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은 얕다. 또 닿을 듯 가깝다. 홍상수의 영화 <극장전>에서처럼 그 끝에 삐죽 솟은 서울타워는 때론 도시에서 헤매는 이들이 제 길을 찾을 수 있게 돕는 확실한 기준이자 지표가 된다. 서울에는 이미 많고도 많은 길이 있지만, 요란하지 않은 새로운 길을 걷고 싶을 때 이태원 언덕은 썩 괜찮은 선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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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월로 322

서울시 용산구 소월로 322에 자리 잡은 그랜드 하얏트 서울은 1978년 7월 1일 문을 연 국내 최고령 호텔 중 하나다. 꼭 섬처럼, 또 요새와 같은 형태로 산중턱에 거대한 특급 호텔이 들어선 건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정부는 경제개발계획을 이유로 남산을 깎아 외국인 아파트와 단독주택 등을 마구 지었다. 1971년 남산 중턱에는 고층 아파트 2개 동이 들어섰는데, 이 건물을 시찰하러 온 박정희의 눈에 주변 군사 시설이 거슬렸고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다. 독재의 시대, 1인자의 “철거하고 그 자리에 최고급 호텔이나 하나 지으라”는 지시는 일사불란한 실행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뚝딱 생긴 호텔의 홀수 방 번호에서는 서울 타워를 비롯한 남산 전체를, 짝수 방 번호에서는 한강과 강남 시내를 훤히 내다볼 수 있는데 양쪽 방에서 바라본 서울의 뷰는 달의 이쪽과 저쪽처럼 다르다. 1994년 도시 경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2동의 아파트는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해 없애버렸지만 그랜드 하얏트 호텔은 여전히 서울의 대표적인 특급호텔로 터줏대감 자리를 지키며 하룻밤 자보고 싶은 ‘호텔’의 대명사로 남았다. 막상 비싼 값을 치르고 룸으로 향하면 세월의 때가 그대로 묻어나는 룸 컨디션에 실망하는 투숙객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그랜드 하얏트는 지난 2016년부터 대대적인 객실 리노베이션에 나섰고 올해 5월, 3년에 걸쳐 615개에 이르는 전 객실 리노베이션을 완료했다. 아드리안 슬레이터 총지배인이 말했다. “고객들의 요구와 기대를 반영해 객실에 현대적인 감각을 더했습니다. 바쁜 일상에 지친 고객이 그랜드 하얏트 서울의 스위트룸에서 서울의 경치를 보며 휴식을 취하고, 재충전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풍경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호텔은 늙어도 풍경은 늙는 법이 없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류이치 사카모토 부부와 그랜드 하얏트 호텔 1층 다이닝 ‘테라스’에 마주앉은 기억이 있다. 약속된 시간을 훌쩍 넘긴 인터뷰를 마치고 그와 함께 잠시 밖으로 나섰을 때 마침 몇 주째 이어지던 지독한 미세먼지를 씻어낼 반가운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서울에 오면 항상 이 호텔에서 잠을 자요. 마음 편히 푹 잘 수 있어서 좋아하죠. 저는 뉴욕과 도쿄를 좋아하고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여기서 내려다보는 서울의 풍경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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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언덕길

그랜드 하얏트 서울의 앞마당을 지나 건물을 등진 채 바깥으로 나오면 크게 두 가지 길을 선택할 수 있다. 그 이름은 모두 ‘소월로’인데 동쪽으로는 버티고개와 약수, 동대문, 아니면 바로 강남으로 나갈 수 있고, 서쪽으로 향하면 남대문과 시청을 비롯한 서울 도심으로 치고 들 수 있다. 서쪽 소월로로 진입하기 직전에 등장하는 언덕길이 전국 팔도에 각종 ‘리단’ 길의 씨앗을 뿌린 그 원조, 경리단길의 입구다. 이토록 다양한 길 중, 호텔 정문과 이어진 담벼락을 끼고 바로 돌면 나오는 샛길이 바로 ‘회나무로길’이다. 이 길 안에는 구주소를 기준으로 했을 때 행정구역상 이태원동과 한남동이 동시에 존재한다. 이때부터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지는데 어느 순간 오가는 인적이 지극히, 때론 아예 없어지는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왠지 곳곳의 CCTV는 더 많은 것처럼 느껴지고 비슷한 간격을 두고 곳곳에 위치한 늙은 사설 경비 초소는 어쩐지 주눅 들게 만드는 공기를 조성한다. 딱 봐도 거대한 저택의 담벼락은 하늘에라도 닿을 듯 높이 솟아 있으니 내부가 보이기는커녕 상상조차 쉽지 않다. 이토록 즐비한 집의 주인은 누굴까?

