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루어> 편집팀 15명에게 귀하게 간직한 기념품과 지극히 사적인 그 기억에 관해 물었다. 무언가를 기념한다는 건 이토록 사소한 일인 동시에,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일이다. <얼루어>의 지난 16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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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슈타트

아이를 낳고, 전에 없던 두려움과 불안함이 늘었건만 이상하게 여행엔 주저함이 없었다. 그렇게 세 돌도 안 된 아이와 다닌 여행지가 15개국, 75개 도시다. 부다페스트에서 온천을 하고 비엔나로 넘어가 클림트의 작품을 보고 할슈타트에서 산책을 하며 한숨을 돌리고 있을 때였다. 잔잔한 호수 주변에 장난감 가게가 늘어서 있었고 하얀 수염이 덥수룩한 할아버지가 가게 구석에서 나무 인형을 깎고 있었다. 보통 떼를 쓰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아이는 나무 인형을 꼭 가지겠다고 고집했다. ‘여기서 직접 만들었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알고 보니 크레텍이란 체코의 만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로 기성품이었다. 반쯤 속아 산 셈이다. 용수철이 길어 바닥에 끌리던 장난감은 아이의 키보다 짤뚱해졌고 요즘은 관심도 없다. 그래도 내겐 반짝이던 물 반사, 비현실적이었던 호수 마을의 정경, 빵 조각에 필사적으로 물질을 하던 백조, 그리고 뒤뚱거리며 걸음마를 하던 아이의 뒷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날의 평온함도 함께.
– 이화진(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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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2007년,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뉴욕에 갔다. 패션 스쿨과 집을 오가며 혼자만의 싸움을 이어갈 무렵, 입생로랑에서 이런 메시지가 왔다. ‘스테파노 필라티의 세 번째 매니페스토를 체험할 기회. 만약 당신이 뉴욕, 도쿄, 홍콩 또는 파리에 있다면 당신은 해당 지역의 YSL 매장에서 이 캠페인의 내용을 담은 에코백을 겟, 하시오’라고. 때마침 아파서 드러누워 있던 나를 위해 뉴욕에서 사귄 친구가 오랜 줄을 기다려 가방을 받아왔다. 너를 응원해라는 스위트한 메시지와 함께. 친구의 응원대로 뉴욕에 머무는 동안 주야장천 메고 다니며 희한한 짓도 많이 하고, 별별 꿈을 다 키웠더랬다. 에코백 컬렉션 제일 앞에 걸어둔 것이 바로 이 가방. 꽤 길었던 뉴욕 여행의 하나뿐인 기념품으로 남았다. 그런데 이런 훈훈한 에피소드를 원하는 게 아닌 것 같아 뒤가 찜찜하다.
– 김지은(패션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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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와 방콕

열대식물이 가득한 나라에 가면 도시의 것들은 온통 무겁고 거추장스러워진다. 나중엔 우스워 보이는 코끼리바지처럼 그곳의 온도에 맞는 물건을 자연스럽게 사게 된다. 모자는 하와이 와이키키의 한 파나마 햇 전문점에서 구입한 것으로, 잃어버리지만 않는다면 평생 쓸 것처럼 질이 좋다. 가방은 방콕에서 한 달간 머물며 찾아냈다. 오리엔탈 방콕 호텔 옆의 작은 가게의 주인은 ‘핸드메이드’라며 조금도 깎아주지 않았는데, 1년 후 지인들의 오더를 잔뜩 받아 다시 찾아갔을 때에는 가게가 사라지고 없었다.
– 허윤선(피처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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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세점

솔직히 술 마시러 여행 간다. 갑자기 발견한 풍경에 홀려 일정을 모두 미루고 만취해도 아무런 간섭 없이 오롯이 행복할 수 있기 때문.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살짝 취하면 그날 하루가 온종일 반짝거린다 진짜 진짜로. 그렇기 때문에 도착하자마자 이번 여행의 술을 정하는 것이 기본 루틴. 일상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때의 기분을 만끽하기 위해 여행 중에 마셨던 술을 한두 병씩 늘 사 오는데, 그래서 올해부터는 두고두고 마실 수 있는 독주에 눈을 돌렸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위스키를 마실 때 맥주를 안주 삼아 즐기기도 한단다.
– 황선미(디지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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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신혼여행의 마지막 날 뉴욕에서였다.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쇼핑하고 나오던 길, 누군가가 툭 하고 건네온 것을 자연스레 남편이 건네받았다. 시디였다. 뉴욕에서 뮤지션들이 시디를 나눠주고 강제적인 기부를 요구하는 것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나 설마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날 줄이야. 한국에서 전단지를 받듯 습관적으로 받아 든 시디를 돌려주겠다고 했다가 덩치 큰 두 명의 남성에게 욕 세례를 당하고 말았다. 영어를 못하는 남편은 무슨 일인지 몰라 큰 눈으로 쳐다만 볼 뿐. 행복했던 신혼여행의 마무리가 낯선 사람의 폭언이라니! 앞으로는 낯선 이가 주는 것은 무심코 받지 않는 걸로.
– 예지영(디지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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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펜하겐

