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진학하고 영화 <증인>과 드라마 <열여덟의 순간>을 세상에 내놓았다. 여느 때처럼 작품을 하며 보낸 1년이지만, 김향기는 어떤 경계를 넘은 듯 그 이상 달라져 있었다.

 

가죽 소재 톱은 이자벨 마랑(Isabel Marant).

작년 인터뷰를 할 무렵엔 대학에 갈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었어요. 얼마 후 한양대 연극영화과 신입생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죠. 결국 결정을 했군요?
고민이 많았어요. 아무래도 작품활동을 하게 되면 학교에 잘 못 가게 되니, 동기들에게 안 좋은 인상을 심어주거나 불성실하게 보일까봐 걱정되었어요. 또 제가 현장에서 배우는 것과는 다른 것을 배울 수 있을까 하는 고민도 있었어요. 잘 적응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 됐죠. 그런데 결론적으로는 대학에 가길 잘한 것 같아요.

학교에서 곧장 오는 길이죠? 오늘은 뭘 했어요?
‘배우와 연출 실습’이라는 수업이랑 ‘디자인 실습’이라고 컴퓨터로 무대 디자인하는 수업이 있었어요. 연출 실습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건데, 듣고 있는 강의 중 제일 활동적으로 몸을 쓰거든요. 동기들이랑 노는 것처럼 무대에 올라가서 표현하는 방식으로 진행돼요.

어릴 적부터 꾸준히 연기를 해왔기에 경력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배우죠. 그렇기에 다른 것으로 채우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건가요? 전공으로서 공부하는 건 어때요? 
많이 달라요.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배우고 있어요. 무대 디자인 같은 것도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면 전혀 알 수 없는 부분이이었을 거예요. 동기들과 수업을 듣다 보면 모든 게 처음 배우는 느낌이에요. 현장에서 연기하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느껴지거든요.

목소리에서 신남이 느껴지네요. 동기들과 친해지기 전까지 연예인 김향기로 바라보는 시선도 있었을 텐데요.
처음에는 아무래도 조금은 의식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제는 그냥 같이 친하게 지내고 있어요. 제가 학교를 가지 않았더라면 드라마가 끝나고 그냥 집에서 무료하게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든 적이 있었어요. 학교에 가서 얻는 에너지가 있어요. 많이 웃게 되고요. 혼자 집에 있을 때와는 다른 기운이 느껴지니까 좋아요. 중학교, 고등학교 때도 학교 가는 걸 원래 좋아했던 것 같아요. 친구들이랑 있는 시간도 좋아요. 현장에서 만나는 동료와는 또 다른, 친구들과 느끼는 돈독함이 있어요.

구조적인 실루엣의 코트, 페이턴트 소재 롱 부츠는 모두 프라다(Prada).

이제는 법적으로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됐죠. 술자리도 종종 갖나요? 
술, 마시고 있죠. 아직 취하도록 마신 적은 없는데…제가 못 마시는 편은 아닌 것 같아요.(웃음)

대학에 진학하는 순간 다시 교복을 입고 <열여덟의 순간>에서 수빈 역을 연기했어요. 어려운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갈등이나 문제를 일으키기보다는 인내하고 현명한 방식을 취하는 인물이니까요. 
연기를 할수록 수빈이가 딱 중간에 있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중심을 잘 잡고 유지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너무 갈등이 부각되다 보면 그동안 나왔던 수빈이의 캐릭터와 앞으로 남은 준우와의 감정이 흐려질 것 같았어요. 제 감정을 확확 보여주기보다는, 이 작품에서는 중심을 마지막까지 유지하는 게 옳은 방법이라는 생각으로 연기를 했던 것 같아요.

로맨스물의 주인공은 처음 아니었나요? ‘사랑’의 감정을 전달해야 했는데 어떻게 다가갔어요?
그동안 가족이 주가 되는 작품을 많이 했는데 로맨스가 메인인 작품은 처음이라서 시작할 때 고민이 많았던 건 사실이에요. 처음 시나리오를 봤을 때 로맨스도 있지만 아이들과 어른의 성장 이야기도 담겨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 선택했어요. 감독님도 풋풋한 열여덟의 모습을 보여주자고 했고요.

