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도 읽거나 넘겨야만 할 것 같은 계절, 좀 드문 책을 파는 책방에 가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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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FERENCE 

사진이 차고 넘치는 세상이 된 건 이미 오래다. 이제 사진은 기록 혹은 예술이라기보다, 어쩌면 사교나 사회활동의 도구가 된 것처럼 보일 정도다. 이른바 소셜 미디어라 불리는 가상세계에서 ‘친구’라고 부르는 이들을 향해 건네는 가벼운 인사말. ‘더 레퍼런스’는 빠르게 변화하는 디지털 시대에 여전히 손에 잡히는 물성을 지닌 ‘사진 책’에 대한 애정과 희망, 가능성을 내다볼 수 있는 공간이다. 서점이자 전시장이고, 사진과 예술의 오늘과 미래에 관한 담론으로 들썩이는 만남의 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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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We See: Photobooks by Wo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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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periment Relationships Vol.1>

김정은, 김소연 | 더 레퍼런스 대표와 책임 매니저

더 레퍼런스가 문을 연 계기는 무엇인가?
전시공간인 1층 윈도우 갤러리와 지하 1층 프로젝트 룸, 아트북 서점인 2층으로 구분되는 복합 문화 공간이다. 2007년부터 현대 예술사진 전문지 <IANN>과 다양한 사진집을 출판해온 이안북스가 사진과 예술에 관심을 두고 있는 이들이 모여 가치 있는 레퍼런스를 공유하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어떤 책을 볼 수 있나?
우리는 ‘책’의 가치를 높이 사는데, 주로 ‘전시 공간’이 아닌 ‘책’이라는 공간을 자신만의 독특하고 개성 강한 시선으로 가득 메운 사진집과 아트북을 선택한다. 꼭 알아야 할 작가의 사진집을 큐레이션하거나 예술과 사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이론서와 인문 서적, 독립출판물까지 두루 소개하고 있다.

다른 서점과의 차별점은 무엇인가?
한국에서 쉽게 접하기 힘든 일본과 중국, 싱가포르, 대만, 중국 등 아시아의 아트북을 만날 수 있다. 독특한 시선과 취향을 가진 작가가 많다. <얼루어> 독자에게 사진집 <How We See: Photobooks by Women>을 소개하고 싶다. ‘여성 사진가의 작품’에 초점을 맞추어, 1824년부터 2010년까지 출간된 여성 사진작가의 사진집 100권을 소개한다. 브루클린에서 활동하는 중국 사진가 픽시 랴오의 <Experiment Relationships Vol.1>도 볼만하다. 작가는 남녀 간의 성 역할과 힘의 관계가 바뀐 상황을 연출하여 아시아의 가부장적 시스템을 도발적으로 반대한다.

이 공간이 어떤 역할을 하길 바라나?
아시아 뉴미디어 퍼블리싱 플랫폼을 지향한다. 서구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 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아티스트를 조망한다. 다양한 분야의 전시와 렉처, 워크숍, 토크 프로그램, 라운드 테이블 등 다양한 연계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2층 서점은 누구나 자유롭게 책을 읽고 자신만의 레퍼런스를 찾아갈 수 있는 라이브러리가 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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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책방 

훌륭한 전시도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달이 지나면 끝이 난다. 똑같은 전시는 다시 만날 수 없다. 한 권의 도록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전시를 압축한 기록물이자 당시의 감흥을 되살리고 확장시키는 기억이다. 잊고 있던 지난 전시가 번쩍 떠오르는가 하면, 차마 닿을 수 없이 먼 곳에서 열린 전시를 간접 경험하며 머릿속에 나름의 전시장을 그려볼 수도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새롭게 자리 잡은 미술 책방은 도록의 중요성과 의미에 다시금 주목하는 예술 전문 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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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rian Piper: A Synthesis of Intui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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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ckney-Nan Gogh: The Joy of Nature>

