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가슴속에 사직서를 품고 산다. 회사가 힘들어서, 사람 관계가 복잡해서, 꿈을 찾아서, 돈을 더 벌고 싶어서 등 다양한 이유로 과감한 결정을 내린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

 

0302-100-4

0302-100-5

 김지양

33세 | 플러스 사이즈 모델, <66100> 편집장 

그녀는 대한민국 최초의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다. 2010년, 폴 피겨 패션위크 LA를 통해 데뷔, 아메리칸어패럴 플러스 사이즈 모델 8위, 베네통코리아 포토 콘테스트 Top 20에 이름을 올렸다. 그녀 역시 여러 회사에 다녔다. 외식조리학과 전공을 살려 대기업 외식 사업부에도 있었고 소셜커머스 회사에서 마케터로 근무했다. 그러던 중 <도전 슈퍼모델 코리아> 오디션 공고에서 “당신이 주인공입니다.” 문구를 보고 모델 세계에 발을 들였다. 165cm, 70kg, 88사이즈. 일반 모델과는 다른 신체 조건이지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홈쇼핑을 제외하고 한국에서 플러스 사이즈 모델로 설 수 있는 자리는 없었다. 결국 미국과 유럽, 세계 각지의 모델 에이전시에 프로필과 자기소개서를 보냈다. 그렇게 미국 플러스 사이즈 모델 패션쇼인 ‘FFF Week’에서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답변이 왔다. 방 보증금을 빼 미국으로 날아가 데뷔 무대를 치렀다. 국위 선양했지만 한국에 와도 변한 건 없었다. 모델은 주체적인 직업이라 누군가 불러주지 않으면 카메라 앞에 설 수 없기 때문이다. 플러스 사이즈 여성을 위한 쇼핑몰을 시작했지만 수입은 변변찮았다. 미국에 가기 위해 초등학교 급식실 설거지는 물론 치킨집에서 닭도 튀겼다. 각고의 노력 끝에 한국에도 점점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온스타일’의 <바디 액츄얼리>의 MC를 맡게 되었다. 영역을 넓혀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 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66100>이라는 잡지의 발행인으로도 나섰다. 플러스 사이즈 패션, 음악, 영화, 섹스칼럼 등 다양한 기사가 실린다. 현재는 뚱뚱한 이들을 위한 ‘66100’이라는 쇼핑몰도 운영 중이다. 물론 수입은 전보다 훨씬 나아졌다. 하루에 2시간 정도밖에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고되지만 행복하다. 그녀에게 다시 회사에 들어갈 생각이 있냐고 물었다. “아니요. 아마 회사에서 저를 원하지 않을걸요?”

 

0302-100-2

0302-100-3

김아영

28세 | G1 강원민방 취재기자 

그녀는 어릴 때부터 언론인이 되고 싶었다. 글을 쓰는 게 좋았고 경험한 걸 남들에게 들려줄 수 있어서였다. 졸업하고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항공사 채용공고를 봤고 무작정 지원했다. 탁하고 지원했는데 억하고 뽑혀 얼떨결에 승무원이 되었다. 1년간 비행기를 타고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승무원 생활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남들이 선망하는 직업인 데다 보수도 셌다. 근데 가슴 한쪽에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비행기가 착륙할 즈음, 비상구 옆 보조 의자에 앉아 늘 같은 고민을 했다. ‘승객이 부르면 가서 서빙을 하는 것. 이게 과연 내 적성에 맞는 걸까? 난 주체적으로 일하고 싶은데.’ 결국, 호기롭게 회사를 나왔다. 처음에는 아나운서 시험을 준비했다. 연이은 탈락에 좌절을 맛볼 즈음. 논술과 작문이 더 적성에 맞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방송국, 신문사에 기자 채용 공고가 뜰 때마다 지원했다. 1년 반의 이직 준비, 합격한 곳은 강원도에 있는 방송국이었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연고 하나 없는 곳으로 이사를 했고 지금은 차근차근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다. 그녀는 더 이상 회사를 다니는 게 두렵지 않다. 옷을 편하게 입을 수 있고 힐을 신지 않아도 된다. 낮과 밤이 없었던 승무원과는 달리 출퇴근 시간도 규칙적인 편. “제가 쓴 기사로 누군가가 도움을 얻고 잘못된 게 바로잡혔을 때, 저는 큰 보람을 느껴요.” 그녀는 천생 기자다.

