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태워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태워본 사람은 없다는 태닝의 계절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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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적으로만 볼 때 선탠은 햇빛에 피부를 그을리는 행위, 또는 이를 통해 피부에 발생한 그을음을 가리킨다. 당연히 원인과 목적을 불문하고 일광에 의한 피부 착색을 모두 선탠이라 부를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선탠 중독자다.

해가 뜨면 호텔 수영장에 풍덩하거나, 근처 아무도 없는 한적한 해변에 나가 벗을 수 있는 옷은 다 벗어 던진 채 일단 태양 아래 드러눕고 본다. 정말 다 벗어야 또 그 맛. 이는 단순한 일탈이기도 하거니와 팍팍한 삶을 살아내야만 할 때 꺼내 드는 어느 중독자의 응급처치이기도 하다. 남국의 해변은 주로 태양이 귀한 러시아를 비롯한 북반구 사람들이 바캉스로 찾는다. 모두 벌겋게 익은 상기된 훈제 연어처럼 보인다. 그들은 마치 태양을 숭배라도 하듯 양팔을 벌린 채 태양빛을 온몸 깊숙이 받아들인다. 연일 최고 온도를 경신하고 있는 서울의 삼복더위, 지표면이 펄펄 끓을수록 흥분되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 이건 영 미친 사람의 헛소리가 아니다. 하지만 서울은 대도시다. 강렬한 태양이 굽어살펴 아무 데서나 훌렁훌렁 벗고 드러누워 볕을 쬐는 건 누군가의 SNS에 영영 박제되기 딱 좋은 일이다.

염려 마시라. 그 순간을 위해 1975년 독일의 산업공학자 프리드리히 볼프는 최초의 태닝 기계를 개발했다. 프리드리히 볼프는 우울증에 걸린 운동선수를 상대로 자외선램프의 효과, 즉 밝은 분위기가 주는 운동능력 향상을 실험하던 중 흥미로운 부작용을 발견했다. 우연히 램프에 노출된 운동선수의 피부가 검게 그을린 것을 확인한건데 그 덕분에 야외로 나가지 않고서도 실내에서 간편하게 햇빛 노출의 혜택을 누리며 아름다운 황갈색 피부를 실현할 수 있게 됐다. 그가 처음 개발한 선탠 침대는 실은 뼈 질환 치료, 변비, 피부병, 기침과 우울증 등 주로 환자 치료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을 뿐, 피부에 마성의 구릿빛 매력을 더하는 미용기계는 아니었다. 아무튼 덕분에 우리는 맑게 빛나는 태양 한 번 보기 힘든 장마철이나 미세먼지 가득한 봄날, 우중충한 겨울까지 한 평도 채 되지 않는 태닝 기계에 들어가 적당한 양의 자외선을 쬐며 기분을 나아지게 만듦과 동시에 건강하게 섹시한 구릿빛 피부를 얻을 수 있게 됐다. ‘벗고탠’. 내가 등록한 태닝숍 이름이다. 어쩜 골라도 그런 이름을 골랐냐고 누군가는 히죽거리지만 제대로 태우기 위해 제대로 벗는 건, 이를테면 제대로 먹기 위해선 제대로 입을 벌려야 한다는 물리의 기초상식과 다름없어서 달리 받아칠 말도 없다. 벗고탠은 1년에 30~40만원대에 태닝 로션과 보습 로션을 1개씩 제공하는데, 예약과 출입은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하는 무인매장이다. 57핀 최신 파워 머신 4대가 당당히 자리 잡은 태닝숍에 출입용 애플리케이션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보다 앞서 기계에 들어간 몸에서 발산하는 후끈한 열기와 코코넛 향의 태닝 로션 냄새가 진동한다. 발칙한 경우 그 순간 ‘벗고탠’에서 벌어지는 야릇한 일탈을 소재로 한 단편소설 한 편을 떠올릴 수 있을 거다.