지금까지 배역 중 가장 평범한 모습, 가장 평범한 또래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현실감을 불어넣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어요? 
처음에는 조금 오글거릴 수 있는 대사들이 있어서 ‘이걸…? 어떻게 해야 되지?’(웃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갑자기 너무 꽁냥대면 어색할 것 같아서 현장에서 수정된 부분도 있고요. 준우와 수빈의 대화 중에 살짝 부담스럽다 싶은 부분들은 감독님이랑 얘기해서 몇 개 수정했어요. 최대한 편해 보이게 연기하려고 했어요. 연애를 한다는 느낌보다는 서로 감정이 오고 가서 자연스럽게 대사가 나오는 느낌이었으면 했거든요.

극중 캐릭터인 수빈이와 당신은 닮은 면이 있어요. 흔들림이 없다는 점에서도 그렇죠. 
가장 닮은 부분은 할 말은 하는 것? 수빈이도 착한 이미지이지만 할 말은 하거든요. 엄마에게도 그렇고요. 엄마는 겉으로 굉장히 강해 보이고 수빈이는 기가 죽어서 엄마의 보호 아래 있는 공주님처럼 보일 수 있는데 사실은 스스로 갈등을 풀어나가면서 성장하는 인물이에요. 약한 사람이 아니죠.

오버사이즈 실루엣 드레스는 YCH.

<열여덟의 순간> 현장에서는 비교적 또래 배우들과 연기하게 됐어요. 다른 경험이었을 것 같은데요? 
교실 장면을 찍으면 또래 배우들이 다 나오는데 처음에는 텐션에 적응이 안 됐어요. 하지만 점점 한 명도 빠짐없이 다 친해져서 그 밝은 기운이 굉장히 긍정적으로 느껴지더라고요. 정말 교실에 있는 느낌이었어요. 각자 나이가 달라서 나이 차이가 아예 없지는 않았는데도 친구 같았어요.

수빈 말고 또 마음에 드는 캐릭터가 있었어요?
필상이요. 애 같은데 미워할 수 없고, 껄렁대긴 하지만 밝고 솔직한 캐릭터인 것 같아요. 만약 반에 그런 친구가 있다면 실제로도 친하게 지냈을 것 같아요.

마지막 촬영 때 헤어지기 아쉬웠어요? 
마지막 단체 촬영할 때 동생들이 울더라고요. 전 아직 촬영이 남아 있었기도 해서 눈물은 안 났어요. 그땐 그냥 웃었는데 마지막 방송 날에 쫑파티를 해서 다 같이 모여서 방송을 봤어요. 마지막에 다 손 흔들면서 드라마가 끝나는데 갑자기 울컥하더라고요. 그날은 엄청 울었어요.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볼 때마다 눈물이 나서 너무 당황스러웠어요. 애처럼 울었던 것 같아요.

드라마 속에서 어른은 어른 같지 않고, 청소년기인 수빈과 친구들은 오히려 성숙해요. 올해 성인이 되면서 어떤 어른이 되겠다는 생각도 해보았나요? 영화 <증인>의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라는 질문과도 이어져요. 
언제 어른이 될지는 모르겠어요. 아무래도 어릴 때부터 많은 분을 만났고, 좋아하는 일을 빨리 찾아서 하는 즐거움도 있지만 저만의 고충도 있어요. 사실 조금 더 어른이 됐을 때, 그때 나의 고민은 무엇이 될지 궁금해요.

올해는 어떤 고충이 있었어요? 
올해 초는 복잡했어요. <증인> 개봉이 다가오면서 압박이 심했어요. 작품 자체에 대한 걱정보다는 제 자신에 대한 괜한 걱정이었어요. 그러다 완성된 영화를 보고서야 마음이 편해졌어요.

서번트 증후군이 있는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고등학생은 김향기 말고 다른 배우는 떠오르지 않는 역할이기도 했어요. 
처음에 시나리오를 받았을 땐 ‘내가 해도 될까?’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어요. 저보다 더 어린 배우가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틀에 박혀 있었던 거죠. 결론적으로 보면 그 작품에서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지후라는 캐릭터가 연기를 떠나서 인물 자체로 보여졌으면 해서 현장에서도 모니터를 많이 하지 않았어요. 현장에서 느끼고 받아들여지는 것들을 생각해보고 연기했고 그래서 제 모습을 확인하지 않았어요. 설득이 될 만한 캐릭터일까? 하는 고민들이 개봉이 다가올수록 엉켜서 내내 스트레스를 받다가 처음 완성된 편집본을 보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어요. 제 인물에 대한 걱정을 너무 많이 했는데 전체적인 영화의 메시지나 느껴지는 감정들이 한곳에 치우치지 않아서 안심이 됐어요. 제가 편안하게 느낄 수 있도록 정말 많은 노력을 해주셨고요.

