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행복한 여행을 나누며 즐거워한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모든 여행이 행복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돌이켜보면 최악의 여행이었던 것. 다행이다, 이미 끝난 여행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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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통 의 땅 에 서

‘망한 여행’의 기준은 뭘까? 다녀오면 여행지에서 겪은 모든 ‘뭣’ 같은 순간이 ‘아 그때 참 좋았지’로 미화되는 게 여행인데. 심지어 파리 루브르 박물관 앞에서 뒷주머니에 잠깐 넣은 아이폰을 소매치기당한 기억조차 ‘무용담’으로 왜곡되는 것이 여행 기억의 속성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당시의 고통과 분노, 후회가 오분 전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는 곳이 있다. ‘요르단’이다. 요르단에서 나는 자연=평안, 쉼, 휴식이라는 공식에 한 번도 의구심을 품지 않은 아둔함을 반성했다. 그런 자연은 고급 리조트가 만들어준 정원과 프라이빗 비치에나 있을 뿐이다. 날것은 도시보다 더 치열한 생존 현장 그 자체다.

고행의 서막은 사해에서 열렸다. 죽음의 바다. 요르단 강에서 들어온 물이 빠져나가지 못한 채 그대로 증발해 생긴 소금 호수. 이곳에 도착하기 전 나는 해수의 5배에 달하는 사해의 염분에 함유된 ‘35종 이상의 미네랄 성분’이 피부에 내리는 은총, 이 거룩한 염분 농도가 수영 못하는 이의 비루한 몸도 둥둥 띄워준다는 사실을 숙지하고 있었다. ‘사해에 둥둥 떠서 책 읽는 인증샷’을 찍을 요량으로 온몸에 머드를 바르고 짙푸른 호수에 발을 들였다. 왜 아무도, 이 망할 소금기가 내 육신에 따발총을 쏜다는 경고를 해주지 않았을까? ‘몸에 상처가 있으면 들어가지 말라’는 주의는 들었지만 다행히 상처 같은 건 없었다. 다만 어젯밤 짧은 바지와 슬리브리스, 비키니를 입기 위해 팔과 다리를 완벽히 제모하는 준비성을 발휘했을 뿐. 그 자리에 순도 1000%의 소금물이 닿으면 대패로 살갗을 미는 듯한 통증에 압도된다. 당신이 만약 사해에 면한 중동 휴양지에서 휴가를 만끽하고 싶다면 세 가지를 명심할 것. 상처 입지 말 것, 레이저 제모를 하지 않았다면 털털한 상태로 나다닐 것, 신난다고 첨벙대지 말 것(소금물이 눈에 튀는 순간 죽는 게 나을 정도로 아프다). 그렇지 않으면 요단강의 쓴맛을 단단히 보게 될 것이다.

거대한 사암 절벽으로 이뤄진 협곡 와디무집에선 호빗 빌보 배긴스라도 된 줄 알았다. ‘요르단의 그랜드 캐니언’으로 불리는 무집 자연보호구역은  가볍게 산책하다 물놀이로 몸을 식히는 계곡이 아니었다.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절벽, 발목을 갈퀴처럼 휘감는 물살, 괴상하게 짖어대는 야생 새들은 공포심마저 심어준다. 살면서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록 클라이밍- 폭포가 흘러내리는 젖은 바위를 로프 하나 잡고 오르거나, 그 바위를 미끄럼틀처럼 타고 내려와야 한다-, 계곡 수영을 해냈다. 다음 날 손톱 아래 근육까지 쫄깃해져서 몸을 가누기 힘들었지만 ‘멍 때리는 순간 황천길’급 자연에서 살아나왔다는 사실에 뒷골까지 짜릿했다.

