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필수템인 트렌치코트, 누구나 트렌치코트에 얽힌 사연 하나쯤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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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그> 편집장 안나 윈투어, 여전히 멋진 모델 칼리 클로스, 스웨그 넘치는 팝 가수 리한나 모두 개성 따라, 취향 따라,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트렌치코트를 입었다. 트렌치코트는 유행을 타지 않는 클래식 아이템으로 따끈따끈한 신상 아이템도 좋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멋이 배가되기에 빈티지 아이템도 크게 사랑을 받는다. 대학 입학 때 엄마가 사 준 트렌치코트, 첫 직장 월급으로 내가 나에게 선물한 트렌치코트, 런던 유학 시절 플리마켓에서 득템한 트렌치코트 등을 지금까지 입는다. 입을 때마다 그때 생각이 난다. 저마다의 ‘그때’를 따라가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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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시절을 입다

그러고 보면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빈티지를 동경했다. 죽은 옷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부활의 신’을 자처하면서! 시간만 되면 구제 시장을 기웃거렸다. 낡고 해진 리바이스 501 셀비지 데님과 구멍 숭숭 뚫린 니트 스웨터, 스코틀랜드 시골 할머니가 입었을 법한 타탄 체크 패턴의 스커트 등을 발견하는 재미에 열을 올렸다. 그렇게 나프탈렌 냄새로 뒤범벅된 20대를 보냈다.

30대에 들어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어느 나라에 누가 입었는지도 모르고 귀신이 붙어 있을 수도 있잖아!” 친구가 툭 내뱉은 이 한마디가 이상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그녀 말대로 알 수 없는 역사를 지내온 구제 옷이 그것을 걸치는 즉시 왠지 나를 미지의 뒤죽박죽인 세계로, 특히 사연 많은 굴곡진 인생으로 이끌 것만 같았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6년 전쯤 결혼 예물로 시어머니가 쓰시던 30년 된 까르띠에 시계를 선물받았다. 이번에는 느낌이 좀 달랐다. 내 남편의 어머니께서 애용하시던 시계를 물려받는 순간, 이 행위 자체가 고전 영화 속 그것처럼 근사하게 느껴졌다. 시곗줄을 교체하고 폴리싱까지 마치니 매장에서 바로 산 것처럼 반짝였던 것은 물론이다. 부모님이 즐겨 쓰시던 아이템이 내게 와 영원불멸의 가치 있는 빈티지 아이템이 되었다. 유행은 돌고 돌아 다시는 돌아보지 않을 듯 옷장 구석에 처박아둔 버버리 체크와 펜디 로고, 디올 패턴이 이제는 힙한 로고 플레이로 떠올랐다. 다들 무릎을 ‘탁’ 치며 자신의 과거 사진 속 그것을 착용하는 모습을 떠올렸을 것이다.

나는 친정으로 가는 KTX 안에서 엄마의 젊은 시절을 끄집어냈다. 버버리 트렌치코트와 디올 로고 백, 셀린느 펌프스 등등! 그리고 곧 다가올 계절은 가을임을 염두에 두고 물려받을(순전히 내 생각!) 리스트를 정리했다. 집에 도착해 최대한 자연스럽고 능청스럽게 엄마를 불렀다. “엄마, 요즘 버버리 트렌치코트 입어?” 엄마는 물 묻은 손을 옷에 대충 닦으며 자신의 옷을 하나씩 꺼내 보였다. 20년이 훌쩍 넘은 플레어 트렌치코트(90년대 초반에 유행한 디자인으로 래글런 소매에 밑단이 확 퍼지는 아주 클래식한 스타일), 벨벳 칼라가 포인트인 오버사이즈 모직 하프 코트(낡은 안감을 교체하고 어깨선을 수선해야 한다), 그 다음으로 바스락거리는 체크 패턴의 버버리 트렌치코트를 꺼냈다. 입어보니 소매 길이도 딱 맞고 마치 새 옷처럼 안기는 기분이었다. “이 집 이사 오고 산 거니까 20년쯤 됐나봐. 소재 때문에 한 번도 못 입고 얼마 전에 소매 길이만 수선해서 걸어둔 건데… 니가 입으려면 가져가든지!” 퉁명스러워 보이나 아주 쿨~한 말투로 엄마는 트렌치코트를 곧장 내게 넘겼다. 덤으로 버버리 체크 패턴 실크 블라우스도 입어보라고 부추겼다. “넌 뭘 입어도 다 예쁘네!” 이 한마디와 함께 엄마의 젊은 시절이 거울 속 내 모습으로 들어왔다. 엄마의 눈에는 40대가 된 딸의 눈가 주름이나 출산의 후유증으로 늘어진 뱃살 따위는 보이지 않는가 보다. 이 세상의 모든 엄마가 그렇듯 자기 딸이 세상에서 가장 예뻐 보일 것이므로. 애틋함도 잠시, 나는 다음번 엄마의 옷장 속 위시(?) 리스트도 콕콕 찍어두었고, 굴비와 참기름으로 꽉 찬 캐리어에 트렌치코트와 실크 블라우스를 고이 접어 데려왔다. 집에 와 짐을 푸는데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 트렌치코트 덕분일까, 굴비 때문일까. – 김미진(<보그> 패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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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컬렉팅의 이유

