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고의 보컬리스트 바다는 또한 훌륭한 뮤지컬 배우 최성희이기도 하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을 맡은 건 이번이 세 번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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턱시도 재킷은 클루 드 클레어 (Clue de Clare). 무대 드레스는 바다 본인 소장품.

다양한 뮤지컬 작품을 했죠. 그럼에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각별한가요?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는 서사극이라 어린 나이부터 요즘으로 따지면 중년이 된 시점까지 연기를 해요. 상황에 맞게 캐릭터의 감정이 너무 많이 변해서, 한 인물인데 여러 인물을 연기하는 듯하죠.

초연, 재연, 그리고 세 번째인 지금까지 무대에 오르는 마음이 어떻게 다른가요?
처음엔 열정으로 했던 것 같아요. 최선을 다해서 그녀다워 보일 수 있게 모방하고 연구하고 그게 최선일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 삼연을 할 때에는 내 안에도 스칼렛과 같은 면이 있었다는 걸 깨닫죠. 그리고 세상 누구라도 각자의 전쟁이 있을 거라는 것도요. 배우로서도 그동안 커리어를 쌓아왔기 때문에 경험치를 가진 지금 시기에 맞는 작품이 아닐까 해요.

한 사람으로서 점점 성숙해지는 과정을 어떻게 표현하려고 했어요? 
보컬로서 많이 훈련이 돼 있어서 원하는 소리를 어느 정도 낼 수 있는 것 같아요. 1막에서는 처음 오프닝 시작할 때 부유한 가정에서 모든 것을 다 가진 첫째 딸의 모습을 보여주거든요. 의상이나 무대적인 요소, 조명, 음악적인 흐름이 모두 화려하고 풍부해요. 그런 1막에 맞는 목소리를 내죠. 2막은 달라요. 모든 게 황폐해지고, 시절이 변해요. 처음으로 가난, 전쟁에 대한 공포 등 그녀가 삶에서 겪어보지 못한 여러 가지를 만나요. 1막에서는 한 여자가 가진 것을 표현했다면, 2막에선 다 가졌던 것들을 어떻게 잃을 수 있는지를 표현해요. 다 잃고 그녀가 다시 되찾으려고 할 때, 어떤 의지와 감정이 필요한지까지가 2막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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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 피스는 벨앤누보(Bell&Nouveau). 깃털 장식 블라우스는 브루넬로 쿠치넬리(Brunello Cucinelli).

당신이 이해한 스칼렛은 어떤 인물이죠? 
그녀는 자신의 본질을 바꾸며 생존하지 않거든요. 스칼렛은 시대의 규범 안에서 자신의 힘으로 생존해요. 소설에서 설명하는 스칼렛은, 미인으로 보이지만 원래 미인이 아니었다고 하잖아요? 마치 어느 배우가 연기를 잘하면 아름다워 보이는 것처럼 그런 거겠죠. 확실히 자기 자신을 잘 이해하는 캐릭터라고 생각해요. 요즘 말로는 자존감이 엄청난 여자죠. 인생은 태도에 대한 문제잖아요.

당신도 자기 자신을 잘 이해하게 되었나요? 
이해를 못했었는데, 지금은 좀 알 것 같아요.(웃음) 알수록 자신을 사랑해주는 법까지 같이 배워야 하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자기를 너무 잘 안다는 건 자기의 어두운 면, 부족한 면까지 잘 안다는 거니까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 보기 전에, 나 자신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중요한 것 같아요.

나를 돌아보고 이해하려 애써본 사람만 할 수 있는 말이군요. 
무겁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요. 어떤 시선에서 보면 전 그로테스크한 사람이었거든요. 내가 날 들여다보는 시간이 너무 무거워서, 20대 때에는 오해도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원할 때 웃고, 원하지 않으면 안 웃어요. 나란 사람도 매일매일 바뀌지 않아요? 그날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일을 하는지에 따라 달라지죠. 관대한 관점을 갖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난 잘해, 난 뛰어나’라고 생각하는 게 무대에 설 때 더 도움이 되지 않아요? 
그런 생각은 이미 어린 시절에 너무 많이 해봤어요. 이제는 모든 분야에 다양성이라는 것을 많이 봤고, 이젠 다 보여요. 나도 ‘어나더 원’인 것이죠. 부담도 덜고. 필요할 때에는 또 잘한다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두 가지를 내가 원하는 감정대로 그날, 상황에 따라 바꿔 쓰는 것 같아요.

하지만 바다의 목소리와 가창력은 독보적이죠. 
그럴까요? 저도 이번에 <히든싱어>에 나가기로 했으니까 한번 보세요.(웃음) 스칼렛을 연기하면서 느끼는 건데, 자기 자신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거기에 급급해서 자기 자신을 너무 피곤하게 할 건 없어요. 결국 스칼렛이 생존했던 이유, 진정한 승리의 의미는 그녀가 자기 자신에게 계속 기회를 줬기 때문이거든요. 항상 내일에 대해 생각했던 거죠.