페트라에서 내 비루한 육신의 고통은 절정을 맛본다. 세계 7대 불가사의, 기원전 2세기에 실존했던 나바테아 인들이 해발 950미터 고원 위 붉은 사막 위에 세운 도시,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무대로 알려진 이곳은 나바테아 왕국의 왕인 아테라스 3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신전 ‘알 카즈네’까지만 낭만적이다. 알카즈네 뒤로는, 그늘진 사암이 쪼개져서 난 틈새 길이 끝나고 마의 땡볕길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와서 페트라의 전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알 마드바흐를 놓칠 수 없기에 흰 천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길을 나섰다. 광야에 내리쬐는 정오의 볕은 상상 이상으로 뜨거웠다. 누군가 내 정수리에 개미를 올려놓고 돋보기에 햇볕을 모아 태우면 이런 기분일까? 한 줌도 안 되는 그늘에서 연신 쉬다가 결국 일행을 놓쳤다. 그들이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차를 타고 알 마드바흐를 빠져나올 때, 느린 나는 왕복 두 시간 거리를, 정오부터 오후 2시 사이에, 맨 몸으로 걸어 나와야 했다. 모두가 식사를 다 끝낸 식당까지 어떻게 도착했는지는 여전히 기억이 안 난다. 족발처럼 검붉게 익은 내 얼굴을 보고 화들짝 놀란 전 세계 사람들의 수군거림, 누군가 탈진하면 안 된다고 서둘러 짜 준 레몬수 같은 것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단언컨대 요르단의 야생 자연에서 달콤한 순간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매일 밤 호텔로 돌아와 침대 위에 몸을 누일 때마다 “오늘 살아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했을 뿐. 지금 다시 요르단에 가고 싶냐면…글쎄. 생각해보면 그저 살아남는 것이 의식의 전부를 뒤덮었던 그 나날에 나의 정신이 가장 맑고 깨끗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인간은 망각의 화신이고, 그래서 이렇게 망할 게 뻔한 여행을 또 떠난다.

– 류진(여행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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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스 탄 불 의 추 억

어느 최악의 여행에 대해 얘기할까. 내가 이런저런 사연을 말하니 후배가 ‘망한 여행이 많았군요…’ 한다. 여행 이후 다시는 얼굴 보지 않게 된 친구와의 대만행이라든지(대만까지 가서 친구들 몰래 은밀히 교회 사람을 불러내 교회로 사라진 일?) 나의 여권과 미국 비자를 강탈당해 새벽 폭우 속에 마드리드 영사관과 경찰서에 가야 했던 바르셀로나행, 결국은 그 사람과 이별여행이 되어버린 뉴욕행 등.

왜 최고의 여행이 아니라 최악의 여행을 말해야 하나. 생각하고 싶지 않은 터키 이스탄불을 끄집어내야 하는데. 15년 전쯤인가, 축구 ‘잘알못’이지만 유나이티드 챔피언스 리그 일을 하게 된 덕에 이스탄불에서 열리는 유에파 결승전에 초대되었다. 처음부터 가고 싶어 간 여행이 아니었다. 이스탄불보다는 파리나 밀라노 같은 번질거리는 도시에 더 끌릴 나이였다. A.C. 밀란이 결승에 올랐겠다, 이왕이면 밀라노에서 열리면 좋잖아… 그래도 결승전 후 하루의 자유시간 동안 돌아볼 이스탄불에 대해 공부하고, 결승전서 VIP 석에 앉는단 얘기에 나름 소매 없는 검은색 옷도 준비했다. 불운은 갑자기 불어 닥친 비바람으로부터 시작됐다. 너무 추운 탓에 입고 간 옷에 가당치도 않게 저지 추리닝(트레이닝 웨어라고 하면 너무 고급져서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맞지 않다. 하얗고 빨간, 정말로 운동할 때 입는 옷이었다)을 빌려서 걸쳐야 했다. 옷차림부터 주눅이 들어, 화려하게 떨쳐 입은 사람들 사이에 널린 대기실의 샴페인이나 음식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축구는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리버풀의 승리로 돌아가 재미있었지만 빨리 숙소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리고 하루의 시간이 주어졌다. 일단 토프카프 궁전에 가겠다며 택시를 탔다. 이스탄불 교통체증이야 워낙 유명하지만 그래도 과하다 싶게 차가 막혔다. 결국 도착해 택시비를 계산하는데 뭔가 좀 이상했다. 당시는 화폐 개혁을 하기 전이라(지금보다 끝자리에 0이 6개 정도 더 붙어 있다고 보면 된다) 우리나라 천원 정도 되는 돈도 리라로 따지면 백만 리라 이런 식이었다. 하루에 억 단위 리라를 쓰며 부자놀이 행세할 수 있던 때라고나 할까. 택시를 타고 5천원 정도 나와 우리 돈으로 5만원짜리 리라를 냈는데 기사가 4만5천원이 아니라 4천5백원을 거슬러줬다. 응? 나는 일십백천만십만백만천만 열심히 0을 세며 잘못됐다 말했으나 기사는 자신들의 화폐 단위의 복잡함을 이용해 무조건 우겼다. 종이와 펜을 꺼내 나는 손짓발짓 설명했다. 그는 막무가내였다. 나는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그는 화냈다. 나도 버텼다. 내가 4만5천원 때문에 오늘 죽는 게 아닐까 등골이 서늘하면서도 지고 싶지 않았다. 결국 기사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사기)을 인정하고 4만5천원을 거슬러주었다.