문정인 | 국립현대미술관 진흥재단 아트 존 운영팀장

기존 아트 존을 두고 따로 미술 책방이 문을 연 계기는 무엇인가?
국립현대미술관이 개관 50주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해 ‘광장’을 주제로 한 축제와 행사, 전시 등을 마련했다. 기념할 건 기념하되 국립미술관으로서 막중한 책임감도 느낀다. 원래 있던 아트 존의 규모나 내용에 아쉬움을 가지고 있었다. 최근 미술관을 찾는 관람객의 관심사가 다양해지면서 해외 미술관의 도록을 찾는 이들도 부쩍 늘었는데, 그 요구를 다 수용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어떤 책을 볼 수 있나?
국립현대미술관이 발간한 도서 150여 종을 비롯해 뉴욕현대미술관, 테이트 미술관 등 해외 유명 미술관의 도록 등 국내외 예술 서적 1000여 종을 구비했다. 도록뿐만 아니라 앞으로 비평 위주의 이론서 등 관람객들이 많이 찾는 해외 예술 서적의 비중을 늘려나갈 생각이다.

다른 서점과의 차별점은 무엇인가?
미술 책방에 들어서면 두 개의 문이 빼꼼히 열린 책장을 볼 수 있다. 안규철 작가가 디자인한 것인데, 한쪽 문에는 ‘Life’, 다른 문에는 ‘Art’라는 단어가 적혀 있다. 예술과 삶이라는 두 개의 단어는 이 공간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책방 곳곳에 여러 작가의 작품이 놓여 있는데, 그 작품도 구매가 가능하다. 가장 큰 차별점은 역시 도록이다. 해외 미술관의 도록은 국내 대형 서점에 가도 구하기 어렵다. 미술 책방이 그 서적들을 국내에 맨 먼저 소개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이 공간이 어떤 역할을 하길 바라나?
전시를 감상하고, 향유하는 일에 정답은 없다. 미술관을 찾는 관람객이 전시를 다 관람한 다음 책방에 들러 자신만의 방식으로 전시에 대한 감상을 정리하고, 확장할 수 있으면 좋겠다. 미술 책방은 늘 활짝 열려 있을 테니 얼마든지 머물다 가도 좋다. 그런 공간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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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f r. S EOUL 

‘0fr’의 ‘0’는 알파벳 ‘o’가 아니라 아무것도 없음을 의미하는 숫자 ‘0’이다. 1996년 파리 마레 지구에 문을 연 ‘0fr. Paris’는 동네 책방이자 사진집과 여행책을 자체 제작하는 출판사로 입소문을 타며 어느덧 파리 여행의 필수 코스가 됐다. 그곳에서 다프트 펑크가 처음으로 플레이했고, 아직 소년이던 자크뮈스가 죽치고 앉아 이런저런 책을 들춰보면서 디자이너의 꿈을 키웠다니, 낭만에 환상을 더할 수밖에 없다. 마레 지구를 닮아 강과 숲을 끼고 있는 서울숲 언저리에 오에프알 서울이 유난하지 않게, 가만히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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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fr. Grand Cata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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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ove Trip Across Korea by Alexander Thumerelle>

박지수, 박초롬 | 오에프알 서울 대표

0fr. Seoul이 문을 연 계기는 무엇인가?
오에프알 파리를 찾는 한국인 여행객이 많아지면서 대표인 알렉산더 튀메렐(이하 알렉스)도 한국에 관심을 두게 됐다. 마침 프랑스 유학 중이던 박지수 대표가 서점의 단골이었는데, 오랜 기간 주인장과 손님으로 유대관계를 쌓으면서 같은 결을 공유하게 되었다. 어느 날 알렉스가 오에프알 서울의 오픈과 운영을 제안해왔다. 지금은 빈티지 소품을 다루는 우리의 자체 편집 브랜드 미라벨(Mirabelle)과 같은 공간을 나누어 쓰고 있다.

어떤 책을 볼 수 있나?
일반 서점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예술, 패션 관련 서적과 매거진을 알렉스가 파리에서 직접 보내주고 있다. 협소한 규모의 동네 책방이기 때문에 다양한 종류의 책을 많이 들여놓을 수는 없다. 우리가 볼 때 참신함과 독창성을 지닌 서적을 선별해서 소개하고 있다. 1930년 루브르 박물관에서 만든 전시 도록 같은 귀한 책도 보유하고 있다.

