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움 속에 핀 꽃, 드라마틱한 리본, 아슬아슬한 망사, 과장된 레이스 등의 디테일로 완성하는 다크 로맨티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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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무수히 많은 가치 사이에 존재한다. 수수와 욕망 사이, 진실과 허영 사이, 방임과 집착 사이, 수긍(침묵)과 반항 사이… 다크 로맨티시즘은 이런 맥락에서 탄생했다. 어둡지만 사랑스럽고, 조용하지만 판타지를 부여하는, 다시 말해서 우아하면서도 펑크적인 가치 그 어디쯤에 다크 로맨티시즘이 꽃피운다.

트렌드가 변화의 속도에만 매달릴 때 꾸준하게 제 갈 길을 가며 이따금 따라오라고 손짓하는 패션하우스가 있다. 사라 버튼이 이끄는 알렉산더 맥퀸도 그중 하나다. 이번 시즌, 사라 버튼은 자신의 고향인 영국 북부의 원단 공장에서 영감을 받았노라 이야기했다.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을 것 같은 재단이 잘된 슈트에 언밸런스한 커팅, 소재의 레이어링, 드라마틱한 장미 디테일을 더해 다크 로맨티시즘을 완성했다. 빠르기만 한 기계로는 해낼 수 없는, 장인의 손으로 직접 이뤄낸 결과물이다. 잘 재단한 슈트와 실키한 레드 컬러의 장미 모양 퍼프 숄더는 언뜻 상반된 느낌을 주지만 그렇기에 더욱 강렬한 울림이 있다. 양극의 가치를 모두 흡수하고자 하는 요즘 트렌드를 알렉산더 맥퀸 식으로 해석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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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마다 풍성한 꽃 잔치를 여는 에르뎀 모랄리오글루는 장미와 사랑에 빠졌다. 사랑과 포러포즈를 뜻하면서도 가시의 위협이 뒤따르는 양면성을 지닌 꽃. 그래서인지 장미가 녹아든 에르뎀의 옷은 로맨틱하지만 어느 하나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는다. 도도하다는 말로는 모자란, 클래스가 다른 왕족의 의상 같다고나 할까?(실제로 에르뎀 모랄리오글루는 로마의 귀족 팜필리 가문의 마지막 공주, 오리에타 도리아 팜필리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다채로운 프린트, 반짝이는 자수들, 풍성한 볼륨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데 커다란 리본 장식과 메시 소재 헤드기어, 깃털을 단 가방을 더해 클래식하고도 화려한 다크 로맨티시즘의 정수를 보여준다.

화려한 패턴이 시그니처인 리처드 퀸 역시 다크 로맨티시즘에 힘을 보탰다. 데뷔하자마자 영국 패션을 리드하는 디자이너로 빠르게 성장 중인 그는 보다 다양한 패턴과 실루엣에 집중했다. 각양각색의 플라워 패턴을 기본으로, 도트, 체크, 기하학적 패턴이 뒤를 따랐다. 실루엣은 1940년대 디올의 뉴 룩처럼 허리를 바짝 조이고 골반과 엉덩이 라인을 풍성하게 만들어 웅장함을 더했다. 여기에 살이 드러나는 곳 대부분에 검은색 라텍스 소재의 이너웨어를 레이어드했다. 화려한 레이디 룩이 리처드 퀸만의 쿠튀르이자 다크 로맨티시즘이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라텍스 이너웨어가 전혀 새로운 분위기를 완성했다. 완벽하게, 우아하면서도 펑크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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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도 센슈얼한 코드를 더한 크리스토퍼 케인, 보다 펑크적인 요소를 부각한 버버리, 고딕 무드를 더한 프라다, 기괴함의 아름다움을 사랑스럽게 풀어낸 시몬 로샤까지. 이번 시즌 다크 로맨티시즘이 펼쳐 보이는 스펙트럼은 황홀함 그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