궁전에 들어가기도 전에 지쳤다. 그래, 오스만튀르크 술탄이 얼마나 화려하게 살았는지 잘 알겠고, 나는 그랜드 바자에 가서 쇼핑이나 하고 호텔로 돌아가고 싶었다. 듬성듬성 궁전을 돌아보고 다시 택시를 탔다. 토프카프 궁전에서 그랜드 바자는 멀지 않은 거리인데 이 기사가 갑자기 신시가지로 향하고 있었다. 돌아 돌아 돌아, 거의 북쪽에 있는 내 호텔을 찍고 다시 돌아, 그랜드 바자에 도착해 아까보다 더 많은 택시비를 냈다. 그랜드 바자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흥정이라도 하려 치면 쓰러질 것처럼 온 신경이 곤두섰다. 결국 아무것도 사지 못했다.

이제 호텔로 돌아가야 하는데… 또 택시 타고 스트레스로 죽느니 걸어가다 죽는 게 낫겠다 싶었다. 구글맵도 없던 시절에 무조건 호텔을 향해 걸었다. 무모하고 무식하게 북으로 북으로 향했다. 걷다 보니 막다른 길, 올라가다 보니 언덕 위, 다시 돌아가고를 반복하면서 눈에 익은 거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결국 두어 시간 지나 알 만한 장소가 나타났다. 여기서 이제 ‘30분 정도만’ 더 가면… 이후, 아야 소피아고 블루 모스크 광장이고 뭐고 다 계획에서 사라졌다.

그러고 시간이 한참 지나 터키 친구도 생겼지만 여전히 터키를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의 이슬람관도 가기 싫었다. 올해의 여행을 계획하며 터키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내가 포르투갈 남부나 코펜하겐을 이야기하는데, 나와 열 번 넘게 여행을 함께한 최고의 여행 친구가 조심스레 말했다. “이스탄불 어때?” 3년 전 이스탄불에 혼자 갔을 때 나를 끌고 오지 않은 게 못내 후회됐다면서, 장담하건대 나의 빅 3 여행 중 하나로 만들어주겠다 했다. 과연? 미심쩍어하면서도 나는 지금 15년 만에 이스탄불행 비행기 예약 사이트 자판을 두드린다. 도시가 준 상처를 사람으로 갚기를 기대하면서.

– 이현수(<미디어2.0>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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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 풍 이 있 었 다

잠에 빠지기 전 뒤척이다가 항공권 비교 앱을 열어 기웃대는 건 안락한 잠에 빠지기 위한 일종의 습관적 루틴이다. 언제나처럼 도착지는 ‘Everywhere’로 설정한다. 내 여행의 목적은 늘 ‘여기만 아니면 돼’였으니까. 뻔한 호주머니 사정, 어디에 가거나 말거나를 결정하는 기준은 오로지 ‘돈’이다. 나는 가장 싼 비행기 표를 찾아 헤매는데 그래봤자 종착지는 대부분 일본 어디 작은 시골 마을이나, 풍경이 상상조차 되지 않는 중국의 애매한 도시 몇 곳일 뿐이다. 그러던 어떤 밤, 익숙한 리스트 사이로 낯선 이름 하나가 불쑥 치고 올라왔다. 나트랑이라는 이름의 도시. 베트남에 근거지를 둔 저비용항공사를 이용하면 10만원대 초반으로 그곳에 다녀올 수 있는데, 당장 내일 밤 인천공항을 출발하는 티켓이 달랑 2장만 남았으니 어서들 알아서들 결정하라는 개시와 같은 음성이 저기서부터 ‘광’하고 울려 퍼졌다. ‘그래서 나트랑이라는 데가 어디에 붙어 있는데?’라는 질문에 답을 찾은 건 이미 그곳으로 향하는 비행기 표를 사들인 다음이다. 어차피 환불도 안 되는 완전한 땡처리 항공권. 그곳이 어디든, 낯선 동네의 광경이 얼마나 스펙터클하거나 시시한지 염려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 가서 보면 알겠지. 그나마 마음이 좀 놓이는 건 나트랑이 동남아라는 사실이었다.

