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보호의 기본은 자원을 낭비하지 않는 것이고, 조금 덜 먹기 위해 자발적으로 채식을 선택했다. 환경을 위해 시작했지만 채식은 곧 나를 위한 것이었다.

0412-062-1

정신적 빈곤은 늘 허기를 부른다. 하루 종일 쌓이는 스트레스만큼 음식을 먹어댔다. 마치 고기를 씹는 행위가 내가 가진 불안과 절망을 소진시킬 수 있다는 듯이. 당연히 채워도 채워도 공허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꽉 막 힌 속과 그로 인한 불쾌감만 남았을 뿐이다. 나약한 한 인간은 폭식의 악 순환을 끊기 위해 짧게라도 채식을 체험해보기로 했다. 나는 간절히 ‘덜 어내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호기심도 들었다. 채식을 하면 몸에 변화가 일어날까? 그리고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채식은 몇 년 전부터 꾸준히 저변을 넓혀가고 있으며 이제 서울에서도 심 심치 않게 베지터리언 음식점을 찾아볼 수 있다. 더 이상 채식이 유난스 러운 게 아닌, 삶의 방식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영화 <리틀포 레스트>에는 총 열여섯 가지 음식이 나오지만 이 중에는 고기 요리가 나 오지 않으며 딱 한 번 나오는 고기 반찬도 스치듯 지나간다. 영화를 연출 한 임순례 감독은 동물보호시민단체 카라(KARA)의 대표이자 생선과 해 물 정도만 먹는 채식주의자로 인터뷰에서 “영화에 제 성향이 들어간 것 같다”고 밝히며 “영화에 고기 먹는 장면을 넣으면 그것을 본 관객들은 고 기가 먹어 싶어질 테고, 그만큼 고기 소비가 늘어날 것이 염려됐다”는 말 을 덧붙였다. 그리고 최근에는 스타벅스가 채식주의자를 위한 메뉴를 강 화하겠다고 발표했다. 현재 서울 소공동과 서소문로점 등 8개의 프리미 어 푸드 서비스 매장에서만 판매 중인 바나나 피칸파운드와 애플 시나몬 크럼블, 비건 푸드 2종을 전국 매장으로 확대하는 것을 검토 중이다. 달 걀, 우유, 버터 등 동물성 재료를 일절 사용하지 않고 오직 두유와 베지터 블 오일 등 식물성 재료로만 만들었다.

채식에는 여러 단계가 있고 그중 가장 높은 단계에 있는 것은 비건 , 즉 완 전채식이다. 거기서 몇 가지 옵션을 추가하면 채식의 다양한 갈래가 나온 다. 베지테리언은 총 세 가지 단계가 있으며 우유와 유제품을 먹는 락토 채식, 달걀을 먹는 오보 채식, 달걀과 우유, 유제품을 먹는 락토 오보 채식 으로 나뉜다. 세미 베지테리언도 있다. 우유와 달걀에 조류와 어류까지 먹는 것은 폴로 채식, 우유와 달걀, 어류를 먹으면 페스코 채식, 그리고 상 황에 따라 육식을 하는 플렉시테리언까지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이나 성 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다. 이왕 하는 거 비건에 도전해 보기로 하고, 첫날은 속을 비우고 싶어 하루 종일 세 잔의 클렌징 주스로 연명했다. 전부터 몸이 무겁게 느껴질 때나 급하게 다이어트가 필요할 때 면 한 번씩 주스 디톡스를 해오긴 했지만 오랜만에 마셔보니 역시 기력이 달려 그날은 침대에서 도통 나오지 않은 채 책도 읽고,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낮잠도 잤다. 그리고 집에서는 찰밥, 나물 등으로 식사를 하거나 고 구마, 샐러드 등 평소 식단을 조절해야 할 때 먹는 다이어트 식단을 고수 했다. 약속을 잡을 때는 친구들을 온갖 감언이설로 설득한 후, 비건 식당 을 찾았다. 상수동 ‘슬런치팩토리’는 메뉴판에 친절히 다양한 단계의 채식 주의자들이 먹을 수 있는 메뉴를 표시해놓았기 때문에 음식을 고르기가 쉽고 편하다. 나는 비건 메뉴인 버섯들깨덮밥을 선택했고 친구는 폴로 메 뉴인 시금치 치킨 커리를 골랐다. 들깨로 만든 크림 소스가 풍성한 맛을 뽐냈다. 친구 역시 건강한 음식을 먹었다는 데서 만족감을 느끼는 듯했다. 가끔 몸을 정화하는 차원에서 먹으러 오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스치듯 남겼기 때문이다. 성공! 더 힘든 건 평일이었다. 먹을 수 있는 음식이 한 정되다 보니 점심 식사 메뉴를 고르는 게 일이었다. 고기 자체보다는 유 제품과 달걀 등에 대한 욕구가 강해졌다. 그 두 가지만 있어도 가능한 음 식의 가짓수가 많아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깥에서 먹는 것보다 집에 서 먹는 게 더 쉬웠기 때문에 채식을 마음먹은 동안은 집에 일찍 가고 일 이 있어도 그냥 집에 가서 하는 편을 택했다. 하지만 고비는 촬영과 야근 이 생겨나면서부터였다. 이쯤 되어서는 완전채식은 불가능했다. 그래도 양심상 채식을 버릴 수는 없고, 락토 오보 채식으로 체험을 이어갔다. 그 리고 그 후 그것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다는 이유로 체험을 마치고, 고기 든 뭐든 가리지 않고 섭취하게 되었다. 딱히 고기를 엄청 먹고 싶었던 건 아니고, 음식을 고르는 데 쓸 수 있는 기운이 더 이상 없었다. 신기했던 건 식당에서 제육볶음을 눈앞에 둔 그 순간에도 고기에 손이 잘 가지 않 았다는 점이다. 왠지 바라만 봐도 묘한 부대낌이 느껴졌다.

