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연안의 작은 도시 텔아비브를 떠나기 전 끝으로 해변을 찾았다. 내리쬐는 태양과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결국 남은 건 아름다움에 관한 질문과 생각들이다. 더없이 매혹적이지만 결코 불안을 떨칠 수 없는 낯선 도시와 오래도록 잘 지내고 싶어졌다. 그곳에 다시 가는 건 시간문제가 됐다.

 

 

지중해의 햇살이 한가득 내려앉은 고든 비치.

봄의 언덕

텔아비브 시내에 때아닌 난폭한 비가 쏟아졌다. 비를 피해 도망쳐 들어간 곳은 킹 조지 스트리트 중턱에 자리 잡은 ‘리틀 프린스(Little Prince)’라는 이름의 중고 책방이자 카페다. 평소답지 않게 카푸치노 한 잔을 주문하고, 일말의 짐작조차 불가능한 히브리어로 쓰인 책을 좀 펼쳐 보며 괜히 다 알 것 같다는 표정을 짓는다. 후루룩 넘기던 어떤 책에서 말 그대로 황량한 허허벌판에 수십 명 정도의 인파가 우르르 모여 서 있는 흐릿한 흑백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그 사진을 꽤 오래도록 바라봤는데 사진에 관한 정보는 딱 한 문장만 제공되었다. ‘Founding of Tel Aviv, 1908.’ 히브리어로 언덕을 뜻하는 텔(Tel)과 봄을 뜻하는 아비브(Aviv)를 하나로 합친 봄의 언덕, 텔아비브의 태초를 목격한 셈이다. 돌아온 후에야 알게 된 사실 하나. 그날 황량한 모래 언덕에 모였던 사람들은 66가구의 유대인 가정이었다. 이들은 66개의 회색 조개껍데기와 66개의 흰색 조개껍데기로 만든 복권을 뽑아 황무지를 나눠 갖고, 건강한 환경을 갖춘 제대로 된 도시를 건설하기로 도모한다. 파괴된 고대 이스라엘의 재건을 갈망하는 유대인의 마음이 담긴 현대의 첫 히브리 도시 텔아비브는 1909년 4월 11일 공식적인 탄생을 알렸다. 이는 1948년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진 이스라엘 건국 역사의 호기로운 출발이기도 하다.

 

마음이 내키면 언제든 해변에 앉아 책을 볼 수 있다.

모든 게 다 반짝거리던 버그래시오브 비치.

해질녘 황금빛으로 변한 예루살렘 비치.

여러 얼굴

“테, 텔, 뭐 어디요? 거기가 어느 대륙 어디쯤 있는 곳이죠? 성지 순례라도 가시나요? 위험하지 않나요?” 텔아비브 여행을 선언했을 때 지천에서 날아온 물음이다. 텔아비브에 가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모르는 곳을 향한 의심의 물음들은 기어이 텔아비브에 꼭 한번 가봐야겠다는 그럴듯한 명분이 되어 돌아왔다. 알 수 없는 무언가에라도 홀린 듯 텔아비브행 항공권을 샀다. 이스라엘은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자신의 뿌리를 찾아 모여든 약속의 땅이자, 어느 정치가나 역사학자도 단칼에 재단하고 정의하기 어려운 다사다난한 정치, 종교, 인종, 영토 분쟁이 쌓이고 뒤섞인 나라다. 다양함을 넘어 민감하고 복잡한 배경과 문화를 품은 이들이 여전히 함께 살아간다. 입국 심사가 유난히 삼엄하다고 알려진 벤 구리온 공항에 내린 순간 훅 치고 들어온 막연한 긴장과 불안감은 나름대로 상식적인 입국심사를 거쳐 수화물을 찾고 새로운 유심칩을 꽂는 순간까지 좀처럼 가시지 않고 미약하게 남아 있었다. 이스라엘은 남자든 여자든 성인이 되면 의무적으로 입대를 해야 하는 징병 국가다. 시내로 이어지는 곳곳에서 앳된 얼굴의 총을 멘 군인들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갛게 웃으며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그런 걸 드물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특별하다고 해야 맞을까. 얼굴과 얼굴들 사이로 유럽, 하와이, 아프리카, 아니면 중동의 여느 사막 도시의 얼굴까지 두루 갖춘 풍경이 꽤 야릇하게 섞여들기 시작한다. 이곳은 무엇인지, 그렇다면 지금 여기 나는? 그 질문이 텔아비브와 이스라엘을 여행하는 내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거룩한 무덤 성당 앞에서 전화를 받는 무슬림.