내가 화장대 위에 올려두고 목걸이 거치대로 사용하는 이 손 오브제는 코펜하겐 시내의 일룸 볼리거스라는 대표적인 인테리어 편집숍에서 구매한 것이다. 이뿐 아니라 포멕스로 만들어진 사슴 머리 모양 장식과 칼슨의 벽걸이 시계 등 신혼집의 포인트가 되었던 소품은 모두 이곳에서 샀었다. 물론 한국에서도 구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우리 집에 있는 헤이 오브제는 덴마크 코펜하겐의 쇼핑 성지로 불리는 일룸 볼리거스에서 산 것이라 더욱 특별하다 믿는다. 손맛이 더해진 것이 아니라 발품맛? 비행기 맛이라고 해야 할까?
– 이정혜(뷰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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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 대성당 앞에는 매주 목요일마다 작은 플리마켓이 열린다. 그릇, 액세서리 등 각종 골동품을 구경하며 돌아다니다 보니 종이 뭉텅이를 앙증맞게 포장한 작은 곽들이 눈에 들어왔다. 용도도 묻지 않고 몇 개를 주워담아 계산했는데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알 길이 없더라. 물건을 판매한 할아버지는 일주일 뒤에나 다시 만날 수 있었고, 나는 3일 뒤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으니 말이다. 나중에 사람들에게 기념품으로 이 물건을 선물하면서 궐련지라는 것을 알게 됐다.
– 김민지(신입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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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

이직을 앞두고 허락된 시간은 단 3일, 잠깐이나마 마감을 잊고 카오산로드의 방탕함, 자유로움에 빠져 나를 놔버리고 싶었다. 잔뜩 취할 준비를 하고 방콕에 도착했건만 애석하게도 시간은 오후 1시. 민망하리만큼 쨍한 해가 지기만을 기다리며 무작정 짜뚜짝 시장으로 향했다. 좁은 골목 사이사이를 방황하던 그때, 새빨간 원피스가 눈에 들어왔다. 200바트가 조금 넘는 가격이었나? 홀린 듯 사들여서 입고 한여름 밤의 카오산로드를 즐겼다. 평소 시커먼 옷만 고집하던 내가 왜 이토록 알록달록한 패턴을 손에 쥐었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 황혜진(뷰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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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이의 집

오월이는 내가 고3 때 데려온 고양이다. 올해로 열두 살이 된 ‘코숏’ 여자 아이. 오월이는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는데 오월이가 흘리고 다니는 수염을 모으기 시작했다. 고양이 수염을 잘 모으면 행운이 온다는 미신이 있던가. 그 수염을 항상 지갑에 넣어 다닌다. 한 번씩 누군가 신기한 눈빛으로 달라고 하면 꺼내 주기도 하는데, 그럼 행운을 나눠주는 기분이 든다. 독립했기에 한 번씩 부모님 댁에 가면 오월이의 사랑을 갈구하는 밀당의 시간을 보낸다. 그 부드럽고 따뜻한 털을 만지는 것만큼 충분한 행운의 시간은 또 없다. 다음번 방문 땐 오월이 수염을 하나 더 건질 수 있으려나.
– 송예인(디지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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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어느 파리 출장길에서 선배와 함께 생경한 쇼핑에 나서게 된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이 곱디고운 트레이를 손에 쥐고 말았다. 파리 생토노레 거리 어디쯤 조그만 문을 열고 들어간 그날의 목적지는 ‘아스티에 드 빌라트’ 매장. 빈티지하면서도 클래식한 매력의 흰색 도자기 그릇이 가득한 그곳은 그야말로 개미지옥이었다. “전 살 게 없을 것 같은데요?” 호기롭게 뱉은 말이 무색해지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한국에도 매장은 있으나 분명 같은 가격은 아닐 것이라고 믿으며 말이다. 정신없이 이것저것 골랐는데, 그중에 하나가 이 하얀 트레이다. 예뻐서 골랐다. 생에 처음 한 ‘목적 없는 그릇 쇼핑’의 기억은 지금 에디터의 책상 위에서 야근 메이트로 남아 있다. 선배가 한 얘기가 문득 떠오른다. “이 조합으로 다시는 쇼핑하지 말자. 파산이다.”
– 이하얀(패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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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싱키