채식의 효과라고 할 수 있는 건 몸이 가볍고, 속이 편하다는 점이다. 처음 며칠은 당연히 배가 고프고 심지어는 가벼운 어지럼증까지 느꼈지만, 그 럴 때는 따뜻한 차를 마시면 좀 진정됐다. 그 생활이 며칠 지속되고 나니 몸이 가뿐해지는 게 느껴졌다. 또 어떤 걸 먹어도 음식의 맛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맵고 짠, 자극적인 음식을 먹을 때는 몰랐던 재료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게 되었고 뭘 먹든지 간에 누구보다 ‘맛있게’ 먹을 자신이 있었 다. 하지만 그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직장을 다니면서 채식을 실천한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어서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일단 일을 하면서 신경을 쓸 일이 많으니 식사를 할 때만큼은 별 고민 없이 맛 있는 걸 먹고 싶은데, 밥을 먹을 때조차 이것저것 따져야 한다는 점이 괴 로웠다. 또한 ‘나는 채식을 하니까 이런 걸 못 먹어’라고 말하는 것조차 엄 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가까운 친구들이야 나의 사정을 충분히 이해하니 상관없지만 같이 점심을 먹자고 하는 직장 동료들에게 까다롭게 굴고 싶 지 않아서 혼자 먹는 것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은근슬쩍 내가 먹 을 수 있는 메뉴를 팔 것 같은 식당으로 유도해야 했다.

‘그린플루언서’ 인터뷰로 방송인 타일러 라쉬를 만나게 되면서 채식에 대 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육식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 며 불가피한 회식 자리가 아니면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식당 에 고기가 들어간 메뉴밖에 없다면 그나마 환경값이 적은 고기를 선택한 다고. 예를 들어 닭고기보다 소고기를 생산하는 데 들어가는 에너지가 크 기 때문에 환경값이 낮은 닭고기를 고른다고 했다. 그러니 애초에 ‘비건 을 해볼 거야!’라는 다짐은 얼마나 무모했는가. 진정 채식을 하는 방향으 로 식습관을 고치고 싶다면, 우선 해볼 수 있는 범위에서 고기나 생선, 우 유나 달걀 등을 하나하나 줄여가는 게 중요하다. 예를 들어, 고기류를 먼 저 끊고 조류나 생선을 끊는 식으로 점차 채식의 폭을 넓혀가는 게 훨씬 성공률이 높지 않을까? 그렇게 한다면 우유나 달걀, 유제품은 자신 없더 라도 언젠가 고기를 아예 안 먹는 순간이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 다. 지구를 위해서,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