바닷가에 자리한 인터컨티넨탈 텔아비브.

비가 그치자 거룩한 무덤 성당 벽에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햇빛.

지중해의 빛

텔아비브는 지중해를 따라 남북으로 14km에 이르는 해변을 고스란히 품은 도시다. 1930년대에 지어진 건축물에 위치한 데이브 호텔에 짐을 풀었다. 그러곤 곧장 빠른 걸음으로 2분 이내에 있는 고든 비치로 나가봤다. 끝이 보이지 않도록 일렬로 늘어선 해변은 그들 나름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고든 비치, 피어시만 비치, 바나나 비치, 버그래시오브 비치, 예루살렘 비치, 아비브 비치 등 가장 북쪽의 항구에서부터 저 끝의 고대 도시 올드 야파까지 도시 어디에서든 마음만 먹으면 푸른 지중해가 지척으로 닿았다. 지중해의 햇빛은 언제든지 기꺼이 부서지며 빛을 발했고,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은 1초도 멈추지 않은 채 여기서 저기로 사뿐히 불어왔다. 곱고 하얀 백사장에는 색색의 파라솔이 가득한 모양인데 유난히 높고 선명한 채도의 그것들은 색색깔, 완전히 새로운 생명처럼 여겨질 정도다. 해변의 풍경이란 우리의 동해나 거기의 지중해나 다 거기서 거기겠거니 착각할 수 있지만 실은 또 전부 다르다. 바람과 모래와 파도는 한순간도 같은 패턴으로 움직인 적 없으니 그것들이 그려낸 풍경이란 응당 영원히 같을 수 없다. 해변은 머무는 곳이라기보다는 오가는 곳이라고 해야 맞을 텐데, 텔아비브 해변에서는 이상하게도 가던 걸음을 멈추고 자주 서 있었다. 무턱대고 낙원이라는 이미지를 은밀하게 떠올리곤 했지만, 돌아보니 그건 어떤 좋은 순간을 기억하기에 흔하고 간편한 마음이기도 했을 것이다.

 

시간이 멈춘 듯한 예루살렘을 거니는 정통 유대교인.

바우하우스의 안식처

아침에 일어나면 호텔 근처의 작은 식당에 앉아 샥슈카를 먹었다. 샥슈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먹는 보편적인 아침 식사로 우선 얕은 냄비에 토마토소스, 고추, 양파, 여러 향신료를 섞어 약간 매콤하고 붉은 페이스트를 만든다. 부글부글 끓는 국물 위에 달걀 몇 알을 깨트려 냄비째 식탁에 내는 음식이다. 새빨간 국물이 꼭 지옥 불 같다고 ‘에그 인 헬’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샥슈카의 고향은 아프리카다. 후식으로 갓 짜낸 석류 주스 한 잔을 마시며 구글맵을 여는 건 텔아비브에서의 루틴이 되었는데, 하루의 계획은 석류 주스의 마지막 한 모금을 털어 마실 즈음 내키는 대로 정해졌다. 지도 곳곳에 ‘바우하우스’라는 단어가 불쑥 튀어올랐을 때, 마치 베를린 장벽 앞에 서 있는 팔각정자 통일정과 마주했을 때처럼 어리둥절했다.

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독일 총리 자리에 오르자 머지않아 나치의 비밀국가경찰 게슈타포가 베를린의 바우하우스에 들이닥쳤다. 나치 정권은 바우하우스의 기능주의와 합리주의가 순수한 독일 민족의 정신과 본질을 왜곡시키고 타락시킨다고 믿었다. 그 믿음은 잔혹한 유대인 탄압으로 이어진다. 나치의 손아귀를 피해 바우하우스 교수진 몇몇은 미국으로 망명해 ‘뉴 바우하우스’를 설립했고, 독일계 유대인 건축가들은 바로 여기 이스라엘 텔아비브로 피난했다. 그즈음 텔아비브는 모더니즘 이론가 패트릭 게디스의 도시 기본 계획을 기반으로 대규모 도시 개발을 예정하고 있었다. 게디스는 텔아비브를 시간과 공간에 따라 지속해서 변화하고 꿈틀대는 전혀 새로운 도시로 만들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갖고 있었고 그의 비전을 더욱 풍성하게 실현한 이들이 바로 바우하우스 출신 건축가들이다. 그들은 스타코 장식의 새하얀 벽, 직선을 기본으로 하되 약간 둥그스름하게 굴린 건물의 모서리와 돌출된 발코니, 평평한 지붕, 무더운 날씨에 적합하게 상대적으로 길고 좁은 형태로 낸 창문 등 바우하우스의 모더니즘을 이어받으면서 도시 기후와 상황에 적합한 건축물을 세워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화이트시티-모더니즘 운동은 텔아비브 전역에 4천여 채에 달하는 바우하우스 건축물을 유산으로 남겼다. 2003년 유네스코는 20세기 초 새로운 도시 계획과 건축이 특수한 문화적, 지리적 환경에 적용된 우수한 사례라는 이유를 밝히며 이 건물들이 집중적으로 들어서 있는 로스차일드 거리 일대를 세계문화유산 보호구역으로 지정했다.