공연에 대입해보면 어때요? 매일매일의 공연은 다를 수밖에 없죠. 또 매 공연을 지켜보는 마니아들이 있고요. 늘 완벽한 무대를 보여야 한다는 강박은 없나요? 
내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하는지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신경 안 써요. 공연할 때엔, 내일이 없는 것처럼 공연해요. 왜냐하면 무대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제 인생은 둘 중에 하나예요. 무대에서 죽든지, 무대 밖에서 죽든지. 언제나 제 삶에 있어서는 너무 당연한 거예요. 아마 마니아 분들은 제 연기 스타일을 많이 보셔서 알 거예요. 제 감정선으로 그대로 가거든요. 대사 한 번 실수한 것쯤은 신경 쓰지 않아요. 저를 보러 오는 게 아니라 스칼렛 오하라를 보러 온다고 생각하거든요. 뮤지컬을 보러 오신다면 배우 분들에게서 변화의 요소를 찾으며 즐기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관객 분들은 똑같은 공연을 봐도 조금씩 달라지는 공연 속에 있잖아요. 그것도 공연의 일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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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재킷은 클루 드 클레어. 톱은 콜라보토리(Collabotory). 스커트는 뎁 세레모니(Debb Ceremony). 드롭 이어링은 먼데이 에디션(Monday Edition).

카세트테이프와 CD 시절부터 지금까지 20년째 바다의 노래를 듣고 있더군요. 무엇이 그걸 가능하게 했나요? 
지금까지 살면서 해볼 수 있는 모든 시도는 다 해봤어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이루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차마 나한테 미안해서 못하겠어요. 왜냐하면 나는 정말 노력했거든요. 시도한 것 자체로 다 의미가 있어요. 시도해서 얻은 것들, 시도했기 때문에 내가 내려놓을 수 있게 된 것들이 구분된 것만 해도 감사하게 생각해요.

앞으로 20년을 내다본다면 어떤가요?
어느 날은 하고 싶은 것 하고 어느 날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하면서 여유 있게 해나가면 되지 않을까요. 제 목표는 언제나 제가 좋아하는 무대에 서는 것이죠. 어떤 형태든 상관없어요. 연극, 뮤지컬, 노래를 할 수도 있어요.

아까 메이크업을 하며 스칼렛을 세 번 했으니 충분하다고 했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지금 공연이 제일 좋다고 권해드리고는 싶어요. 배우들도 자신감이 붙었고요. 올해 무대는 배경이 LED로 되어 있어요. 기술적으로 도입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거든요. 올해의 공연을 추천합니다. 내일은 알 수 없잖아요.(웃음)

무대에서 각별히 좋아하는 넘버는 무엇인가요?
‘가라앉아’라는 넘버를 가장 좋아해요. 타라를 구하기 위해 엄마의 커튼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돈을 구하러 레트에게 가는 장면이죠. 무대 위에서 실제 저희가 코르셋을 입고, 드레스를 갈아입거든요. 무대 위에서 배우가 옷을 갈아입는다는 게 쑥스럽잖아요. 하지만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하는 스칼렛의 보석 같은 강인함, 보석처럼 피어난 장면이라고 생각해요. 계속되는 시련 속에서도 ‘나 방탄조끼 입은 여자야’라고 하는 느낌인 것 같아요.

뮤지컬 배우는 강하게 역할에 몰입할 수밖에 없잖아요? 스칼렛처럼 방탄조끼를 입은 것 같은 캐릭터를 할 때, 스스로 강해지는 느낌이 드나요?
이 작품에서 힌트를 많이 얻어요. 처음부터 사회생활을 배우고 사회에 끼어든 사람이 없잖아요. 그래서 삶을 전쟁같이 살아가는 분들도 많을 텐데 작품을 하면서 어떤 시간이 와도 항상 내일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 자신을 믿는 것. 말한 대로 살아가는 그녀가 저한테 주는 메시지가 참 많은 것 같아요. 명작이고, 고전인데 아직 살아 있는 것은 작품 안의 메시지가 강하다는 거거든요. 우리가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거예요. 가장 유명한 대사는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지만 시련 역시 당연한 거라는 걸 일깨워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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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더 재킷은 올세인츠(Allsaints). 로고 티셔츠는 바네사 브루노(Vanessa Bruno). 스커트는 지방시 바이 육스닷컴(Givenchy by Yoox.com). 스트랩 샌들은 스튜어트 와이츠먼(Stuart Weitzman). 후프 이어링은 먼데이 에디션. 레이스 장갑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공연할 때엔, 내일이 없는 것처럼 공연해요. 왜냐하면 무대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제 인생은 둘 중에 하나예요. 무대에서 죽든지, 무대 밖에서 죽든지. 언제나 제 삶에 있어서는 너무 당연한 거예요.

사람들은 당신을 ‘디바’라고 부르죠. 탐나는 찬사인가요?
예전엔 너무 좋아했고, 현재에도 제가 공연할 때 추구하는 단어예요. 하지만 제 음악을 들려드리고 싶을 땐, 그냥 가수면 족한 것 같아요. 예전엔 그런 소리 많이 듣고 싶었는데, 내가 부르는 노래나 내 음악에 충실한 게 더 재미있으니까, 어떻게 저를 부르든 상관없어졌어요.

그래도 덜어내고 덜어낸 후에도 남은 한 가지는 있을 수 있잖아요? 진짜 신념이죠.
내가 하고 싶은 음악에 대해 내 스스로 노력하는 과정에 답이 있는 것 같아요. 그 과정 속에서 모든 게 충족되는 것 같아서요. 좋아하는 일에 집중하는 것. 고민 안 해요, 이제.(웃음) 뭔가 생각하면서 사는 건 좋은데 고민하면서 살긴 싫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