서 깼지만 잔영은 한참 남았다. 기저 질환이 있는 가족이 나 때문에 확진 판정을 받는 상상, 그 밖에 떠오르는 절망적 상황들… 나쁜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질 뻔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상념에 젖을 시간이 없어서 극단적 장면까지 그리진 못했다. 그래도 가끔 무서운 뉴스를 볼 때마다 그 섬뜩했던 기분이 현실처럼 생생하게 올라온다.

지금 이런 감정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대다수가 SNS 피드에 우울과 불안, 무기력, 의심, 분노의 말들을 끊임없이 쏟아낸다. 이성을 발휘해 정제한 언어 사이에서 거친 감정과 발언이 부쩍 더 자주 보인다. 고강도 사회적 거리 두기 운동 연장 논쟁이 정점을 찍었던 4월 첫 주엔 ‘지난 주말 서울 한강공원 방문객 수 143만 명’이라는 뉴스에 분통을 터뜨리며 이럴 바엔 그냥 우리나라도 락다운(Lockdown)하자는 주장,

긴 고립으로 인한 외로움, 두려움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눈물이 난다는 글 등이 타임라인을 잠식했다. 이탈리아 사람들의 발코니 합주회, 브루클린 젊은이들의 옥상 원격 데이트 같은 뉴스를 실어 나르던 이들도 이젠 천문학적 수치의 감염자와 사망자 집계를 RT하고 있다. 이쯤 되면 ‘집단 면역력’은커녕, ‘집단 우울증’을 염려해야 하는 상황 아닌가? 팬데믹의 장기화로 생긴 우울감, 무기력증을 뜻하는 ‘코로나 블루(Corona Blue)’가 COVID-19보다 더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나도 ‘코로나 블루’일까?

시사상식사전에서 설명하는 ‘코로나 블루’의 증상은 이렇다. 외부 활동을 자제하고 실내에 머무르면서 생기는 답답함, 자신도 코로나19에 감염될 수 있다는 불안감, 작은 증상에도 ‘코로나가 아닐까’ 걱정하는 두려움, 활동 제약이 계속되면서 느끼는 무기력증, 감염병 관련 정보와 뉴스에 대한 과도한 집착, 주변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 증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민간 요법에 대한 맹신. 굳이 요연하게 나열하지 않아도 모두가 한 번쯤 겪었거나 겪고 있는 감정들이다. 궁금한 건 사실 증상이 아니라 대응이다. 남들도 다 그러니까 그냥 참고 견뎌야 하나? 일시적인 우울감인가? 이 정도 기복이면 의사를 만나야 하는 거 아닌가?

구로 연세 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박종석 원장은 감염병 유행과 같은 재난이 일어났을 때 불안, 우울, 위축, 무기력, 외로움, 공허감 등을 느끼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말한다. 다만 이 감정들을 기본적인 심리 방역 지침으로도 조절할 수 없을 때, 아래 체크리스트의 증상들이 나타나고 있다면 자신의 상태를 직시하고 상담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CHECK LIST

• 미래에 대한 불안이 심하게 증폭되거나 ‘전 세계 경제가 다 무너질 것이다’와 같은 극단적인 생각을 멈출 수 없다.
감염 우려로 아예 외출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불안 강박에 시달린다.
손을 지나치게 자주 씻거나 모든 물건을 알코올 소독제로 닦는 등 오염 강박이 심해진다.
가족,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화를 낸다
모든 사람을 의심한다.
불면증이 지속된다.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든다.