5시간이 채 되지 않은 시간을 날아 나트랑 캄란 공항에 내린 건 오전 7시 무렵이었다. 입국장을 가득 메운 인파는 대부분 러시아인 아니면 중국인 가족이었는데, ‘그렇다면 이 휴양지에 놓인 혼자인 나는 뭐지’라는 쓸쓸함 그 비슷한 생각이 들 무렵 공항 밖으로 나섰다가 바짝 정신을 차렸다. 나트랑에 도착하기 하루 전, 베트남 역사에 길이 남을 크나큰 태풍이 이곳을 휩쓸고 지나갔다는데 서울의 내가 그 사실을 알 턱이 있나. 공항에서 시내로 바로 들어가는 도로는 산사태로 폐쇄된 상태였고, 돌아가는 길의 아스팔트는 중간중간 엿처럼 휘어진 채 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 택시는 천천히 그 길을 달려 남중국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호텔에 나를 내려두고 떠났다. 원래는 간단히 짐만 맡기고 나올 생각이었는데, 호텔 앞바다는 누런 흙탕물을 일으키며 성난 짐승의 얼굴로 덤비고 있었다. 그걸 마주하니 무턱대고 나설 용기는 금세 사그라졌다. 로비의 분위기는 확연히 달랐다. 재즈가 아주 태평스럽게 흐르고 있었는데, 백 년 전부터 한 번도 멈추지 않았을 것처럼 윙윙대며 돌아가는 천장의 선풍기에서는 얕고 간지러운 바람이 불었다. 베트남 전통의상인지 뭔지 모를 비단옷을 입은 직원 둘이 짐을 나눠 들더니 아예 내가 묵을 방으로 모시고 가서 앉혀놓고 체크인 절차를 밟았다. 모든 절차를 마친 직원이 앞걸음도 아니고 뒷걸음도 아닌 그야말로 어정쩡한 걸음으로 방을 나선 후, 그제야 졸음이 파도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여기서 끝. 당신은 이 글에서 ‘동양의 나폴리’ 나트랑의 바다나 햇살이 얼마나 사르르 녹는지, 그토록 사무치게 아름다운지, 그 도시의 소소한 맛집과 가볼 만한 곳이 어디인지와 같은 정보를 알 수 없다. 왜냐? 나는 나트랑에 머문 3박 4일 전부를 호텔에 감금되다시피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이 얼마나 아름다운 지상낙원인지 나도 본 적이 없어서 모른다. 매일 아침 누런 바다를 째려보며 어마어마한 양의 열대 과일을 우걱우걱 씹어 먹으면, 파도와 천둥번개가 대결하듯 으르렁거렸다. “뭐야, 왜들 저래?”라는 삐딱한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호텔 안에서 마사지를 받거나 러닝 머신 위를 쳇바퀴 돌 듯 달렸고, 배가 고파지면 룸서비스로 쌀국수를 시켜 먹었다. 그러니까 이건 자발적인 호캉스와는 완전히 다른 경우다. 매일 밤 침대에 앉아 혼자 무슨 말을 주절거린 줄 아나? “아, 망했다.” 이렇게 최악으로 망한 여행은 살다 살다 또 처음이었다. 그땐 정말 그랬다. 그런데 요즘 부쩍 거기에 머물던 며칠을 생각한다. 나의 동남아, 나트랑으로 다시 훌쩍 떠날 궁리를 한다. 아주 철저하게 망했다고 저주하던 그 여행이 실은 가장 완벽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유랄 것도 없이, 그저 홀린 것처럼.

– 최지웅(<데이즈드 코리아> 피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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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 디 에 이 고 는 죄 가 없 다