 

0302-100-6

0302-100-7

조효석

33세 | 가구 제조 업체 ‘Kaelmac’ 대표 

그동안 건축회사를 7년이나 전전하며 많은 건물을 지었다.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특히 남초 회사에서 일하는 건 기 빨리기 쉽고 에너지 소비가 많다. 매일 아침 9시에 출근하여 밤 11시 퇴근. 새벽 2시에야 잠이 들었다. 하루의 미팅이 평균 4개. 그동안 마신 커피를 합치면 반얀트리 수영장을 가득 채울 거라고 했다. 회사에 몸을 갈아 넣은 덕분에 승진은 빨랐다. 남들보다 일찍 팀장을 달았고 사내의 유망주로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기분에 취해 정작 자신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32살. 지금이 아니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부터 꿈꿔왔던 가구 제조업을 위해 회사를 관뒀다. 이름은 ‘켈맥(Kaelmac).’ 뜻이 있는 단어는 아니고 단단하고 차갑고 시크한 느낌이 들어서 이렇게 지었다. 회사를 관두자마자 휴식도 없이 일을 시작했다. 잠시 중국 여행을 다녀왔지만 그마저도 시장조사 겸 박람회를 보기 위함이었다. 요즘도 하루에 3건 이상의 미팅을 한다. 제품 생산자들을 만나 디테일 관련 이야기를 하고 제작 단가에 대해 협의도 한다. 결국 가구 제작에 관한 내용이다. 승진도 없고 연봉 협상에서 유리한 조건을 얻는 것도 없지만 열심히 하는 만큼 성과로 나타난다는 생각에 여전히 바쁘게 뛰어다니는 중이다. 여전히 새벽 2시에 잠들어 아침 6시에 일어난다. 그래도 피로감은 전보다 덜한 것 같다. 그에게 퇴사하고 제일 좋은 게 뭐냐고 물었다. “낮에 눈치 보지 않고 세차하러 갈 수 있어서 좋아요. 전 세차를 참 좋아하거든요.”

 

0302-100-8

0302-100-9

박가람

28세 | 구두 브랜드 ‘Rami PP’ 디렉터 

전에는 선글라스 브랜드 마케팅을 담당했다. 지금은 자신만의 구두 브랜드를 만들어 운영하는 중이다. 말이 좋아 마케터지 하나부터 열까지 잔심부름, 허드렛일이 대부분이었다. ‘일을 빨리 배울 수 있어서 좋다’라는 자기암시는 3년이면 충분했다. 흥미를 잃은 지는 오래, 몸은 지쳐갔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브랜딩’에 대해 서서히 감이 잡힐 즈음. 예전부터 알던 분에게서 동업 제의가 왔다. 평소 관심사였던 ‘구두’ 사업이기에 확 끌렸다.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직접 시안을 찾아 룩북을 찍었고 구두 디자인에도 참여했다. 발로 뛰어다니며 시장조사를 했다. 새벽시장도 마다하지 않았다. 0에서 시작한 사업이 점점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택배물을 포장하는 일도 재미있다.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사는 중이다. 소문이 났는지 다양한 곳에서 오퍼가 왔다. 지금은 더 새로운 게 없을까 기획 중이다. 이제는 브랜드를 넘어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좋아하는, 그리고 함께 즐길 수 있는 사람만 있다면 다른 일에도 도전해볼 생각이다.