부정적 감정에 스스로 대항하는 법

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지난 3월 ‘코로나19 심리 방역을 위한 마음 건강 지침’을 만들었다. 국민, 자가 격리자, 의료진 등 대상을 세분화해 만든 가이드 중 가장 기본적인 지침은 자신의 ‘불안’을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또 출처가 명확한 정보 선별에 우선순위를 두고 뉴스, SNS를 시간 정해두고 보기, 특정인과 집단에 대한 인신 공격, 혐오 멈추기, 자신의 감정과 몸의 반응을 주시하고 신종 전염병이 가질 수밖에 없는 변수와 불확실한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온라인을 통한 가족 친구 동료와의 지속적 소통,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끼는 활동 하기, 규칙적 생활 유지, 취약 계층에 대한 관심과 도움, 사회적 신뢰와 연대감 등이 마음 건강을 돌보는 데 도움이 된다고 안내한다. 국가 트라우마 센터에서도 감염병 스트레스 대처법으로 믿을 만한 정보에 집중하기, 가족, 친구, 동료와 소통하며 힘든 감정 나누기, 자신의 상태가 심각하다고 느끼면 정신건강 전문가 도움받기 등을 제시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지침을 인지하고도 잘 조절되지 않는 감정에 있다. 회사원 김지현(29세, 가명) 씨는 특히 강박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 “모든 정보를 다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끊임없이 뉴스를 체크해요. 저만 위생 수칙을 지키면 소용없기 때문에 가족, 회사 동료들에게도 에탄올 소독제를 사서 나눠줬고요. 밖에 나갔다 오면 휴대폰, 책상, 키보드, 마우스 등 손에 닿는 걸 다 닦아야 그나마 마음이 좀 놓여요. 밖에서 밥을 먹는 건 어불성설이고요. 통에 든 수저며, 컵이며… 누구 손이 닿았는지 알 수가 없잖아요. 사람들이 유난 좀 그만 떨라고 하는데, 저는 오히려 태연한 사람들이 더 이상해 보여요. 그냥 포기한 건가?” 박종석 원장은 자신이 이런 심리 상태인 경우 감염병이 가져오는 위험을 수용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설명한다.

“성급한 일반화나 파국적인 사고 등 지나치게 부정적인 인지 왜곡을 스스로 멈추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전염, 감염의 위험에 노출된 건 모두 다 마찬가지니까요. 지나친 불안, 완벽 강박은 오히려 자신의 일상과 마음의 균형을 무너뜨린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그럴 때일수록 코로나19와 관련된 뉴스, 정보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좋습니다. 손 씻기, 오염 등에 대한 강박 사고가 지나치게 심해지면 진짜 손을 씻는 대신, 손을 씻고 싶은 충동이 일 때마다 메모지에 正자로 체크해보세요. 10번이 넘어가면 하던 일을 멈추고 영화를 보거나 게임 등을 하며 손 씻기에 집착하는 전두엽을 다른 주제로 전환시킴으로써 휴식, 환기를 시켜줄 필요가 있습니다.”

장기간 사회적으로 고립되면서 우울, 불안감을 넘어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는 이들도 많다. 특히 사회적 거리 두기를 고강도로 실천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과 빚는 갈등이 점점 더 심해지는 상황. 트레이너 심혜원(31세, 가명) 씨는 주변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화를 토로한다고 고백했다. “생계까지 포기하고 피트니스 센터 문을 닫으며 정부의 지침을 잘 따르고 있는데, 입장료를 반값으로 내린 놀이공원, 거기에 몰려가는 사람들, 지자체에서 오지 말라고 했는데도 기어코 꽃놀이 가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 화가 나요. 간호사인 친구는 매일 쓰는 마스크 때문에 광대뼈가 짓눌리고, 일상을 완전히 포기하면서까지 희생하고 있는데 한쪽에선 맛집 앞 줄서기나 하고 있고… 분이 주체가 안 되는데 운동까지 못 하니까 속이 막 화끈거려요. 괜히 같이 사는 가족들에게 불똥 튀기는 제 자신도 싫고요.”

박종석 원장은 분노를 반추할수록 상황은 더 악화될 뿐이라고 조언한다. “분노라는 감정이 발생하는 편도체는 감정을 관장하는 변연계와 훨씬 가깝습니다. 한번 일어난 분노를 감정적으로 처리하고 곱씹을수록 그 감정이 더 커진다는 뜻이죠. 자신이 강도 높은 분노에 휩싸여 실수, 실언 등을 할 것 같거나 폭언의 충동이 일 땐 바로 그 자리를 피해보세요. 손을 씻거나 세수 등을 하면서 미주 신경을 자극해 의식을 다른 곳으로 전환하는 것이 좋습니다. 천천히 혼잣말로 ‘괜찮아’를 반복하며 심호흡을 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됩니다.” 그 밖에 숫자 세기, 묵주 만지기, 탄수화물 보충 등도 ‘화’를 즉각적으로 삭이는 데 도움이 된다.

