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장이다. 오늘도 지옥을 헤치며 출근하는 용사들이 있다.

 

집으로 출근하는 삶

출퇴근하지 않아도 먹고사는 프리랜스가 된 지 2년 차. 지금도 행복에 겹다. 가장 먼저 신사역 1번 출구의 벽면을 치덕치덕 채운 성형외과 광고 속 이상한 얼굴들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뛸 듯이 기뻤다. 후각이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에 나오는 장 바스티스 그루누이만큼 발달한 내게 지하철에서 옆 사람이 손으로 입도 안 가리고 하품할 때 나는 구취, 다수의 택시 안에 진하게 밴 악취, 담배와 술, 삼겹살 기름 냄새로 범벅이 된 어느 회식자의 몸내 등으로 가득 찬 출퇴근 시간 대중교통을 더 이상 (매일) 겪지 않아도 된다는 건 축복이다. 오지랖이 넓고 불의를 보고 욕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 탓에 출퇴근 길에 만나는 각종 민폐자 -임산부석에 천연덕스럽게 앉아 있는 비임산부, 제 몸을 남의 몸에 비비는 자, 몸을 치거나 발을 밟아도 사과할 줄 모르는 자 등 -들이 주는 스트레스를 온몸으로 받아냈었는데, 더 이상 에너지를 그런 데 허비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서울은 “이런 날 굳이 밖에 나갈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야”라는 말을 자주 하게 되는 도시로 쇠락하고 있지 않나. 더워야 할 때 너무 덥고, 추워야 할 때도 더우며 미세먼지가 코와 눈, 목과 폐부에 깊숙이 침투하는 재앙 같은 나날들.

퇴사 후 수개월 동안 주변인들에게 “혼자 있을 수 있어서 너무 좋다”고 부르짖었다. 매일 귓전을 때리던 이명도 줄어서 신이 났다. 만나는 사람마다 “네 얼굴에 이런 온화가 있었니?” “화가 사라진 사람 같아” 같은 말로 굴레 탈출을 축하해줬다. “어째 더 여유가 없어진 것 같아. 회사 다닐 때보다 만나기가 힘드네”라는 말을 듣기 시작했을 때 생활의 사이클이 무너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일’로 보내야 할 하루를 열고 닫는 의식이 사라지면서 ‘워크 앤 라이프 밸런스’가 내게서 멀어지고 있었던 거다. 원할 때 일할 수 있다는 게 오후 3시부터 업무를 시작해도 괜찮다는 뜻이 아니라는 걸 알아냈다. 그럼 새벽과 주말에도 노트북 앞에 앉아 있어야 하고, 정신과 육신이 머지않아 골로 간다. 프리랜서가 시간을 돈처럼 다루지 않으면 건강도 통장 잔고도 거덜나기 십상이라는 걸 몸으로 깨우쳤다.

‘루틴’을 만드는 일이 시급했다. 혼자 일하는 사람들이 쓴 노동의 신성한 습관을 찾아 읽고, 멋져 보이는 걸 따라 하려고 애썼다. 하루키처럼 있는 곳이 어디든 어떤 상황이든 반드시 정해진 시간에 책상 앞에 앉아 글쓰기를 시작하고, 글이 술술 풀려도 약속한 시간에 끝내는 작업 방식을 해볼까? 물론, 카페, 공유 오피스에도 나가봤다. 적절한 소음, 네트워킹, 기분 전환 같은 것이 가끔 일의 효율을 높여주긴 했지만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며 글을 써야 하는 직업인을 위한 터는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출퇴근하지 않아도 먹고사는 삶을 지속하기 위해선, 집 한켠에 들인 나의 8인용 작업 테이블 위에서 ‘쇼부’를 봐야 한다는 사실이 명료해졌다.