다른 서점과의 차별점은 무엇인가?
오에프알이 출간한 책은 오로지 이곳에서만 구할 수 있다. 오에프알 갤러리에서 전시한 작가의 작품집이나 여행책 시리즈인 <Bon Voyage>가 그렇다. <A Love Trip Across Korea by Alexander Thumerelle>은 서울 매장 오픈 즈음 한국을 방문한 알렉스가 그의 아내와 한 달간 한국을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과 글을 엮은 책이다. 서울에서부터 작은 시골 마을까지 누비고 다닌 이방인의 감상이 흥미롭게 담겨 있다. <0fr. Grand Catalogue> 시리즈는 오에프알 갤러리에서 전시한 작가의 작업을 엮은 것인데, 바로 뜯어서 액자를 하거나 포스터로 쓸 수 있다.

이 공간이 어떤 역할을 하길 바라나?
프랑스 감성이 가득 담긴 책과 라이프스타일 소품을 구경하면서 쉬어갈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 더 귀하고 특별한 책, 아트피스와 포스터를 소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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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 MUSE 

종이 잡지에 미래가 있을까? 잡지를 아트북이라 할 수 있을까? 디지털을 우선한다면 그에 맞게끔 종이책을 싹 다 바꿔버리는 혁신도 필요할까? 요즘 누가 잡지를 볼까? 쉽지 않은 물음과 의심이 꼬리를 문다. 그럼에도 종이가 가진 매력은 좀 특수하다. 시각적인 면이나 촉각적인 면뿐만 아니라 청각적인 면에서도 그렇다. ‘페이퍼 뮤즈’는 ‘종이 잡지 = 영감을 주는 뮤즈’라는 의미를 담은 서점이다. 주인의 깐깐한 미감을 통과한 패션 잡지만이 전 세계에서 날아들 자격을 얻는다. 잡지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페이퍼 뮤즈도 2012년부터 여전히 한남동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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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tastic 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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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AW>

성경원 | 페이퍼 뮤즈 대표

페이퍼 뮤즈가 문을 연 계기는 무엇인가?
어릴 때부터 잡지를 좋아했다. 그 속의 모델과 사진가를 동경했던 것 같다. 명동 중국 대사관 앞에 즐비한 외국잡지 서점의 단골일 정도였으니까. 꽤 오래 전자 회사를 다녔는데, 회사 생활이라는 게 녹록지 않았다. 너무 지쳐서 그만두고 나오긴 했지만 뭘 새롭게 시작하자니 애매한 나이더라.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걸 팔기로 했다.

어떤 책을 볼 수 있나?
내 개인의 취향으로 고른 정기간행물을 판매한다. 내가 좋아해서 보고 싶은 잡지를 위주로 하지만, 사람들이 많이 찾는 잡지도 구비해놓는다. 사진가와 스타일리스트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인데, 뻔한 패션 이미지보다는 좀 이질적인 장르나 이슈가 아트적으로 섞인 책을 좋아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표지다. 표지만 딱 봐도 잡지 한 권의 흐름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서점과의 차별점은 무엇인가?
이제 어딜 가든 외국 잡지 구하는 게 쉬워졌기 때문에 특별할 건 없다. 다만, 내 기준을 통과한 책 위주로 판매하다 보니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은 좀 편한 게 있을 것 같다. 이달은 <판타스틱 맨>을 흥미롭게 봤는데, 갑자기 정사각형으로 판형을 바꾸는 파격을 감행했더라. 책을 펼쳤을 때 좀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무언가를 넘어선 느낌이었다고 할까? 잡지를 넘어 아트에 가까워진 것 같다. 유효기간이 만료되어도 버리기 아까운 책이다. <SSAW>는 핀란드 잡지인데, <아크네 페이퍼>를 만들던 사람이 참여한 것으로 알고 있다. 사진의 감도가 돋보인다. 패션 사진이나 예술 사진을 떠나서 동시대 사진을 최전선에서 리드하는 잡지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얼굴과 이미지를 발굴하는 일도 참 잘한다.

이 공간이 어떤 역할을 하길 바라나?
그런 거창한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래도 잡지를 사고 싶거나 사야 할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서점으로 남을 수 있다면 기쁘겠다. 페이퍼 뮤즈를 찾는 손님 중에는 잡지를 잘 아는 사람도 있고, 부정적인 선입견을 품은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이 우연히 서점에 들렀다가 잡지에 대해 좀 다른 생각을 하며 나설 수 있기를 바란다. 잡지를 만드는 분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