 

0302-100-10

이혜린

32세 | UX 디자이너 

그녀는 퇴사했다가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다. 첫 회사는 UX 디자인 에이전시, 작은 스타트업 기업이었다. 창립 멤버는 아니고 조금 늦게 합류했다. 작은 회사에서 일하다 보니 체계적이지 않은 업무 시스템이 마음에 걸렸다. 이해가 되지 않는 상사의 지시, 잦은 야근 등 회사는 조건 없는 희생을 강요했다. 연차 외에 다른 복지는 없었다. 마치 회사의 부품처럼 느껴졌다. 창립 멤버와 비교해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것도 서러웠다. 더 늦기 전에 디자인이 아닌 다른 분야에 도전하겠다며 회사를 나왔다. 전부터 관심 있던 마케터로 지원해볼 생각이었다. 이력서를 넣고 면접도 봤지만 계약 조건이 맞지 않았다. 확 끌리는 곳도 없었다. 종종 주변 지인들이 일거리를 줬기에 프리랜서 디자이너를 하며 근근이 버텼다. 그렇게 7개월이 지났다. 백수였지만 나름의 철칙이 있었다. 출근할 때처럼 아침 7시에 일어났고, 낮에는 부지런히 사람들을 만나 일거리를 물어왔다. 그 외의 시간에는 작업하거나 영어 학원에 다녔다. 수입이 불안정하니 모아둔 돈이 점점 바닥을 드러냈다. 숨만 쉬어도 월세를 포함한 1백만원이 통장에서 빠져나갔다. 점점 초조해졌고 결국 다시 취직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회사를 여유 있게 고르기로 했다. 전망이 좋은 클라우드 사업, 그곳에서 예전에 하던 UX 디자인을 계속하기로 했다. 마케터의 꿈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역시 디자인을 할 때가 제일 행복하다. 이걸 깨닫는 데 7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저는 제가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생각보다 규칙적인 생활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0302-100-11

0302-100-12

김사언

42세 | 유튜버 

“또 관뒀니?” “끈기가 없네.” 회사를 관둘 때마다 가장 많이 듣던 말이다. 지난 10여 년간 그는 7~8군데 회사를 전전했다. 끈기가 없는 게 아니었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잡고 있던 탓이었다. 패션 회사에서 영업관리, 상품 MD일을 했다. 과감하게 신발 사업에도 뛰어들었지만 끝은 좋지 않았다. 4년 전, 그는 애니메이션 회사를 마지막으로 과감하게 사표를 던졌다. 그러고는 유튜브에 뛰어들었다. 초행길이라 누구 하나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채널 콘셉트를 몇 번이나 갈아엎었다. 수십 번의 시행착오 끝에 키즈 카테고리에서 장난감과 교육을 접목한 영상을 만들기로 했다. 맨땅에 헤딩은 곧 통장의 출혈로 이어졌다. 잔금은 바닥을 드러냈고 대출을 생각할 즈음 첫 수입이 생겼다. 30만원. 1년 동안 모아둔 돈을 까먹으며 버텼다. 유튜브는 광고에 의한 수익 구조라 매달 수입이 불규칙하다. 2년이 지나서야 예전 월급만큼 벌었고 3년이 지나서부터 점점 나아졌다. 4년이 지났다. 이제는 제법 자리를 잡았다. 가장 많이 본 콘텐츠는 1700만 뷰를 기록했다. 상사 없이 혼자 일하다 보니 별도의 결재 과정이 없어서 좋다. 유튜브는 예약 기능이 있어서 미리 업로드 예약을 걸어두고 여행을 갈 수도 있다. 그는 이제 다른 채널을 통해 패션 콘텐츠를 만들려고 계획 중이다. 혹시 모르지. 키즈와 패션을 결합한 키즈 패션 콘텐츠를 만들지도.