그러던 중 어떤 문장 하나를 만났다. ‘의례의 기능이란 오로지 여러분의 마음을 지금 여러분이 하는 일의 의미에 집중케 하는 것뿐이다.’ 이 말을 남긴 조지프 캠벨이 20세기 최고의 신화학자라는 사실은 몰랐지만 저 말이 매일 자신과의 약속을 무참히 깨는 내 망한 루틴에 빛을 비춰줬다. 일의 시작과 끝을 구분하는 의례, 그러니까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향하는 일과 사이에 나만의 출퇴근 의식을 만들었다. 전기 포트에 물을 붓고 스위치를 켜는 일. 뜨거운 물 한 잔을 책상에 놓고 매일 아침 9시 30분에 자동으로 ‘한 구절’을 띄워주는 성경 앱을 켜면 활자 노동자로서의 하루가 시작된다. 14년째 프리랜스 번역가로 활동하는 김명남이 자신의 SNS에 소상히 밝힌 ‘40+20 작업법’을 지침 삼아 40분 일하고 20분 쉬는 사이클도 따라 했다. 일에 집중하면 시공간을 망각하는 성향 탓에 ‘너무 오래 앉아 계셨습니다’ 하고 손목을 울려주는 스마트 워치의 도움도 받는다. 물론, 열 중 네다섯은 못 지킨다. 마감에 쫓기고 변동 사항이 많은 일의 특성 탓이다. 정말 바쁠 땐 문 밖으로 사흘 이상 안 나가는 날도 부지기수. 하루에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혼자 모든 걸 다 해결해야 하는 1인 노동자의 삶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다. 작년 말부터 ‘현타’가 와서 ‘다시 취직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 운 좋게도 양다리 걸칠 기회를 만났다. 한 달에 열흘 남짓 출근하고 그 밖엔 자율적으로 일하는 고정 업무가 생긴 것이다. 며칠 전, 2년 만에 오전 9시 9호선 급행 열차에 몸을 싣는데 기분이 왜 그리 산뜻하던지. 더 이상 홀로 자기 의지와 사투를 벌이지 않아도 되며, 오랜만에 좋은 업무 파트너들과 호흡을 맞추며 일할 수 있다는 게 좋아서. 그러다가 힘들 때쯤엔 다시 집으로 출근하는 삶이 시작되니까. 그래서 결국엔 출퇴근하는 삶이 좋은 거냐고? 그럴 리가 있나. 남과 끊임없이 부딪히며 감정 쓰고 몸 닳는 것보단 나랑 싸우는 게 차라리 낫지. 져도 안 분하니까. 나는 소중하니까.

– 류진(프리랜스 에디터)

 

지옥에 가는 지옥도

오늘은 위기가 두 번 있었다. 가양대교와 한남대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인지 길에 차가 더 늘어났다. 나의 출근 시간도 덩달아 늘어났음은 물론이다. 가양대교에 진입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제2자유로를 따라오다가 구룡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자유로에서 진입하는 차량과 경쟁하면 된다. 아님 자유로를 따라오다가 양화대교 북단 진입로에서 끼어드는 차량을 방어하는 입장이든 그 반대로 공격하는 입장이든 아님 그냥 부딪혀서 보험 처리를 하든 죽든 까무러치든 무엇이든 선택하여 전쟁을 벌이면 된다. 판단은 내비게이션의 의견에 따른다. 한남대교 남단을 빠져나와 출근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방법도 두 가지다. 강변북로를 타고 와 동작대교 다음부터 한강 쪽 차선에 바짝 붙어 천천히 한남대교에 진입해 강을 건너는 것. 또는 아까 무사히 탑승한 양화대교를 건너 올림픽대로를 걷듯이 달려 고속터미널 방향 출구를 지나자마자 1차선에 붙어 고속화도로를 빠져나와 강남에 접어드는 것. 그 무엇이든 출근길의 마무리에 접어들었다는 점에서 양화대교의 난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거의 다 왔다는 점에서 피로도는 못지않은 게 사실이다. 다소 계급적인 논점일 수 있으나 강남에 가까워질수록 고급 수입차는 많아지고 차선은 좁아져 피로도를 높이는 데 다소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반지성적인 틈바구니 속에서 나라는 인간은 그럼에도 지성인의 교양이라는 게 있고, 무작정 끼어드는 건 질색이다. 동승자가 있으면 체면을 지키느라 더욱 그렇다. 하지만 출근길에서는 지성의 일부를 과감하게 버리는 일이 잦다. 평소에 하지 않던 욕도 가끔 뱉고 선팅 필름 안에 있는 타인의 얼굴을 분노에 차 쏘아보기도 한다. 하이빔이나 클랙션과 같은 자동차의 기계장치를 활용한 못난 짓은 되도록 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가끔 쏘고 누른다. 출근하지 않는 어느 복된 날에는 넷플릭스에서 미국 드라마 <굿 플레이스>를 종종 본다. 사후세계가 배경인데, 죽기 전에 행한 착한 일과 나쁜 일을 점수화해서 높은 점수는 ‘굿 플레이스(천국)’에 가고 반대의 경우에는 ‘배드 플레이스(지옥)’에 간다. 굿 플레이스에 대한 설명을 들은 주인공은 혼란에 빠진다. 나는 그렇게 천국에 올 정도로 착한 인간이 아닌데… 시즌이 지나 알고 보니 그곳은 악마가 인간을 정서적으로 학대하기 위해 위장한 배드 플레이스였고, 인물들은 굿 플레이스로 가기 위해,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삶의 실험을 계속한다. 출근길의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굿 플레이스? 배드 플레이스? 이름도 평화롭고 전원적인 ‘자유로’와 ‘강변북로’ 위를 엄청나게 비싼 차는 아니지만 나름 성성하니 달리는 하이브리드 세단에 앉아 바깥 날씨와는 상관없이 좋은 실내 컨디션을 만들고, 취향에 맞는 음악을 틀고 최대한 편한 자세로 앉아 있으니, 이곳이 천국이 아닐 리가 없다. 잠을 줄여 새벽에 나오거나, 임원이나 사장이 되어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 위치가 되거나, 이도 저도 안 되면 그냥 관두고 집에 있어도 될 자유와 권리가 내게 있다. 하지만 이곳은 위장된 굿 플레이스가 아닐까. 이곳에서 받는 고통의 총량을 생각하면 길바닥에 버린 시간과 돈으로 탑을 쌓아 한강 이남을 조망할 지경이다. 게다가 진짜 사후세계에 가야 할 날에, 이 도로 위에서 벌인 나쁜 짓(끼어들기, 양보 안 하기, 교통법규 위반하기, 저주하기, 욕하기 등등)이 진짜 배드 플레이스로 나를 안내할 것만 같다. 기도로 해결되는 일은 아니겠지. 나는 지옥 속에 있고, 그 지옥의 끝이 회사라니 이토록 잔인한 지옥의 연쇄, 지옥의 마트료슈카, 지옥의 연장전, 지옥의 앙코르 공연, 지옥의 지옥의 지옥의 지옥의 지옥의 지옥의….

