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옷이 아닌 태도로 인식되는 요즘 패션에 대한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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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만 해도 패션은 곧 돈이었다. 프리미엄이라는 이름을 달고 수십 만원에 팔리던 청바지를 입고 로고를 대놓고 새긴 브랜드의 가방을 들어야 옷 좀 잘 입는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 시절의 패션은 곧 부(Luxury)의 상징이었다. 그런 시절 속에서도, 주류 속에서 비주류를 원했던 소수의 사람들은 지적인 유머와 실험적인 세부를 지녔던 브랜드에 광적으로 집착했다. 헬무트 랭이나 마틴 마르지엘라, 라프 시몬스가 만든 옷을 입으면 그 시절의 유행은 그저 통속적이고 진부한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유행이 즉각적으로 확산되고 판매에 모든 것이 편중된 동시대적 흐름은 많은 것을 퇴색시켰다. 찬란한 시절도 언젠가는 쇠락하듯 기존의 패션을 통쾌하게 비틀며 독보적인 위치에 놓였던 브랜드들의 희소적 가치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대신 성미 급한 요즘 젊은이들의 기질은 대체로 옷을 잘 입게 만들었고, 평균적으로 유행의 흐름을 잘 알게 만들었다.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서 몇몇 디자이너는 10년 전의 마틴 마르지엘라처럼 명민하고 계산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단순히 옷을 만드는 것이 아닌 패션을 매개로 무엇인가를 기획(Curating)하고 편집(Editing)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거의 모든 것을 스스로 일궈냈다. 포스트 소비에트 문화를 바탕으로 한 고샤 루브친스키나 뎀나 바잘리아 같은 디자이너들은 스스로 기획자가 되어 거대 기업을 거치지 않아도 성공 궤도에의 진입이 가능함을 증명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전형적인 하이 패션을 노골적으로 조롱했다. 고급스러운 소재와 우수한 재단으로 이루어진 가장 좋은 옷을 의도적으로 못생긴 모델에게 입혀 우스꽝스러운 포즈나 표정을 취하게 만든 것이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그들은 그런 역설적인 방식으로 하위 문화의 영역에 있던 여러 방면의 일반인들을 부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들을 모델이 아니라 일반인이라는 의미로 ‘노델(Nodel)’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이젠 많은 브랜드에서 주변의 친구들을 무대에 올리고 카메라 앞에 세우고 있다.

이처럼 패션이 더 이상 ‘옷’이 아닌 ‘태도’가 되어버린 시점에서 <032c> 매거진에서 만드는 옷 또한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매거진에서 완성한 의류 라인이 피티 워모에 진출하고 패션위크에 선다는 건 예전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 아니었나. 그건 문화와 건축, 정치 등의 분야에 있어 심도 있게 다룰 줄 아는 그들만의 관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일 테다. 프랭크 오션과 디터 람스를 한 책에 실을 줄 아는 비할 데 없는 시선과 대범한 태도는 이것이 창간한 지 18년이나 된 것이란 걸 몰라도, 이것이 팬톤 컬러 차트에서 이름을 가져왔다는 것을 몰라도 젊은 세대들로 하여금 이 매거진의 빨간색 로고가 큼직하게 새겨진 옷을 사게끔 만들고 있다.

또한 이런 틈에서 완고한 하이엔드 브랜드들은 그들이 저급한 것으로 여겼던 스트리트 브랜드에 계속해서 손을 내밀고 있다. 마치 앞으로 그들 없이 자신들이 결코 생존할 수 없다는 것처럼 말이다. 엄숙하고 진지한 것들을 되려 하찮고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요즘 젊은이들 앞에서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명품 가방은 그저 사치와 허영에 불과한 것일 테고, 지나치게 무례할 정도로 방종한 기질의 요즘 젊은이들 앞에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 스트리트 브랜드야말로 온갖 아름다움이 충돌하는 패션으로 다가올 테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루이 비통이 슈프림에게, 질 샌더가 루크 마이어에게, 디올이 매튜 윌리엄스에게 계속해서 협업이란 단어 아래 공동 작업을 요청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하이엔드 브랜드가 호시탐탐 노리는 스트리트 브랜드의 기질, 즉 거리 문화의 거리낌 없는 호기로움은 기능성에 충실한 못생긴 옷을 유행이란 이름으로 자리 잡게 만들고 있기도 하다. 만원짜리 티셔츠를 입어도 내 것처럼 입으면 멋지다는 칭찬을 받는 시절 속에 살게 되며, 그저 가지고 있는 옷을 기능에 충실하게 섞어 입는 방식이 가장 멋진 것으로 통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여름이니 샌들을 신지만 땀이 나는 걸 방지하기 위해 양말을 신는, 지극히 기능성에 충실한 방식이 오히려 예전엔 짐작하지 못했던 새로운 시도로 다가오고 있는 셈이다. 명품이라는 이름을 달고 활개치는 브랜드들 사이에서 기능적인 면모가 충실한 스톤 아일랜드나 파타고니아, 아크테릭스 같은 브랜드들에게서는 지루할 틈을 찾을 수 없지 않나? ‘고프코어(Gorpcore)’라 이름 붙은 이런 흐름 속에서 지저분하고 남루하기 짝이 없는 샤이아 라보프의 스타일이 누구보다 매혹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얼마 전까지 다녔던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비주얼 디렉팅이라 이름 붙은 내가 소속됐던 팀은 유별난 팀으로 통용됐다. 남자 직원이었던 이사는 높은 굽의 생 로랑 부츠를 신고 다니며 걸을 때마다 여자 걸음걸이처럼 또각또각 소리를 내고 다녔고, 여자 직원이었던 나는 알릭스의 테크니컬 점퍼나 GmbH의 트랙 팬츠를 입고 다닌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그 덕분에 남자에게 치마를 입히고 하이힐을 신기는 스테파노 필라티의 랜덤 아이덴티티와 같은 브랜드를 그 어느 곳보다 보수적이라는 엔터테인먼트 시장에서 아이돌 가수에게 입힐 수 있게 된 설득력 있는 명분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이제 패션 분야가 아닌 일반 사람들 사이에서도 성향과 정체성을 나누는 일이 무의미해지고 있다. 이 시점에서 불현듯 사진가 윌리 반데페르의 말이 생각났다. 젊은이들을 가장 동시대적으로 담아내는 그의 패션 사진 속에서 그는 젊음을 나이(Age)로 정의하는 것이 아닌, 감정적이고 정서적(Emotional)인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의 말처럼 패션은 이제 옷 그 이상의 기능을 하고 있다. 사람들의 감정과 사상, 정서와 생각을 대변하는 가장 강력한 매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디자이너들에겐 절대적으로 디렉팅(Directing)이 필요해지고 있고, 소비자들에겐 절대적으로 자아(Ego)가 중요해지고 있다. 이 두 가지가 패션을 좌지우지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으며, 자기 내키는 대로 밀어붙이는 것이 핵심이 되고 있다. 모델이 아닌 일반인들, 하위 문화에서 활동하는 아티스트들, 기능성에 충실한 브랜드들, 제멋대로 겹쳐 입는 방식들, 성의 정체성이 모호한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동시대 패션을 일궈가고 있는 것이다. 예전엔 틀렸지만 지금엔 맞는 의외의 것들이 종잡을 수 없는 동시대 젊은이들에 의해 이렇게 또 하나의 방식으로 시대를 관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