기계 태닝은 빠르고 간편하지만 그래도 선탠 중독자가 꿈꾸는 1순위는 기필코 한여름의 태양 아래 몸을 뉘는 일이다. 이 때 한강 야외 수영장은 그야말로 ‘꿀’이다. 가깝고, 성인 5천 원이라는 저렴한 금액으로 온종일 선탠을 할 수 있다. 올해 한강 수영장의 운영 기간은 6월 28일부터 8월 25일까지다. 선탠은 건강과 미용에 필요한 필수 야외 활동이다. 최근 연 구 결과에 따르면 적당한 양의 자외선은 우리 몸을 건강하 게 해주며 기분 또한 행복하게 해준다고 한다. 그래서 기분 이 별로거나 말 못할 스트레스를 왕창 받았을 때 바깥에 앉 아 햇볕을 쬐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한결 기분이 나아지는 것. 사람은 콜레스테롤을 피부에서 콜레칼시페롤, 즉 비타 민 D로 전환할 수 있는데 이때 무엇보다 필요한 건 태양광이 다. 비타민 D는 피부를 탄력 있게 만들어줄 뿐 아니라 뼈를 단단하게 만들어주고, 지구력과 집중력 향상에 도움을 준다 . 또한 적당한 양의 자외선은 모공 속 항박테리아의 활동을 활 성화해 여드름을 억제할 뿐 아니라 습진이나 건선 등에 의한 피부 상태 악화를 방지해준다. 나아가 태양은 장기적으로는 우울증 예방에도 도움을 준다. 피부가 자외선을 흡수하면서 몸속에 엔도르핀을 생성하는데 이 엔도르핀이 몸을 빙빙 돌 면서 기분을 점점 좋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쩌면 우 리가 태양을 좇는 건 멀쩡하게 잘 살기 위한 무의식의 반응 인지도 모를 일이다.

구릿빛 피부는 여름의 축복이다. 나는 더, 더, 더를 외치며 그 을린 갈색 피부를 만들기 위해 오늘도 작열하는 태양 아래 몸을 바친다. 무슨 재물처럼. 더 바싹 익어라. 더 노릇하게 구워져라. 그런데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렇게 갈색 피 부를 추종하는 사람 중 10% 이상이 태닝할 때 만들어지는 엔 도르핀에 중독 증상을 보인다고 한다. 마치 탄수화물 중독이 나 설탕 중독, 카페인 중독처럼 태닝 중독에 빠지는 것이다 . 이들은 실제로 태양빛을 오랫동안 보지 못하면 마약 중독자 에서 볼 수 있는 징후가 나타나기도 한단다. 신경과민, 메스 꺼움이나 정서불안 같은 것 말이다. 미국 예일 공공보건대학 원 브렌다 카트멜 박사팀은 태닝을 한 500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해 이 같은 결과를 얻었다고 발표했다. 조사 결 과 여성은 남성보다 태닝 의존도가 약 7배 더 높은 것으로 나 타났다. 또 태닝 의존도가 높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계절성 정서장애와 알코올 의존 병력이 있을 확률이 각 각 3배, 6배 올라갔고 운동 중독이 될 확률도 더 높았다.

처음 ‘선탠 중독’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건 순전히 장난이 었다. 나는 단순히 더 강력한 구릿빛 피부를 원했기 때문이 다. 하지만 뭐든 과한 건 모자란 것보다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여름의 완벽한 태닝을 위한 10가지 비법’이니 ‘태 닝 제대로 하는 법’ , ‘태닝 시 꼭 지켜야 할 주의사항’ 따위로 시작하는, 적어도 잡지에서 20년도 더 전부터 여름이면 반 복하는 지루한 사용 설명서를 반복해서 나열하고 싶지 않다. 차라리 녹아내리기 전까지 실컷 태워라, 그러다가 행여나 어 떤 문제가 생기면 피부과에 가서 진정 팩과 재생 레이저를 맞을 것.

2003년 ‘월드 스타’ 비 역시 숨을 헐떡이며 이미 그에 관한 해답을 내놨다. “태양을 피하고 싶어서 아무리 달려봐도 태 양은 계속 내 위에 있고, 너를 너무 잊고 싶어서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리 애를 써도 넌 내 안에 있어. 어차피 여름의 태양 을 피할 방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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