– 글 서효인(시인, 민음사 편집자) 

 

제1의 아해가 출근하기 힘들다고 그리오

학창 시절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많은 고등학생의 꿈은 ‘인(in)서울(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서울’의 꿈이 직장인이 되어서도 이어질 줄이야. 지난해 여름까지 ‘서울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인천e음카드’를 적재적소에 쓰는 ‘인천 사람’이다. 공항철도는 해외여행 갈 때만 타는 줄 알았는데 하루에 최소 두 번씩은 공항철도에 몸을 싣고 서울과 인천을 오간다.

수면 시간은 더 줄었다. 운 좋게 출근길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존다 한들 그게 매트리스 위에서 뒹굴며 보내는 1시간에 비할 수 있으랴. 예전과 비교하면 1시간~1시간 반은 일찍 일어나야 사람다운 몰골로 출근할 수 있다. 택시라도 잡아타면 해결되던 예전과 달리 이제는 지각하면 그냥 ‘찐 지각’이다. 공덕역에서 갈아타야 했으나 잠들어 차고지까지 간 적도 있다. 눈을 떴는데 차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이다. 꿈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다 역무원이 보여 다짜고짜 붙잡고 “여, 여기 어디예요”라고 물었다.

역무원은 천상의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앉아 계시면 서울역으로 다시 돌아갈 거예요”라고 답했다. 알고 보니 종착역인 서울역에 도착했는데도 일어나지 않아 차고지까지 들어갔다 나온 것. 그때까지 누구도 깨워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야속해하기도 잠깐, 나였어도 1초가 아쉬운 출근길이었다면 이 사람이 술이 덜 깬 건지 잠이 덜 깬 건지 알 길이 없었을 거라 생각하며 위안했다. 그날은 결국 15분 늦었다.

전날 야근이나 회식이라도 하면 다음 날 출근길은 지옥 그 이상의 지옥이다. 1시간 넘게 사람들과 부대끼며 서서 가면 멀미가 나기 일쑤. 이제는 아예 탈 때부터 앉기를 포기하고 차량 내 캐리어 놓는 곳에 몸을 기대고 선다. 그러면 한결 낫다. 출퇴근하며 터득한 나름의 노하우다. 상대적 박탈감도 있다. 캐리어를 끌고 들뜬 모습으로 공항철도에 오른 이들을 보면 출근 중인데도 퇴근 충동이 최고조에 달한다. 지금이라도 회사가 아닌 공항으로 가 아무 표나 사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올라온다. 유일하게 캐리어 끄는 사람들이 부럽지 않았던 건 지난겨울 차 안에서 쓰러진 할머니를 119 구급대로 옮길 때. 같이 돕던 이들 중에 캐리어를 든 여행객들이 있었는데, “저는 공항 안 가서 괜찮아요! 인천 사니까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라고 했던 적도 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출퇴근길 게임 마스터가 됐다. 서서 가거나 자리에 앉았는데도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전자책 읽기도 애매해서 단순한 조작만으로 한 판을 즐길 수 있는 스마트폰 게임을 한다. 이제는 게임에서 할당된 에너지를 다 쓰면 다른 게임으로 넘어간다. 그렇게 게임 세 개를 돌려가며 만렙 찍고 나니 한 해가 지나갔다.

장거리 출퇴근의 어려움이 비단 이것뿐이겠는가. 분명한 건 ‘출근길’은 멀든 짧든 힘들다는 것. 그래도 종종 늦잠 자고 뛰어나가도 늦지 않을 수 있던, 회식하고 늦어도 ‘야놀자’나 ‘여기어때’ 앱이 아닌 ‘카카오T’ 앱이면 족했던 왕십리역 자취방에서의 출근길이 그립다.

– 구희언(<동아일보> 출판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