와이드 데님 팬츠는 푸시 버튼(Push Button). 반지는 모니카 비나더(Monica Vinader). 터틀넥 니트 스웨터, 귀고리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증인>의 이한 감독과는 벌써 세 번째 작품이에요. 서로 어떤 신뢰를 가지고 있나요? 
저는 현장에서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은 아닌데요, 감독님과는 가만히 있어도 편해요. 남자분인데도 여자의 감정을 자세히 파악하려 노력하시는 것 같아요. 그 감정선을 이해해주려고 노력하시죠. 같이 일하기 편한 분이에요.

말은 안 하더라도 가만히 현장의 모든 걸 관찰하고 있을 것 같은데요. 마치 드론처럼 속속들이 말이죠. 
그냥 눈에 보이니까…(웃음) 보이고 들리는 것에 대한 느낌은 늘 가지고 있어요. 정말 중요한 것만 기억에 남고 나머지는 딱히 기억에 안 남아요. 다른 배우분들 얘기하시는 걸 듣다가도 귀에 박히는 게 있고 다른 분들에게 디렉션 주실 때 뭘 원하시는지 캐치해서 제가 연기할 때 참고하기도 하고요. 현장에서 말을 할 일이 많지는 않아요. 제가 욕심 부린다고 딱히 좋은 변화가 있을 것 같지 않아요. 정말 이해가 안 된다 싶은 것만 물어보게 되는 것 같아요.

다음 주 <증인>으로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상을 받는다던데요. 고민이 많았던 작품인데, 뿌듯하기도 한가요? 
저는 상에 대해서 잘 모르는데 그냥 주신다고 하면….(웃음)

그럼 상은 당신에게는 어떤 의미인가요? 
그냥 그 작품을 다시 생각나게 해요. 좋은 작품 잘했다. 내가 또 배운 게 있구나. 아직 어리니까 항상 작품을 하면 뭔가 새로 배우는 부분들이 남아 있어요. 제가 정확히 파악은 못해도 저도 모르게 있더라고요. 상을 받을 때도 엄청 좋고 신나기보다는, 좋은 작품을 만나서 한 단계 성장했구나 같은 느낌이에요.

<증인>과 <열여덟의 순간>에서는 무엇이 남았나요? 
<증인>은 연기적인 부분에서 제가 갇혀 있던 틀을 깨닫고 벗어나게 해준 작품이에요. 처음에는 잘하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인물을 기계적으로 분석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손동작, 시선 처리 같은 것들을 너무 계산하면서 연습했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지후’라는 한 사람을 보여주는 건데 왜 이 사람을 보여주지 못하나 하는 생각이 들고 그런 걸 점점 내려놨어요. 배우로서 내려놓고 고민을 덜어놓고 연기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걸 배웠어요. <열여덟의 순간>을 하면서는 드라마가 오랜만이라 그런지 드라마 현장을 다시 배운 것 같아요.

터틀넥 니트 스웨터는 누메로벤투노(No21). 캐멀 컬러 와이드 팬츠는 레하(Leha).

매거진의 시간으로는 벌써 12월호이자 연말이랍니다. 아직 이른 것 같지만 올해는 어떤 해였나요?
그냥 빨리 지나갔어요.(웃음) 정말 빨리 지나간 한 해였던 것 같아요.

차기작은 정해졌나요? 
차기작은… 여행이에요. 학기가 끝나면 바로 노르웨이로 떠나는 게 계획이에요. 방학 동안 다녀오고 싶어서 여행 계획을 짜고 있어요. 오로라를 보러 갈 생각이에요. 오로라가 TV에 자주 나오잖아요. 볼 때마다 실제로 보면 너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갑자기 그럼 이번 겨울에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만약 그곳에서 오로라를 만나지 못한다면요? 운이 따라줄까요? 
그럼 또 가야죠.(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