겨울에 여행을 떠난다면 주의해야 한다. 언제 대설주의보가 내려지고, 눈이 잔뜩 쌓이고, 공항 가는 길이 두 시간이 걸릴지 세 시간이 걸릴지 모를 일이다. 눈이 와서 길이 막혀 비행기를 놓친 얘긴가 싶지만 비행기를 놓친 건 아니다. 나는 탔고 비행기는 떴다. 문제는 눈 때문에 조금씩 출발이 밀린 상태였다는 것. 내가 탄 비행기는 도쿄 경유 샌디에이고. 새로 생긴 노선이었다. 그러나 나리타 공항에 내려 미친 듯이 다음 게이트로 뛰어갔을 때,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 서서히 닫히고 있던 문. 다시 열어주는 일은 물론 없었다. 다른 이십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나는 비행기를 놓친 것이었다. 우리는 패잔병처럼 모 항공의 창구에 섰다. 각자의 모국어와 영어, 일본어가 뒤섞인 순간. 아, 난 어떻게 될까. 그때 거짓말처럼 발 밑에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옆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이거 지진일까요?” 그 사람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지진이요?”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눈앞의 기둥이 어마어마하게 흔들렸다. 사람들의 비명소리,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 그때 알았다. 지진이 나면 땅이 지그재그로 흔들린다는 것을. 지진이 나면 어떻게 하라고 했지? 카운터 안쪽으로 몸을 수그린 한 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양손을 깍지 낀 상태로 머리를 감싸 안으며 몸을 수그리는 시늉을 했다(나중에 찾아본 바로는 꽤 큰 지진). 이럴 수가, 비행기도 놓쳤는데 지진이라니.

자, 이제 공항은 지진 때문에 더욱 혼잡해졌다. 지진이 나면 챙겨야 하는 매뉴얼이 있는 것 같았고, 그래서 이제는 멀쩡히 비행기를 타야 할 사람들조차 타지 못하고 기다리는 신세가 된 것이다. 공항은 쉴 새 없이 온갖 ‛고쿠’를 불러댔다. 공항에서 항공이라는 일본어 단어를 배우다니. 기다리고 기다려서 나의 순서. 그래서 저는 언제 샌디에이고행 비행기에 탈 수 있나요? 항공사의 직원은 계속 ‟밴쿠바”, “밴쿠바”라고 말했다. 나의 최신 노선 비행기는 주 3회 운항이라 다음 비행기는 이틀 후라고 했다. 밴쿠버에 가면 샌디에이고 비행기를 바로 탈 수 있다는 거다. 달리 선택지가 없어 타라는 밴쿠버행을 탔다. 전날까지 마감을 해서 밤을 새웠는데, 하필이면 두 아이가 엄청난 기세로 울고 있었다. 과장이 아니라 열 시간을 울었다. 좀비 상태로 ‘밴쿠바’에 도착했다. 샌디에이고행 비행기는 어딨죠? “샌디에이고요? 그건 매일 오전 출발인데 이미 떠났는걸요.” 캐나다인들이 씩 웃으며 말했다. “샌프란시스코로 가요. 샌디에이고행 비행기가 몇 시간마다 있어요.” 맙소사! 샌디에이고가 아닌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에 몸을 우겨 넣었다. 아니 국제선 아닌가? 왜 이렇게 비행기가 작아? 작으니까 더 불편하고, 작으니까 더 힘들었다. 기내 커피도, 이코노미 좌석도, 기내 샌드위치도, 기내 화장실도 다 지긋지긋했다. 꼭 샌디에이고에 가야 하는 걸까? 가지 말까? 도쿄 공항 호텔에서 머물며 공항 식당이나 돌아다닐 걸 그랬나? 그러고 다시 샌프란시스코에 착륙. 그제야 나는 ‘SAN’이라는 공항 코드가 쓰인 진짜 티켓을 손에 쥘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상태가 좋지 않았다. 정말이지 또다시 비행기를 타면 토할 것 같았다. 도저히 뭘 더 탈 수가 없었다. 기내와 공항에서만 이미 24시간이 지나 있었다. 비틀거리며 결국 탔다. 그리고 한 시간 남짓 날았나, 저 멀리 그토록 갈구했던 그 도시가 어둠 속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그 어떤 도시도 그렇게 바라고 원한 적이 없었던 도시, 샌디에이고. 좌석등이 꺼질 때까지 토할 것 같은 순간을 한번 더 겪은 후에 나는 그 도시에 휘청거리며 내렸다. 왠지 꼬질해진 듯한 트렁크를 찾고 마침내 공항 밖으로 나오는 순간 정말이지 그 땅에 무릎을 꿇고 키스하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서울을 떠난 지 30시간 만에 호텔의 룸에 들어왔다.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는데 발 밑으로 구정물이 흘러 내려갔다. 젖은 머리로 잠이 들었다. 꿈에서도 비행기를 타고 있었다. 소스라치며 깬 후 커튼을 열었다. 키다리 아저씨처럼 쭉쭉 자라난 야자수 사이로, 건강하게 그을린 남자들이 서핑을 하고 물개들이 일광욕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미 모든 게 망한 것 같았지만, 어쨌든 이제 샌디에이고였다. 샌디에이고는 죄가 없다.

– 허윤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