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형은 뒤돌아볼 겨를 없이 앞으로만 걷는다. 머물지 않기 위해.

 

레더 셔츠는 에르마노 설비노(Ermanno Scervino). 쇼츠는 레하(Leha). 귀고리는 부쉐론(Boucheron). 반지는 불가리(Bvlgari).

요즘은 뭘 좋아하세요?
저는 늘 같아요. 현장에서 연기하는 순간이 힘들기도 하지만 진짜 좋아요. 오늘 같은 화보 촬영도 연기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해요. 또 이 아이(품에 안고 있는 반려견 꼬맹이)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을 좋아하죠. 걷는 것도 좋아하고요. 전에는 걸으면서 사색하는 걸 즐겼다면 이제 아무런 생각 없이 걷는 일 자체를 즐길 수 있게 됐어요.

주로 익숙한 것에 정이 가나요?
모르는 것을 향한 호기심이 없진 않아요. 새로운 도전을 겁내는 편도 아니고요. 일에 있어서는 특히 더 그래요. 근데 제 안에서만큼은 어떤 변화가 생기는 걸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에요. 원래 그 자리에 있는 물건은 시간이 흘러도 늘 거기에 있는 게 좋아요. 제가 즐길 수 있는 변화는 가끔 꽃이나 새 화분을 들이는 일 정도예요. 그마저 얼마 지나지 않아 다 죽어버리게 만들지만요.(웃음) 전혀 새롭고 낯선 변화를 즐기거나 기대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할 수 있죠.

인사를 건네듯 가볍게 던진 질문인데 꾹꾹 눌러서 말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네요.
인터뷰라는 게 있잖아요. 하면 할수록 참 어려워요. 제 말이 글자로 바뀌는 과정에서 좀 다르게 적히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그러다 보니까 자꾸만 자세히 설명하게 돼요. 제 생각을 정확하고 꼼꼼하게 전달하고 싶으니까요. 저는 뭐든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왔다고 자부해요. 그러니 지금 우리 둘의 이 만남에 최선을 다해서 임하고 싶어요.

고향이 강릉이라는 게 눈에 들어오네요. 강릉은 어떤 곳인가요?
제가 태어난 곳이자 유년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도시죠. 산과 바다와 들판이 지천으로 널려 있고 거칠지만 사색하기 좋은, 신비한 힘이 있는 곳이에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특유의 결과 감성이 있어요. 그 마음이 뭔지 아세요? 경포 가는 길에 봄에는 개나리, 가을에는 코스모스가 펼쳐지듯 피거든요. 그 길을 따라 한참이나 걸어서 학교에 다녔어요. 꽃을 이렇게 만지면서요. 그런 기억이 저를 보다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인간으로 만들어요. 지금도 현장에서 치열하게 연기할 때, 너무 힘들 때, 순간적으로 어떤 감정을 만들어야 할 때면 그 시절 제가 보고 느낀 것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라요. 꿈꾸던 어린 시절이요. 그렇다고 강릉으로 돌아가고 싶다거나 하는 마음은 없어요. 어른이 된 직후 서울에 올라와 살고 있으니 이제 여기가 제 터전이죠.

톱, 재킷, 스커트는 모두 프라다(Prada). 이어커프는 타사키(Tasaki). 브로치는 벨앤누보(Bell&Nouveau). 부츠는 지안비토 로시(Gianvito Rossi).

배우 김서형의 인터뷰에서 당신이 연기한 ‘신애리’와 ‘김주영’을 빼놓고 이야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더군요. 저는 좀 청개구리 같아서 오늘 그 인물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을 생각이예요.
아주 마음에 들어요. 저도 같은 청개구리거든요.(웃음) 김서형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 좋죠.

대신 훨씬 오래전의 인터뷰를 흥미롭게 들춰봤어요. 어쩌다가 자신의 지난 인터뷰를 마주하면 어떤 생각이 들어요?
어머, 제가 옛날엔 뭐라고 떠들고 다녔나요?(웃음) 어리고 당찬 시절이었으니 이런저런 말을 용감하게 했을 거예요. 일부러 찾아보는 일은 없는데 가끔 팬들이 발굴해서 보내줄 때가 있어요. 인터뷰라는 게 그 당시의 생각을 말하는 거잖아요. 그대로인 것도 있고 좀 변한 것도 있겠죠.