나는 ‘트렌치’ 같은 멋이 좋다. 트렌치는 유난스럽지 않으면서도 멋스럽고, 자연스럽지만 절대 초라하지 않다(사자자리인 내게 초라함은 참을 수 없는 것이다). 트렌치코트는 언제 어디서든 그 사람을 기품 있게 만들어준다. 옷은 그 사람을 말해준다. 패션은 그 사람이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를 표현해주며, 설상 그런 욕구가 없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는 비주얼 디렉터로서 수많은 스태프를 조율하고 이끌어 최고의 결과물을 내야 한다. 또한 처음 만나는 사람과 작업하는 일도 흔하다. 그래서 나는 직업적으로도 청바지에 점퍼를 입는 것보다 청바지에 트렌치코트를 입는 것이 내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어쩌면 이는 디렉팅을 해야 하는 나의 직업과 아주 잘 어울리는 옷이기도 하다(트렌치가 본래 영국 군인을 지켜주기 위해 만들어진 옷이라는 것, 어깨 스트랩과 손목 스트랩 모두 전장에서 작업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 새로운 것에 열광하며 변덕이 죽 끓는 듯 하는 내가 변치 않고 계속해서 사 모으는 몇 안 되는 아이템 역시 트렌치코트다. 나는 엄마가 젊은 시절 입던 블랙 가죽 트렌치코트부터 벼룩시장에서 산 빈티지한 반도패션의 트렌치코트, 스탠더드한 클래식 디자인의 버버리 트렌치코트, 오버사이즈로 입는 프라다의 남성 트렌치코트까지, 다양한 트렌치코트를 갖고 있다. 이렇게 트렌치코트를 계속해서 구입하는 이유 중 하나는 트렌치코트만큼 유행을 타지 않고 계절과 세대, 성별을 뛰어넘어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옷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아끼는 트렌치코트는 클래식하면서도 도전적인 나의 성향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준야 와타나베의 트렌치코트다. 버버리 다음으로 아이코닉한 트렌치코트 브랜드를 꼽으라면 나는 준야 와타나베를 이야기할 것이다. 그는 지금껏 수많은 트렌치를 새로운 방법으로 선보였다. 그의 트렌치코트는 매우 아방가르드한 디자인부터 아주 클래식한 디자인까지 나오는데 일본인 특유의 오타쿠적인 자세로 트렌치를 연구 대상으로 정한 듯 보인다. 패션 에디터이던 시절 그의 컬렉션에 등장한 트렌치코트를 보고 ‘완벽하다는 표현은 이럴 때 하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만들어진 그 트렌치코트는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이 준야 와타나베 트렌치코트는 벌써 10년 전쯤 밀라노에서 구입한 것인데 쿠튀르적인 뒤태의 완벽한 모습에 반해서였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잘 만들어진 이 옷은 여전히 그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준야 와타나베의 트렌치코트에는 영국의 역사와 클래식한 퀄리티, 로맨틱한 영화적인 이미지들, 그리고 여자가 남자 군인의 옷을 입는 혁신성이 모두 담겨 있다. – 김석원(비주얼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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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용기를 내야 할 때

헝클어진 머리, 목 바로 아래까지 바르게 채운 네 개의 검정 단추, 힘주어 묶은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는 벨트의 매듭. 찬 바람 때문인지 턱을 반쯤 가린 깃. 건너편 횡단보도에 서 있는 트렌치코트를 입은 그는 참 근사했다.

웨딩 반지를 서로의 손가락에 끼운 지 일년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자신이 하고 싶은 사업을 하겠다는 남편. 그리고 그를 응원하겠노라 당당히 외쳤지만 서툰 남편이 가끔은 안쓰럽기도, 때로는 애써 감추려 해도 들키고 마는 불안이 오고 가던 때였다. 그런데 신기하게 건너편 트렌치코트를 입은 남자는 ‘과연 잘할 수 있을까’라는 여자의 두려움을 단번에 사그라지게 했다. 멋졌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코트 안에 목이 다 늘어난, 허름하기 짝이 없는 티셔츠를 입고 있던 터라 그렇게 단추를 야무지게 모두 채웠어야 했다고. 어쨌거나 오랜만에 나의 심장을 뛰게 만든 트렌치코트를 입은 남자. 그래서 그렇게 많은 영화 속 남자 주인공들이 트렌치코트의 깃을 세웠나 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내가 입고 신고 걸치는 모든 것의 시작이 궁금했다. 팔을 끼우지 않고 적당한 위치에 구멍만 냈을 뿐인데도 우아한 케이프의 아이디어는 누가 냈는지, 트렌치코트는 왜 버버리의 상징이 되어 누구나 하나쯤은 갖고 싶은 로망이 되었는지, 세상 모든 패션 아이템의 위대한 탄생은 어떤 우여곡절의 시간을 보내고 누구를 거쳐서 나에게로 왔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만약 그 스토리가 마음에 들기만 하면 그 아이템에 꽂혀 닳아 없어질 만큼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

