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을 때 꾸며야 예쁘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어쨌든 나는 오늘도 코르셋을 입지 않았다.

 

제71회 칸 국제 영화제에서 하이힐을 벗고 레드카펫을 밟은 크리스틴 스튜어트. 해당 영화제가 갖고 있는 ‘레드카펫을 밟는 여성은 하이힐을 신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규칙에 저항하는 퍼포먼스로 화제를 모았다.

2년 전과 스타일이 달라졌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의견보다는 사실에 가깝다. 내게도 그때의 나는 조금 낯선 모습이니까. 한여름에도 가슴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히피펌으로 말고 매일 풀 메이크업을 하고 몸에 쫙 붙는 옷을 즐겨 입고, 무엇보다도 그렇게 꾸미는 것을 좋아했던 모습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지금은 주로 안경을 쓰고 색조화장을 하지 않고 벙벙하게 남는 큰 옷을 즐겨 입는다. 변화의 계기를 하나로 꼽긴 어렵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해가 지남에 따라, 변덕에 따라, 유행에 따라 변한 것과는 결이 다른 ‘선택’이라는 것이다. 나는 탈코르셋을 선택했다.

사회적으로 정해진, ‘규범적 여성성’을 벗는다는 탈코르셋의 개념은 알고 있었지만 변화를 피부로 느끼기 시작한 건 2018년 봄이었다. 복학한 내 눈앞에 나타난 건 조금 다른 모습의 동기들이었다. 살면서 그렇게 투블럭을 한 젊은 여성들의 비율이 높은 강의실은 처음 봤다. 생머리와 투명 화장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동기도 쇼트 커트를 한 채 화장기 없는 맨 얼굴로 나타났다. 화장을 하지 ‘못’하거나 꾸미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그 모습이 ‘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변화를 눈앞에서 목격한다 해서 곧바로 굳은 결의를 다질 수 있는 건 아니다. 나 역시 꾸미는 걸 참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니 더 그랬다. 이제야 비로소 나에게 어울리는 화장법, 머리 스타일, 퍼스널 컬러를 알게 된 것 같은데 이게 다 헛짓이었다는 걸 인정하기 힘들었다. 예뻐지고, 예쁘게 보이고 싶은 욕구는 자연스러운 것이라 합리화하며 그대로 머물고 싶었던 마음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아마 두 가지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여전히 합리화의 단계에 머물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첫째로는 그 모든 꾸밈이 전부 내가 원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나의 꾸밈이 지금도 사회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

한때 나는 화장을 하지 않고서는, 직경 13.4mm의 테두리 부분이 옅은 그레이 컬러렌즈를 끼지 않으면 밖에 나가지 못했다. 치명적인 미세먼지 주의보가 떨어진 날조차 화장이 망가질까 마스크 쓰기를 꺼려했다. 나의 메이크업은 ‘주체적’이었던가. 요즘 청소년들의 이야기는 어떤가. 화장을 하지 않으면 오히려 배제될 정도라고 한다. 학생들이 어릴 때부터 화장을 한다는 것 자체를 문제 삼는 게 아니다. 화장을 해야만 공동체에 받아들여진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니까. 그저 ‘요즘 애들’의 세태로 치부하고 넘기기엔 그 아이들과 나는 너무 가깝게 느껴졌다. 아이들은 우리 세대가 적극적으로 성장시킨 눈부신 K-뷰티 산업과 미디어의 여성 이미지를 발판 삼고 있었다. 여성은 예뻐지는 게 곧 능력이고 자신감이고 권력인 것처럼 착각하게 하는 그 모든 것은 우리 세대가 남긴 유산이었다. 오늘 꾸미고 나가는 모습이 곧 다음 세대가 닮고자 하는 여성의 모습일 수 있다. ‘탈코르셋 운동’은 개인의 작은 변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영향력의 존재를 긍정하고 이를 책임지고자 하는 여성들이 일으킨 사회적 운동이다. CNN이나 <가디언> 같은 해외 언론도 한국의 탈코르셋 운동을 ‘Anti Makeup Movement’나 ‘Escape the Corset’ 등으로 소개하기 시작했다. 공통적으로 ‘사회적 압박감’에 주목하고 있었다. 어느 날, 화장을 하지 않고 나갔다. 이게 뭐라고 어려워했나. 이렇게나 편한 걸 왜 여태 안 했는지 억울함까지 느꼈다. 서클렌즈를 착용하는 사람에게는 그 몇 mm의 차이가 굉장한 인상 변화처럼 느껴진다. 실제로도 미세한 차이는 있겠지만 본인이 생각하는 만큼 자신의 맨눈이 ‘동태눈깔’처럼 보이는 일은 없다. 마찬가지로 내 눈에는 그렇게나 크게 보이던 뾰루지를 신경 쓰는 사람도 없다. 사실 더 중요한 건, 나는 이제 내가 동태눈깔이어도 남의 눈에 내 뾰루지가 거슬려도 상관없는 사람이 됐다.

여성이 자신의 외모에 대한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둔감해지는 것은 생각보다 짜릿한 변화다. 학교를 졸업한 후 얼마 안 되어 <얼루어 코리아>에 입사했다. 딱히 달라진 게 없었고 달라질 필요도 없었다. 미디어에서 보여지는 ‘패션 매거진’ 환경과 달리 사무실의 모습은 자유롭다. 내가 화장을 하지 않아도 브라를 하지 않아도 유니섹스 옷만 입어도 그 자체가 개성으로 존중받을 수 있는 곳이었기에 나는 무리 없이 계속 ‘탈코’를 하는 중이다. 처음에는 이러한 환경이 얼마나 운 좋은 것인지 실감하기 어려웠다. 회사원이 된 친구들에게 ‘보통’ 회사의 이야기를 전해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화장을 하지 않은 날이면 하루에도 열 번은 어디 아프냐는 물음에 시달려야 하고, ‘용모단정’해야 하며, 슈트를 입더라도 허리라인이 들어간 재킷과 스커트로 구성된 ‘여성용’ 정장만 입어야 하고, 투블럭은 상상도 할 수 없다는 이 시대 보통의 회사들. 그곳에서 탈코를 시도하는 이들은 분명 나와는 차원이 다른 환경에 놓여 있을 것이다. 사회적 코르셋과 기업문화가 한데 뒤섞인 곳에서 모난 돌이 되는 것은 누구에게라도 쉽지 않다. 그렇기에 탈코르셋은 권유할 수 있되 강요하기는 어렵다. 타인이 처한 맥락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다만 우리 각자가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걸 할 뿐이다. 여성의 모습에 대해 하나의 정답보다 여러 가지 보기를 제시하는 것은 그럼에도 의미가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