2003년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는 이렇게 말했어요. “왜들 그렇게 편견이 많은지, 오히려 대중은 편식하지 않아요. 솔직하죠. 전 제 선택에 책임지고 싶고요. 자신 있어요. 남들이 뭐라건 상관 안 해요.”
그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같아요. 완벽하게요. 나이가 들면서 좀 편안해진 건 있어요. 뭘 더 잘 알게 돼서 그런 건 아니고 체력 때문에 그래요.(웃음) 체력이 안 돼요. 예전 같았으면 며칠씩 치열하게 붙잡고 있었을 고민을 이제 금방 끝내버리고 차라리 일찍 자죠.

예나 지금이나 말하는 태도나 방식이 거침없어 보여요. 
할 말 하는 스타일이에요.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누구를 욕하거나 비난하는 게 아니라 제 생각을 말하는 거니까요. 더구나 요즘은 나를 뽐내고 자랑하면서 살아야 하는 세상이잖아요. 화보나 인터뷰도 다 제 자랑하려고 하는 거고요. 굳이 감추거나 숨길 이유가 없죠. 말이든, 행동이든, 다른 사람과의 관계든, 또 스스로에게든 최대한 솔직해지려고 노력해요.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도 그런 맥락일 거예요.

톱과 팬츠는 구찌. 목걸이는 부쉐론. 귀고리는 피아제(Piaget). 페도라는 벨앤누보.

뭐든지 분명한 게 좋아요?
번잡한 거 안 좋아해요. 딱 싫어요.(웃음) 쓸데없는 인사치레 안 좋아하고요. 불필요한 상황이나 관계는 애초에 만들지도 않아요. 번잡해지는 순간이 있기는 해요. 연기할 때. 그땐 제 안에 존재하는 여러 감정을 다 끄집어내야 하니까요. 굉장히 심란해지죠. 그게 끝나면 모든 상태를 다시 ‘0’으로 만들어요. 싹 다 비워요. 그렇게 되기까지 꽤 긴 시간 훈련이 필요했어요.

마침 오늘이 <스카이 캐슬>의 마지막 회가 방영된 지 딱 1년이 되는 시점이에요. 좀 지나고 나면 달리 보이는 것도 있기 마련이죠.
그때나 지금이나 특별한 마음을 먹진 않아요. 그냥 ‘그때는 그렇게 했구나. 어떻게 해냈지? 지금 하라면 못할 것 같은데?’(웃음) 그런 생각이 드네요. 정말 열심히 했다는 확신은 있어요. 사람들이 그걸 알아봐줘서 고맙죠. 덕분에 지난 1년을 놀지 않고 잘 살았어요. 영화 <여고괴담: 모교>의 촬영을 잘 마쳤고, 드라마 <아무도 모른다>의 방송도 앞두고 있으니까요.

김주영을 만나기 전에도 김서형은 배우였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새로운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난리였죠. 어떤 마음이 들었어요?
음, 아무래도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에 좋은 캐릭터니까요. 신애리와 김주영 사이에 딱 10년이라는 시간이 있거든요. 그 10년도 죽을 만큼 열심히 했어요. 별거 아닌 역할도 별거 있다고 생각하면서요. 절대 설렁설렁 하진 않았어요. 차례차례 잘 걸어온 덕분에 김주영을 만난 거예요. 사람들이 저보고 제2의 전성기라고들 해요. 그럼 장난처럼 “저를 이제야 알아보신 거예요?”라고 웃으면서 받아쳐요. 죽을 듯이 연기한 지난 시간이 어리석진 않았다고 생각하니까 오히려 덤덤하더라고요. 역시 뭐든 우직하게 하면 반드시 보상받는다는 확신도 단단해졌어요. 또 모르죠. 앞으로의 10년을 열심히 살면 신애리나 김주영 이상의 인물을 만나게 될지도요. 배우의 삶에 있어서 그건 정말 영광이지 않겠어요?

당신의 다음 걸음이 어디로 향할지 두고봤어요. <여고괴담: 모교>와 <아무도 모른다>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할 수밖에요.
덤덤했다고 말했지만, 솔직히 <스카이 캐슬>을 끝내고 얼마간 좀 예민한 상태로 지냈어요. 저는 가만히 있는데 자꾸만 바깥에서 저를 흔드는 거 있죠. 내 안에서 흔들리고 정리가 안 되는 거면 차라리 나아요. 그건 내가 정리하면 그만이니까. 근데 외부에서 그러니까 좀 힘들더라고요. 그걸 어떤 감정이라고 표현하면 좋을지 잘 모르겠네요.