“여기 아래 다 재벌 총수들이 살잖아요. 삼성, LG, SK, 신세계, 농심, 아모레, GS 이런 데 총수들도 다 여기 살아요. 거래할 때 뭐 우리 같은 부동산을 통하나요? 그들끼리 사고파는데 뭐 싸면 1백억, 비싸면 2백억 가까이한다고 하대요. 우리는 주로 외국인들 렌트죠. 이 동네에 외국 대사관이나 대사관저도 많거든요. 그 사람들도 이 동네에 좀 살아요. 뭐 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어떤 재벌 집 안에는 에스컬레이터가 있고 뭐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경리단 입구에 있는 웰빙마트 배달원이 봤대요.” 회나무로길 초입에 위치한 오리엔트부동산의 유영아 중개사가 말했다. 그동안 우리나라 재벌가들은 종로구 평창동, 성북구 성북동, 용산구 한남동 유엔빌리지에 모여 사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최근에는 하얏트 호텔과 이태원역 사이의 이 언덕으로 모여들고 있다. 실제로 골목 곳곳에서 주택을 완전히 허물고 새로 짓는 공사장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는데, 대부분 이들이 입주할 신축 건물을 짓기 위함이라고 한다.

‘용산(龍山)’이라는 이름은 그 기세가 용을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배산임수 지형은 풍수지리상 가장 이상적인 배치로 여겨졌다. 서울 한가운데, 남산을 뒤로하고 한강을 바라보는 이 언덕에 재벌이 몰리는 건 여러모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태원 1동 예비군 훈련에 참석했다가 동네 토박이인 부녀회장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인데 조선 시대부터 남산의 맥이 흐르는 이 언덕 곳곳에 마을 수호신을 모시는 제당이 있었다고 한다. 그곳은 원래 마을굿 행사가 열리던 도당이 제당으로 변한 것인데 유교적 전통과 민속 신앙적 제례가 혼합된 형태로 꽤 오랜 기간 남아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그곳은 다시 일본이 국교로 내세운 ‘신도(神道)’의 사당인 신사(神社)로 간판을 바꿔 단다. 독립 후 동네 사람들이 맨 먼저 흔적조차 남김없이 지워버린 기억이기도 하다. 유일하게 남은 흔적은 ‘부군당’이다. 삼성 이건희 회장의 집무실로 알려진 승정원이 있는 길 끝에 1분이면 닿을 수 있다. 이건희 회장의 이태원 언덕길 사랑은 대단하다. 이 언덕에만 총 6채의 단독주택을 가지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역시 한남동과 이태원동에 각각 1채씩,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과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은 이태원동에 각각 1채씩 보유하고 있다. 신세계그룹과 중앙일보에 이르는 ‘범삼성’가의 건물을 더하면 이곳을 ‘삼성 집성촌’이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처음 이태원 언덕길에 들어서면 길을 잃을 확률이 높은데, 결국 모든 선택은 정답에 이르는 길이니, 당황한 기색을 할 필요는 없다. 어떤 길을 선택하든 가파른 언덕 아래로 무조건 내려가다 보면 덜컥 등장하는 익숙한 얼굴. 자유롭고 방만하며 왁자지껄한, 우리가 알아도 너무 잘 아는 이태원을 만나 안도의 한숨을 내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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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등장한 오아시스

비손은 이태원과 한남동을 나누는 이태원로 27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덜컥 등장한다. 아기자기한 카페는 고사하고 골목마다 흔한 편의점조차 찾을 수 없는, 오로지 높고 긴 담벼락만 길게 뻗은 삼엄한 동네에 무슨 오아시스처럼 그렇게 반기고 있다. 비손은 ‘풍부하게 흐르는 강’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으로 개업한 후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프렌치 음식을 선보인다. 테이블도 몇 개 없는 아담하고 소박한 레스토랑이지만 제대로 된 양파 수프와 달팽이 요리, 연어 스테이크를 맛볼 수 있다. 몇 번의 기웃거림 끝에 점심 영업을 막 끝낸 박원 레스토랑 비손의 대표와 마주앉았다. “이 동네에는 뭐가 새로 생기려야 생길 수도 없죠. 비손은 원래 앤티크 가구를 팔던 숍이었어요. 1988년 오픈했다고 해요. 1대 주인이 음식을 좋아해서 한 번씩 지인들을 초대해 대접했대요. 그러다가 1991년부터 본격적으로 레스토랑 영업을 시작했어요.” 비손은 1988년부터 오늘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운영자는 몇 차례 바통 터치가 있었다. 박원 대표가 비손을 맡아 한 지는 이제 10년이 좀 넘었다. “레시피는 똑같아요. 처음 것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요. 매일 저녁 7시 기타 선생님이 연주를 하는데요. 그분이 비손의 역사죠. 안형수 선생님이라고 여기서 20년간 연주하고 계세요. 정말 다양한 분이 손님으로 오시죠. 80~90%가 단골이에요. 단골이 아닌 이상 여기를 어떻게 찾아오겠어요.(웃음) 이 동네에 기업 오너가 많이 사니까 그분들도 오시고요. 몇몇 정치인도 주기적으로 찾으세요. 또 학창 시절 이태원이나 하얏트 쪽에서 좀 놀던 분들이 한두 번 들렀다가 점차 단골이 된 경우도 있고요. 해외 대사관 직원도 많이 오세요. 재미있는 게 저희 가게는 주소가 두 개예요. 지금 앉으신 데를 기준으로 왼쪽은 이태원동, 오른쪽은 한남동이거든요. 서울의 좋은 기운이 전부 모이는 곳에 앉아 계시네요.” 비손의 이웃은 구스테이크다. 현재 신사동과 이태원 두 곳에 매장이 있는데, 이태원 매장은 이태원동 733번지라는 주소를 따서 GOO STK733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비손이 전통을 갖춘 제야의 고수라면, 구스테이크는 국내 스테이크 시장에 붐을 일으킨 스타다. 특히 고기를 말리듯 숙성시켜 풍미와 질감을 살리는 드라이에이징 스테이크의 선두주자로 명성을 얻었다. 구스테이크는 자체 숙성고에서 약 4주 전후로 숙성 건조한다. 인기 메뉴는 등심과 안심을 함께 즐길 수 있는 포터하우스다. 이곳의 드라이에이징 포터하우스는 서울 시내에서 꽤 한다고 하는 곳과 비교해도 쉽사리 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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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접어들 때