헬싱키는 별것도 없는 도시였다. 나처럼 모든 종류의 쾌락에 환장하는 애라면 더더욱 텅 빈 도시에 가까웠다. 빈티지 시장 하나가 있었는데, 오래된 가구를 서울까지 이고 지고 올 순 없었다. 한 장의 흑백 사진이 눈에 들어왔고, 모르는 이들의 웨딩 사진을 대뜸 사들였다. 1969년 2월 11일에 찍힌 사랑에 빠진 남녀의 얼굴과 몸짓. 헬싱키에서 뭘 잔뜩 사 오긴 했는데 이 사진 한 장만 지금 책상 위에 덜렁 남았다. 나는 이 사진을 볼 때마다 영영 해가 지지 않을 것처럼 밝게 빛나기만 하던 백야의 헬싱키와 여름을 생각한다. 저 얼굴들은 지금 어떻게 변했으려나.
– 최지웅(피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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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비를 몰고 다니는 사나이’인데 괌에서조차 존재감을 과시했다. 대단한 폭우였다. 하루 종일 창밖만 내다보느라 뾰로통해진 나는 기어코 수영을 하겠다며 나섰다. 발끝이 겨우 닿는 수영장에서 휘청거리며 물장구치던 작은 몸을 잡아준 것은 아빠의 손이었다. 수영을 마치고 호텔 기프트숍에서 색색깔의 조개가 가득한 유리병을 집어 들었다. 물에 푹 젖어 나른해진 몸, 여전히 따뜻하고 단단한 아빠의 손, 반짝거리는 조개껍데기들. 어쩐지 나는 온 바다를 가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책장 위에서 일렁이고 있는 5달러짜리 바다.
– 정지원(신입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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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

지금은 7살인 아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구입한 옷이다. 야구의 룰도 모르지만, 때마침 류현진 선수가 등판하는 경기가 열린다는 소식에 처음으로 가본 야구장이 바로 LA 다저스 홈구장. 그때 기념품으로 이 옷이 눈에 띄어 구입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아빠와 아들이 운동장에서 야구도 즐기고, 온 가족이 야구 경기도 같이 보러 가는 이상적인 모습을 꿈꿨지만 실제로는 TV로 야구 경기 중계도 같이 본 적이 없는 것이 현실. 생각난 김에 아들과 함께 야구 룰부터 좀 배우고, ‘두린이(두산베어스의 어린이팬’) 가입도 해야겠다.
– 서혜원(뷰티 & 디지털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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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합

이집트 다합의 거리에는 작고 예쁜 수공예품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림을 그리고 나무를 깎고 구슬을 꿰는 사람 냄새 나는 그런 것들. 등 뒤로 넓게 펼쳐진 푸른 홍해를 배경 삼아 쉼 없이 움직이는 그들을 보고 있으니 시간이 훌쩍 흘러가버렸다. 서울에서의 소진되는 시간을 멈추고 그렇게 사소한 어떤 것에 시선을 돌리는 것. 이 나무 공예품은 그 시간을 기억하고 싶어서 가져온 물건이다.
– 홍진아(디지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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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계획도 목적도 없었던 첫 베를린 여행, 급하게 짐을 싸다 문득 환전한 유로를 넣을 마땅한 지갑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빈티지 숍 라탈랑트 피드에 올라온 메종 마르지엘라 지폐 지갑을 발견했다. 마틴 마르지엘라가 디렉터로 있던 시절의 물건이라는 것과 구김이 잔뜩 있는 빈티지한 질감에 반해 출국 5시간 전, 라탈랑트로 달려가 단숨에 구입해버렸다. 소매치기가 만연한 유럽이라지만, 홀로 떠난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건 이 지갑과의 운명적인 만남 덕택이 아니었나 싶다.
– 이다솔(신입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