 

거룩한 무덤 성당을 밝히는 건 태양이다.

유대교 경전 타나크를 들고 통곡의 벽 앞에 선 소년.

통곡의 벽 앞에서 기도 중인 사람들. 벽돌 사이에 소원을 적은 종이가 가득하다.

평화의 땅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날에는 새벽부터 쉬지 않고 비가 내렸다. 예루살렘에 갈 마음은 없었는데 이스라엘의 고된 역사를 알아갈수록 그곳이 궁금해졌다.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자동차로 1시간이 훌쩍 넘는 거리인데 얼마 전 개통한 고속열차를 타면 30분 만에 닿을 수도 있다. 하하가나(Hahagana) 역을 출발한 기차는 중간에 벤 구리온 공항에서 한 번 멈춘 다음 곧장 예루살렘 이츠하크 나본(Yitzhak Navon) 역까지 쏜살같이 내달렸다. 예루살렘은 텔아비브와 완전히 다른 세상처럼 보였다. 오랜 종교 분쟁과 갈등이 첨예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불안감이 직접적으로 와 닿았다. 이츠하크 나븐 역에서 트램을 타고 조금 더 들어가니 비로소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교 모두가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성지, 예루살렘 구시가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구시가지는 16세기에 이 땅을 지배한 오스만 제국이 건설한 성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도시를 따라 둘러진 성벽의 길이는 약 4km인데 작은 울타리 안에서 기독교인, 무슬림, 유대인, 아르메니아인은 3000년 전부터 지금까지 서로 익숙한 듯 낯설게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뿌리 삼아 살고 있다. 기념품을 파는 상점과 부산한 관광객들로 붐비는 도시의 입구는 어디에나 있는 오래된 관광지처럼 보였다. 미로처럼 좁고 오래된 골목 안으로 홀린 듯 들어가 기독교의 성지인 거룩한 무덤 성당 입구에 닿자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낯선 기분으로 물들었다. 순간 종일 축축하게 내리던 비가 그치고, 구름이 가시더니 강렬한 햇빛이 내리기 시작했다. 거룩한 무덤 성당은 예수의 무덤으로 알려진 곳이다. 웅장하지만 어딘지 서글픈 느낌이 드는 성당 중앙, 예수의 무덤이 있었다. 차갑고 단단한 바위에 누군가는 기꺼이 무릎을 꿇은 채 정성껏 입을 맞췄다. 성당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좁은 문으로 들어서니 유대교의 성지, 통곡의 벽이 거대한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그 벽에 비하면 한없이 왜소한 사람들이 줄지어 선 채 벽에 손을 얹거나 뺨을 비비면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개인이 읊조리는 기도가 하나로 모여 증폭되자 꼭 누군가의 울음소리처럼 퍼졌다.

 

유대교를 상징하는 갖가지 물품들.

좌판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예루살렘 베이글.

샬롬

우리는 가보지 못한 여행지를 선택할 때 그 도시가 가지고 있는 막연한 이미지에 영향을 받는다. 때때로 그 이미지의 생산 방식이나 방향은 엉뚱한 곳을 향할 때가 많다. 차이를 부각하고 극단적인 목소리만을 증폭시킨다. 그렇다면 어떤 도시나 사람들에 관해 좁은 선입관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은 분쟁과 갈등, 긴장과 모순이 여전히 진행 중인 곳이 분명하다. 하지만 직접 경험하며 마주한 텔아비브는, 그리고 그 도시를 지키며 살아가는 다양한 출신과 신념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과 믿음을 책임지며 살아가고 있었다. 전세계에서 모여든 여행자, 종교인, 순례자, 채식주의자, LGBTQ, 펑크족을 비롯한 수많은 낯선 얼굴을 조건이나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낮이든 밤이든 언제나 불 꺼질 틈 없이 빛나는 미지의 땅, 텔아비브에 가지런히 두고 온 수많은 물음표와 느낌표를 다시금 생각한다. 샬롬은 평화의 인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