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다움이 무엇인지, 성 역할과 성 고정관념의 현재는 어떠한지에 대한 조금은 뜨겁고 가벼운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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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내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또 들은 것은“여 자 는 이래야 한다,” “여자가 그러면 못쓴다” 등 여성으로서 성 역할 을 강조한 이야기였다. 목소리가 크면 안 된다, 몸가짐이 발라야 한다, 자기 관리를 잘해야 한다(날씬해야 한다를 그럴싸하게 바 꾼 말이다) 등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 엄마는 이러한 이야기들의 방 점을 찍는 “여자는 그저 시집만 잘 가면 된다” 대신에 “여자도 능력을 발 휘해 성공해야 한다”라는 철학이 있어 지금까지 결혼은 남의 일이요, 일 과 열애하며 녹초가 된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 다. 소위 쌍팔년도에나 들었을 법한 지극히 편협하고 성차별적인 행태가 형태를 달리해 여전히 자행되고 있다. 예를 들어, 높은 직위를 차지한 여 성에게 따라붙는 ‘독하다’, ‘기 세다’라는 표현이 대표적이다. ‘보통 아니다’ 라는 사실 관계를 가늠할 수 없는 음흉한 뉘앙스의 표현도 마찬가지다(보 통 이런 표현은 같은 여자들 사이에도 많이 사용하며 괜한 편 가르기를 조 장한다). 같은 처지의 남성이었다면 듣지 않았을 말이다. 여성 CEO, 여성 판사, 여류작가 등 여성을 분리해 그들만의 리그로 앵글을 좁히는 것 역시 여성의 능력을 제한하는 데 일조한다. 학계나 정치권과 같은 보수적인 집 단으로 갈수록 상황은 더 좋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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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에야 핑크 컬러를 좋아하지만, 학창 시절에는 부러 핑크 를 멀리했다. “나는 블루와 블랙을 좋아해”라고 했지만 사실 여자라서 핑크를 좋아하는 것으로 비치는 게 싫었던 것 같다. 어린 마음에도 여자라서 불리한 면이 있다고 느꼈던 모양이 다. 당시는 여아에게는 핑크 드레스를 입히고 남아에게는 블루 점퍼를 입 히는 이모의 행동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직 자아가 채 무르익지 않은 아 이들에게 여자는 핑크, 남자는 블루와 같은 식의 성 고정관념을 심어주지 말라 큰소리쳤다. 물론 이모는 피식 웃으며 대거리조차 하지 않았다. 지 난 3월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영국의 크래프트 맥주 기업 블루독이 성 별 임금 격차에 맞서는 여성을 위한 맥주를 선보였다. 블루독 맥주 중 가장 잘 팔리는 펑크 IPA의 포장 디자인을 바꿔 한정품으로 판매한 핑크 IPA가 그것이다. 블루독은 세계의 나라 중 남녀 임금 격차가 가장 큰 한국과 가 장 적은 벨기에의 임금 격차 평균값에 가까운 20%를 활용해 다양한 이벤 트를 벌였다. 20% 할인 판매, 판매 수익금 중 20%는 성 평등 지원 단체에 기부하는 등이다. 심오한 이벤트 뒤에 핑크 레이블을 선택한 이유가 재미 있다. ‘여자들은 모두 핑크를 좋아한다’라는 명제를 비꼬아 남녀의 임금 격차가 얼마나 시대착오적인가에 대해 농도 짙은 화두를 던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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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를 즐겨 보는 내가 지난해 가장 재미있게 본 영상은 걸 그룹 에프엑스의 멤버 엠버가 제작한 ‘내 가슴 어디 갔지? – 악플에 대한 답변(Where is my chest? – Responding to Hate Comments)’이다. 지난해 10월경에 업로드된 이 영상의 누적 조회수는 389만 회. <얼루어> 독자 중에서도 영상을 본 사람이 꽤 많을 것 이다. 평소 ‘가슴이 너무 납작하다’, ‘남자 같다’라는 말을 많이 들은 엠버는 인신공격형 악플을 수면 위로 올려 잃어버린 엠버의 가슴을 찾는다는 기 막힌 스토리를 만들었다. 가슴을 찾으러 가는 길은 자신보다 키도 작고 마 른 ‘남사친’(남자사람친구) 브라이스가 함께한다. 남자 같다는 말을 듣는 엠버와 그녀보다 약해 보이는 남자 브라이스의 동행은 그것 자체로 여성 다움과 남성다움이 애초에 필요치 않은 논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엠 버가 읽어주는 악플 중에는 ‘타투한 여자는 피하라’, ‘우리 집 알바생처럼 생겨서 보기 싫다’라는 식의 논리가 결핍된 명제도 수두룩하다. 그녀는 그 동안 이 같은 악플을 어떻게 참고 견뎠단 말인가. 지금처럼 웃고 넘기기까 지 얼마나 많은 내적 갈등과 질문이 있었을지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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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엠버가 지난 7월 나이키 광고에 등장했다. ‘나이키 메 탈릭 신 컬렉션’을 대표하기 위해 다이내믹한 도시에서 4인의 여성을 발탁했는데, 그중 서울의 아이콘으로 개성 있는 매력 을 지닌 엠버가 선정된 것이다. ‘감출 수 없는 강인함으로 끊 임없이 나아가라’를 모토로 하는 이 컬렉션은 여성이 스포츠 를 통해 자신감을 얻고 그만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기를 격려한다. 엠버는 비슷한 시기 SNS에 “오랜 시간 동안 저는 다른 사람들의 편견으로 인해 제 몸을 창피하다고 여겼어요. 점점 제 몸에 대한 자신감도 잃게 만들었고 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제가 연약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 에 제 자신의 야심과 목표를 포기해왔는데, 더 이상 저는 그런 사람이 아 니에요. 항상 더 열심히 하고 더 강해지고 이런 제 자신을 사랑할 줄 아 는 사람이 될 거예요. 완벽하지 않아도”라는 글을 올렸다. ‘나이키 메탈릭 신 컬렉션’을 입고 꾸밈없이 자신의 몸을 드러낸 사진과 함께. 그녀와 함께 선정된 타 도시의 아이콘은 멕시코시티의 배우 겸 가수 아란자 루이즈와 호주 풋볼 선수 타일라 해리스, 일본 패럴림픽 육상선수 사에 시게마츠 츠 지 등인데, 각자 도시에 대한 영감을 대표하며 많은 여성에게 용기와 희망 을 불어넣는다. 한편 루이 비통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니콜라 제스키에 르는 2018 가을/겨울 루이 비통 쇼를 통해 여성의 선을 강조한 의상을 대 거 선보였다. 남자와 동등해지기 위해 남자처럼 옷을 입을 것이 아니라 여 성의 장점을 극대화하자는 메시지다. 남자 같은 옷, 여성 같은 옷을 정의 한다면 또 한번 설전이 불가피할 테다. 결국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이 아 닌, ‘나다움’에 대한 이야기다. 애써 꾸미지 말고, 내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 고 자신 있게 드러내면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