 

0302-100-13

이소연

33세 | 한국어 강사 

그녀는 지금 독일 베를린에 가기 위해 준비 중이다. 출국 날짜는 3월 초. 세계에 한글을 알리고 직접 한국어 수업을 여는 국가기관 세종학당 재단에 지원했다. 앞으로 1년간 독일에서 거주하며 한국어를 가르칠 예정이다. 예전에도 같은 일을 했다. 다만 회사 생활이 맞지 않아 그 무대를 옮겼을 뿐. 그전까지는 대학교 어학당에서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수업에 필요한 행정 업무를 처리했다.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을 만나고 한글을 알릴 수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일한 지 3년이 지나면서 매너리즘이 찾아왔다. 업무의 강도는 강했지만, 보상은 그에 못 미쳤다. 다른 직종의 친구들과 비교해 도태되는 건 아닐까 하는 조바심도 났다. 생각해보면 이만한 회사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과연 관두고 무얼 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됐다. 그렇게 고민하며 3년을 더 다녔다. 언젠가부터 퇴사를 위해 차근차근 준비했던 것들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회사를 나오는 날, 회사 동료의 반응은 의외였다. “여기보다 그곳이 더 좋을 거야. 부러워. 꼭 행복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기에 서운해하거나 아쉬워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녀는 지금 누구보다 많이 설렌다. “불만이 있더라도 참으면 지나가는 게 있고 계속 앙금처럼 남아 있을 때가 있어요. 그럴 때는 변화가 필요해요. 그 자리에 머물면서 불평만 하면 마음이 병들어요. 저는 새로운 도전을 찾고 준비하고 퇴사하기까지 3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어요.”

 

0302-100-14

이현지

27세 | 뱅갈 고양이 브리더

그녀는 뱅갈 고양이를 전문적으로 관리하고 교배하는 전문 사육가다. 그녀가 고양이를 처음 만난 건 2년 전 즈음. 호텔리어로 일하며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때였다. 봉급은 넉넉지 않았고 타지 생활을 하며 마음 둘 곳이 필요했다. 그렇게 뱅갈 고양이 두 마리를 식구로 들였는데 이렇게 인생까지 바뀔 줄은 몰랐다.
첫 새끼가 태어나며 전문적으로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공부할 게 많았다. 고양이에 대한 지식부터 반려동물의 시장성, 마케팅, SNS까지 책을 가리지 않고 읽었다. 펫 박람회, 펫쇼 등 반려동물 관련 행사는 다 참가해서 관련 종사자들을 만났다. 처음에는 회사에 다니며 고양이들을 관리했는데, 수가 늘어나자 병행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회사를 관뒀다. 그리고 전국을 뒤져 우수한 혈통의 뱅갈 고양이를 데려왔다. 해외에서 온 아이도 있다. 고양이가 10마리 가까이 되니 좁은 집에서 살 수가 없었다. 결국, 이사를 했다. 최근 고양이가 16마리가 더 태어났다. 현재 총 25마리의 수발을 드는 중이다. 밥 주고, 변 치우고, 청소하고, 산책 시키면 하루가 간다. 집을 장기간 비울 수도 없다. 모든 게 고양이에게 맞춰진 삶. 본인이 먹는 것보다 고양이들에게 더 좋은 걸 먹인다. 본인 옷은 안 사도 고양이들을 위한 장난감이나 용품을 사는 데에는 아끼는 법이 없다. 그래도 고양이들을 볼 때마다 절로 웃음이 난다. 행복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회사 다닐 때보다 많이 번다.

 