톱은 질 샌더(Jil Sander). 데님 팬츠는 폴로 랄프 로렌(Polo Ralph Lauren). 목걸이는 부쉐론. 귀고리는 코디시아르(Codiciar). 부츠는 레이첼 콕스(Rachel Cox).

짜증이나 불쾌함인가요?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웃음) 그래서 사람들의 칭찬과 환호를 마음껏 즐기지 못했어요.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로 몇 개월을 보냈어요. 그러다가 <여고괴담: 모교>의 시나리오를 읽게 됐죠. 이야기가 좋았고요. ‘여고괴담’이라는 울타리가 저를 품어줄 수 있을 것 같았고, 무엇보다 빨리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심란한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건 그 방법뿐일 거라 생각했어요. 저는 연기할 때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니까요. <아무도 모른다>도 그런 이유로 선택한 거예요.

<아무도 모른다>를 소개하는 첫 문장에 ‘좋은 어른을 찾기 힘든 시대라고 한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어요. ‘좋은 어른이란 뭘까요?’라는 질문을 준비했는데 막상 덧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렇죠? 어떤 어른이 좋은 어른인지 저도 잘 모르죠.(웃음) 우리가 말이 어른이지, 좀 더 많은 경험치를 기준으로 그냥 아는 척하는 게 다일지도 몰라요. 오래 살았다고 정답을 아는 건 아니니까요. 저에게는 대본이 책이거든요. 그 책을 통해 많은 걸 배워요. 좋은 어른이 뭔지 생각하면서, 고민하면서 촬영하고 있어요. 막연하지만 여기 테이블에 물이 있잖아요. 지금 물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조용히 물을 건넬 줄 아는 어른이 좋은 어른 아닐까요? 나를 가만히 지켜봐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어른이요. 뭐가 부족하세요? 뭐가 필요해요?

사랑이요. 그건 누구에게나 늘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어떠세요?
사랑은 늘 좋죠. 늘 부족한 것도 맞고요. 다행인지 뭔지 그런 마음을 자주 먹는 편은 아니에요. 사랑을 나누는 상대가 꼭 사람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저는 정말 일과 결혼했다고 할 수 있어요. 촬영장에서 누군가를 연기할 때 가장 풍만한 카타르시스를 느껴요. 그건 분명 사랑이잖아요. 저도 호감 가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연애를 걸고 하지만 아직 제 일을 뛰어넘을 만큼 사랑에 빠진 사람은 없어요.(웃음)

<기생충>이 쭉쭉 뻗어나가고 있죠. 칸영화제에 참석해서 진작에 복근을 뽐낸 경험도 있으니 국제적인 사랑을 꿈꿔보는 건 어때요? 
하하. 뭐 알 수 없죠. 한 단계 한 단계 걸었더니 여기까지 와 있어요. 새로운 길을 만났을 때 일단 가보면 끝에 뭐가 있는지 알겠죠. 미리 계획하지는 않아요. 매 순간, 매 작품, 오늘 하루가 더 중요해요. <기생충>이나 <미나리> 같은 작품을 통해 길을 닦고 계신 동료들에게 멀리서나마 아주 큰 박수와 응원을 보내고 싶어요. 언젠가 저도 그 길을 걷는 날이 온다면 덕분에 좀 수월하게 걸을 수 있을 테니까요.

최근 자주 하는 생각은요?
멋있어지고 싶다. 얼마 전부터 제게 ‘멋지다’라는 수식어가 함께 하잖아요. 저는 원래 멋진 사람이 아니지만, 그 수식어 덕분에 어디 한번 멋지게 살아보고 싶어졌어요. 김서형이라는 개인도 멋있어지고 싶지만요. 저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관계 맺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좀 더 멋있어질 수 있을지 생각해요. 그래서 자주 스스로 물어보듯 다짐하죠. ‘어때? 진짜 멋있을 것 같지 않아?’

스웨이드 점프슈트는 기 라로쉬(Guy Laroche). 톱은 분더캄머(Wunderkammer). 귀고리는 발렌티노 가라바니(Valentino Garavani). 벨트는 구찌. 레더 롱 삭스는 세드릭 샬리에(Cedric Charlier). 슈즈는 프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