여기서부터는 어느 갈림길에 서든 상관없다. 보이는 대로 쭉 뻗은 직선 주로를 내달리면 생각보다 금방 이태원역에 닿을 것이고, 서쪽으로 향하면 경리단길, 동쪽은 리움 미술관과 ‘꼼데가르송길’과 가깝게 이어진다. 하얏트 호텔에서 이태원까지 닿는 길은 말 그대로 길일 뿐이다. 소위 ‘핫’하다고 해야 할, 구경할 만한 상점은 없다. 오히려 심하게 비탈진 길에서 올라가는 걸 택하든 내려오는 걸 택하든 모두 만만하지 않은 경사도를 갖추고 있다. 봉준호의 영화 <기생충> 속 저택이 영화 세트가 아닌 현실인 상황을 인지하는 순간 어떤 위압감이나 상대적 박탈감에 빠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좀 다른 서울의 골목을 거닐어보는 건 꽤 흥미로운 산보가 될지도 모른다. “자유롭잖아요. 이태원은 서울에서 제일 시끄럽고, 제멋대로죠. 근데 길 하나만 건너면 고급 주택들이 서 있어요. 그런 분위기가 저를 열심히 살게 만들어요. 엄청난 폭력일 수도 있지만 저는 그게 좋아요. 자극적이니까요.” 지금 가장 재빠르게 치고 나가는 브랜드 젠틀몬스터의 프로젝트팀에서 일하는 젊은 디자이너 메이 킴은 말한다. 그는 매일 아침 이태원에서 회사가 있는 홍대로 달리는 택시를 잡는다. “제가 키우는 개 때문에 삽니다. 다른 건 뭐 잘 모르겠고 우리 개가 남산을 참 좋아하거든요. 개 산책시키기에 남산만 한 데가 없어요. 제가 오랫동안 한남동에만 사는 이유는 그겁니다. 제 개 때문에요.” 투박한 사투리 속에 특유의 잔정이 느껴지던 배우 배정남의 말도 기억한다. “아내가 여기에다가 집을 구했으니 저는 따를 뿐이에요. 저는 어디서든 그냥 살면 살아요. 우리 부부가 사는 동네는 한남대교를 건너면 오른쪽에 있는 북한남동이에요. 단국대학교 캠퍼스였던 ‘더 힐’, ‘유엔빌리지’와 같은 라인이죠. 아내는 이곳의 기운이 좋다고 해요. 강남과도 가깝고요.” 서울의 원조 힙스터 에스테반과 메이크업 아티스트 원조연도 한남동에 산다. 에스테반이 오래 다니고 있는 회사도 이태원 중심에 있다. 그는 주로 걸어서 출근하고, 퇴근 후 이태원 초등학교 수영장에서 물장구를 친다. 늘 그대로인 것 같지만 이태원은 오늘도 달라지고 있다. 이태원 파출소 옆 줄줄이 이어져 있던 작은 건물 몇 채가 하루아침에 사라졌고 그 땅을 하나로 묶어 대형 상가 건물을 짓고 있다. 음습한 언덕 꼭대기 지하에 숨어 살던 게이클럽 ‘트렁크’는 이태원 소방서 바로 뒤 큰길까지 나와버렸다. 주말 밤 왕복 2차선 도로에는 온통 남자만 가득하다. 한남동 ‘더 힐’ 건너편에 있던 외국인 아파트 자리에는 그에 버금가는 고급 아파트 단지 ‘나인원’이 거의 모든 공사를 마쳤다. 올해 핼러윈과 크리스마스에도 이태원은 어김없이 붐빌 것이다. 아침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한 적막만이 감돌 것이고. 여기에서는 누구나 혼자가 될 수 있고 또 누구나 여럿일 수 있다. 내려왔으니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다. 하늘 끝과 땅끝이 동시에 존재하는 이태원에서 그랜드 하얏트까지 오르는 길은 생각보다 멀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