0302-100-15

0302-100-16

원정운

33세 | 맞춤정장 ‘포튼가먼트’ 합정점 대표

번듯한 가게를 열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졸업하고 작은 회사에 마케팅, 광고 영업직으로 들어갔다. 쓸데없는 미팅, 의미 없는 술자리가 많았다. 오래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일하려면 늘 정장을 입어야 했다. 지인이 하는 테일러숍에 갔다가 치수를 재고 내 몸에 딱 맞는 슈트를 입는 순간 느꼈다. ‘이거다.’ 어려서부터 옷은 늘 좋아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슈트를 제작한다는 것도 멋져 보였다. 회사를 관둔다니 부모님의 반대도 심했다. 아버지 역시 사업을 하셨지만 잘못되어 빚더미에 올랐다가 살아난 적도 많으니까. “1백만원이라도 고정적으로 버는 게 낫다”고 혼났다. 일을 배우는 과정도 녹록지 않았다. ‘가게를 내고 싶어서 일을 배우고 싶다’고 하니 세 번이나 퇴짜를 맞았다. 삼고초려 끝에 견습생 신분으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매장 내에서 나이가 많은 편이었지만 형, 동생 할 것 없이 시키는 건 군말 없이 했다. 주말에도 쉬는 날 없이 일을 배웠다. 그렇게 1년 동안 친구들도 등지며 일만 했다. 일이 손에 익었을 때, 대출을 받아 합정동에 작은 가게를 열었다. 직원은 전부터 알던 친한 동생 한 명. 그렇게 또 몇 년을 버텼다. 어느새 직원은 다섯 명으로 늘어났고 2층짜리 단독건물을 매장으로 사용할 정도로 성장했다. 물론 대출금은 아직도 갚는 중이지만. “인생에 있어 뚜렷한 목표가 있고 절실한 마음이 있다면 도전할 가치가 있습니다. 일단 시작하세요. 나이가 들수록 포기해야 할 게 많아집니다.”

 

0302-100-17

0302-100-18

이정빈

27세 | 모델 겸 배우

그녀는 승무원이었다. 지금은 카메라 앞에 선다. 여러 광고에서 모델로 활동 중이고 작은 역할이지만 작품 활동도 꾸준히 하고 있다. 회사생활이 힘들어서 관둔 건 아니었다. 모든 게 우연이었다. 어릴 때부터 배우를 꿈꿔왔지만 큰 연이 없었다. 결국 졸업하고 승무원을 준비했다. 오랜 준비를 거쳐 비행기를 탔지만 배우의 꿈이 안에서 꿈틀거렸다. 그러던 중 우연히 캐스팅되어 기회를 잡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표를 냈다. “잘 다니고 있는 좋은 직장을 왜 그만두냐”며 잔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래도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도전하고 싶었다. 관두자마자 프로필 사진을 찍고 매일 연기 레슨을 받았다. 광고 대행사 미팅, 작품 오디션을 보는 반복된 생활. 때로는 꾸지람을 들을 때도 있지만 늘 그 과정 중에서 또 하나를 배운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영화 <명당>에 기생 역할로 참여했다. 크고 작은 배역이 중요한 게 아니라, 꿈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다는 것. 그녀는 그걸로 행복하다.

 

0302-100-19

조정진

33세 | 디지털마케팅 홍보대행사 대표 

애초부터 사업을 하고 싶었다. 첫 회사에 들어갔을 때부터 느낌이 왔다. ‘내 길이 아니구나.’ 그래서 전투적으로 일을 배웠다. ‘대표님 돈으로 내 사업을 연습한다’는 패기 넘치는 마인드였다. 28살에 작은 스타트업 회사 창립 멤버로 들어갔다. 돈은 됐고 홍보팀을 잘 꾸려서 3년 뒤에 독립하는 게 조건이었다. 그렇게 3년 뒤, 압구정동에 작은 사무실을 얻어 독립했다. 시작은 미미했다. 작은 쇼핑몰 클라이언트 몇 개가 전부였다. 지난 1년간 매일 새벽 6시에 출근해서 다음 날 새벽 2시에 퇴근했다. 직접 발로 뛰어다니며 1000개의 회사에 전화하고 메일을 보내 만나달라고 애원했다. 하나, 둘 클라이언트가 늘어났다. 지금은 조르지오 아르마니, 피지오겔 등 굵직한 업체와도 일한다. 하지만 사장이 된다는 건 생각보다 힘들다. 직원을 다루는 법을 몰라 마찰이 잦았다. 갖가지 사건 사고를 겪으며 어린 나이에 감당할 수 없는 무게감에 눈물도 많이 흘렸다. 젊은 꼰대가 되어가는 것 같아 자괴감도 든다. 그래도 차차 나아지는 중이다. 전보다 야근도 적고 직원들과도 원만하게 지내는 중이다. 다시 회사로 갈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미 배울 건 다 배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