안전 지대에 있다가 불현듯 사업을 한다고 현실로 뛰어든 남편은 살벌한 전쟁터에서 치열하게 살았다. 카키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동분서주하기를 어느덧 10년. 그동안 날 선 깃은 더 유연해졌고 세월의 흔적으로 자연스러운 멋이 배가됐다. 그리고 지금, 남편의 유니폼(?)이었던 트렌치코트는 내가 언제든 걸치고 나갈 수 있는 매우 실용적이고 멋진 오버사이즈 핏의 트렌치코트가 되었다.

앞날은 누구도 모른다고 했던가. 지금의 나는 10년 전 그와 같은 처지다. 오랫동안 하던 일을 스스로 그만두고 글을 쓰고 싶다고, 직업으로서 글을 쓰는 이가 되고 싶다고 말하다가도 하루에도 수십 번씩 잘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우선 버텨보자.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을 따라가기에 숨을 헐떡거리며 급급해하지 말고, 온 땅 위에 두 발을 굳건히 디딘 채 비바람이 몰아쳐도 견뎌내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지금 창문을 여니 반가운 찬 바람이 훅 들어온다. “이 세상 사람 모두가 트렌치코트를 가져야 한다. 또 모두를 위한 트렌치코트가 존재해야 한다. 성별과 나이에 관계없이 말이다. 안젤라 아렌츠의 말처럼 이제 옷장에서 트렌치코트를 꺼내야 할 때인가 보다. 남편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 오래된 트렌치코트가 나의 용기를 북돋워줄 거라 믿으면서 말이다. – 도현영(<그녀들의 멘탈뷰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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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 나의 옷

패션 일을 하면서 어떤 주제로 한 5분 이야기를 하는 동안 ‘핏’이라는 단어를 10번 이상 언급할 때가 있다. ‘핏이 맞아야 한다’, ‘핏이 좋아야 한다’, ‘핏이 제일 중요하다’라는 식이다. 일차적으로 핏이 맞는 의상을 찾는 것은 힘들고도 즐거운 일이다. 더욱이 개성 있는 체형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꽤 고난의 여정이며 심마니의 심봤다 수준이다.

몇 년 전에 에쿠르에서 마음에 드는 디자인의 트렌치코트를 발견하고 피팅을 해보는 중 ‘아! 이렇게 나에게 잘 맞는 길이가 있을 수 있나!’라는 생각에 감탄했다. 뷰티플 피플이라는 일본 브랜드. 키가 작아 옷을 사면 으레 몸에 맞게 사이즈를 줄여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이 트렌치코트를 입는 순간 영화처럼 ‘아 이 옷은 내 옷이구나!’라는 생각이 1초도 안 돼서 들었던 것이다. 다른 이들은 칠부 길이로 트렌디하게 입을 디자인이 내게는 노멀하게 맞다니. 신발은 사람을 좋은 데로 인도한다는 옛말이 있는 것처럼 나에게 꼭 맞는 이 트렌치코트는 나를 영화 속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듯했다. 반대로 트렌치코트 하면 단번에 B 브랜드를 떠올릴 만큼 B 브랜드의 트렌치코트는 유명세는 물론 소장가치 면에서도 뛰어나다. 그러나 나에게는 너무 크고 소매나 길이 등이 잘 안 맞아서 입을 때마다 남의 옷을 입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요즘은 세상에 물건이 너무 많고 흔해서 그 물건이 해지거나 망가질 때까지 쓰는 경우가 흔치 않다. 소매가 해지고 색이 조금 바랜 옷을 볼 때마다 오래된 친구와 깊은 우정을 함께한 기분이 들어 묘한 뿌듯함과 생명력 넘치는 온기를 느낀다. 인생 트렌치코트가 된 뷰티플 피플의 트렌치코트 역시 오래된 친구 같은 옷이 되었다. 옷을 다루는 일을 20년 넘게 하면서 화려한 옷도 수없이 만져보고 사보고 느껴봤지만 나에게 맞는 옷은 따로 있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오래되고 핏이 딱 맞는 친구들의 소중함을 나이가 들수록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옷은 그 사람의 이미지이고, 그 사람의 성격과 취향을 드러내기에 무엇보다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나의 트렌치코트를 오랜 친구처럼 앞으로도 쭉 소중히 간직할 것이다. 사랑해 나의 친구, 나의 옷. – 최혜련(패션 스타일리스트)


지금 사서 대대손손 물려 입어도 좋을 것 같은 트렌치코트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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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종 마르지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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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츠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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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W.앤더슨 by 육스

버버리

버버리

릭 오웬스 by 네타포르테

릭 오웬스 by 네타포르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