장기전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코로나19가 몰고 온 팬데믹은 이제 엔데믹(한정된 지역에서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감염병)이 되어가고 있다. 감염병 전문가들은 코로나19가 종식되지 않고 우리 곁에 남아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상황을 예측한다. 실제로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지난 3월 17∼30일 전국 101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온라인 설문 조사에서 국민 10명 중 2명이 주변의 관심이 필요한 정도(중등도)의 불안·우울 증상을 겪는다는 결과가 나왔다. 강남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석정호 교수는 “코로나19가 주는 장기적인 스트레스가 2차적인 정서 불안을 유도하고 더 심한 신체증상을 유발해 스트레스 상황을 기억하고 재충격의 두려움, 위험이 가까이 있거나 점점 다가오는 것 같은 불안 등을 더 강하게 느끼게 된다”는 말로 장기화에 대응하는 심리 방역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미국 예일대학교 공중보건대학의 조교수이자 심리학자 사라 로웨의 표현처럼 전 세계가 ‘천천히 작동하는 재앙’에 대비할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달고나 커피 만들기, 아무 놀이 챌린지 등과 같은 일시적 유희가 기분을 환기하는 데 도움이 되는 건 맞지만 좀 더 근본적이며 지속가능한 대응을 고민해야 한다. 석정호 교수는 “규칙적인 수면 및 기상 시간을 지키며 일상생활의 리듬을 유지하는 것이 감염 공포를 잊게 하는 데 큰 효과를 발휘한다”고 조언한다. 심리 전문가들은 합리적 낙관주의를 뜻하는 스톡데일 패러독스가 팬데믹 시대에 필요한 태도라고 입을 모은다. 베트남 전쟁당시 8년간 포로 생활을 하면서 현실을 회피하는 낙관 대신 자신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냉정하게 받아들이고 잘 해결될 거라는 믿음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며 매일을 성실하게 보내다가 결국 석방된 미 해군 중령 제임스 스톡데일의 일화에서 유래된 용어다.

명상은 가장 장기적이며 지속적인 마음 면역 강화법이다. 우리나라에선 ‘마음 챙김’으로 불리는 마인드풀니스를 전파해온 매사추세츠대학교 의대 명예 교수 존 카밧진은 “팬데믹과 친구가 되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는 코로나 사태가 터진 이후 3월 말부터 유튜브 ‘wisdom 2.0’ 채널을 통해 전 세계 100여 개국 사람들에게 실시간으로 온라인 명상을 지도하고 있다. 네팔의 종교적, 정신적 지도자 밍규르 린포체 역시 유튜브를 통해 “명상을 통해 공포와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워지되, 의료인, 과학자의 조언을 따르지 않는 무모한 행동은 하지 말 것”이라고 조언한다. ‘연대’는 정신건강 전문가, 철학자, 명상가들이 모두 동의하는 궁극적 심리 방역이다. <재난과 정신 건강>에선 가족, 친구, 직장 동료, 지역 사회의 정서적, 사회적 지지가 재난이라는 외상에서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다고 말한다. ‘자애 명상(살아 있는 모든 생명이 행복하고 안락하며 편안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도록 하는 정신적 훈련)’을 주창한 밍규르 린포체의 말처럼 타인의 평화, 안위를 함께 기원하는 일이 결국 우리 모두의 정신적 백신이 되어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언택트 멘탈 케어를 위한 곳

KSSTSS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의 코로나19 특별지원단이 만든 심리 방역 콘텐츠. ‘공신력 있는’ 정보를 찾아내야 한다는 피로감에 지쳤다면 국가재난센터에서 직접 관리하는 이 특별 지침들을 기준으로 삼아도 좋다. 형식적인 내용이 아니라 감염병 유행 시기, 대상, 증상, 질환 여부에 따라 디테일하게 분류한 지침들이 있다. nct.go.kr

마보
실리콘밸리의 명상가 차드 멩(Chade-Meng Tan)이 만든 명상법을 다양한 상황에 따라 안내한다. 코로나19 확진환자, 자가격리자, 의료진 등 다양한 대상을 위한 심리방역 콘텐츠를 무료로 제공한다. www.mabopractice.com

트로스트
심리 상담 플랫폼으로,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내부 심리상담사들의 자발적 지원을 받아 코로나19 무료 심리 상담을 진행하고 있다. 앱에서 무료 상담을 신청하면 선발을 통해 전문 심리 상담사와 매칭, 텍스트 테라피를 받을 수 있다. tros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