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어디에 있는지 모를 성공을 향해 달려왔더니 남은 것은 행복은커녕 이유 모를 절망과 허무뿐이었다. 제2의 사춘기를 맞아 문득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 스물아홉의 자기고백, 그리고 새로운 행복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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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이제 막 스물아홉 살이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나는 때 아닌 사춘기를 겪고 있다. 목표도, 방향도 모두 잃은 채 삶이 어디론가 쓸려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항해를 하던 중에 목적지를 잃고 바다 위에 둥둥 표류하고 있는 배와 같은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인생의 반 이상은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삼기 위해 달려왔다. 학창시절에는 성적이 좋으면 미래에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늘어날 것이라는 말을 믿고 공부를 열심히 했고, 결과적으로 꽤 괜찮은 학교를 졸업했다. 정확히 ‘무엇’이 되어야겠다는 확신은 없었어도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 분야에서 인정받는 ‘커리어우먼’이 되고 싶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일을 잘할 수 있으려면 먼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된다고 생각했고 어떤 가능성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늘 다양한 꿈을 품고 자랐다. 그리고 결국에는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럼 동화는 여기서 끝나야 한다. ‘그렇게 왕자님과 공주님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성공을 향해가던 열차는 선로를 이탈하기 시작했고, 나는 성공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을 마주했다. ‘성공이 대체 뭐지?’, ‘어떤 인생이어야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게다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행복할 줄 알았던 건, 그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우여곡절을 생략하는, 말하자면 논리적 비약인 셈이었다. 인생은 행복을 기반으로 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고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스스로에게 행복하냐고 물으면, 우물쭈물 대답을 회피하게 됐다. 행복은 대체 뭘까? 행복해지는 건 원래 이렇게 어려운 걸까?

이런 고민의 나날 속에서 ‘소확행’이라는 신조어를 접했다. 각종 책과 언론에서 2018년의 트렌드 중 하나로 꼽는 단어, 소확행은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의미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수필 <랑겔한스섬의 오후>에서 처음으로 소확행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때의 기분을 그 예로 들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무려 1994년에 자신의 에세이에서 쓴 소확행이라는 단어가 2018년 한국 사회의 트렌드로 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밀레니얼 세대로 불리는 2030 세대가 주 소비 계층으로 떠오르면서 사회 전반에 작은 행복을 찾는 분위기가 확산되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특히 사상 최악의 실업률이 이어지면서 취직하기도 쉽지 않고, 취업을 한다 해도 치솟는 물가와 집값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인식 때문에 청년들이 오히려 일상 속 작은 행복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한 번뿐인 인생 즐기며 살자는 의미로 몇 년 전부터 유행하던 ‘욜로(YOLO: You live only once)’ 열풍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이 단어는 거시적인 차원의 행복을 찾던 나에게 미시적인 행복의 가능성을 던져주었다. 우리는 인생에 어떤 거대한 목표가 있어야 할 것처럼 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사실 우리의 인생은 점 같은 작은 일상이 모여 만드는 하나의 선에 더 가깝지 않은가? 이쯤 되니 성공과 행복은 학습된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새해부터는 좀 더 단순하고 직관적인 행복에 집중해보기로 했다. 진부하지만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도 있으니까.

최근에 읽은 책 <소중한 것은 모두 일상 속에 있다>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나는 생각합니다. 우리 삶의 기쁨은 바로 지금, 바로 여기에 있다고. 인생의 참된 재미는 ‘매일을 야무지게 영위하는 과정’ 속에 있다고. 그래요, 그것은 당신이 흘리는 눈물 속에, 당신 바로 곁에서 들리는 명랑한 웃음소리 속에, 당신이 피부로 느끼는 부드러운 온기 속에 담겨 있습니다.”

과연 나의 사춘기는 끝날 수 있을까?


당신의 소확행은 무엇입니까?

<얼루어> 에디터 10명이 평소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순간에 대해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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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반려견 두부이지만, 가장 보고 싶은 건 외출 후 집에 들어가기 10초 전. 갖은 애교로 반겨주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박카스가 따로 필요 없다. – 김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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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방해도 없는 주말 아침, 따뜻한 구스 이불 속에 몸을 둘둘 말아 넣고, 아무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재미난 TV 프로그램 앞에 앉아 상큼한 과일 또는 고소한 커피 홀짝이기. – 김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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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을 때 그 하늘이 예쁘면 찰나의 행복과 위로를 느낀다. 구름 한 점 없는 맑고 파란 하늘이어도 좋고, 해질녘에 핑크 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하늘이어도 좋다. – 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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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눈을 떴는데 아직도 하루가 남아 있을 때 심심한 행복을 느낀다. 가끔은 어떤 방해도 받지 않는 나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TV 소리도, 누구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공간이라면 좋다. 나른하고 나른하게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는 날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 송명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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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증을 겪었을 때 우연히 알게 된 ASMR(뇌를 자극해 심리적 안정을 유도하는 영상). 확실한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후에도 계속해서 찾아 듣고 있다. 유튜브에 찾아보면 국내외를 막론하고 퀄리티 좋은 영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중 나긋나긋하게 읽어주는 <오즈의 마법사> 동영상을 가장 좋아한다. 정말 도로시가 옆에 있는 것 같다. – 이하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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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를 하면 행복해진다. 그게 꼭 거창하거나 값비싼 물건일 필요는 없다. 당장 필요한 것이 아니더라도 소비하는 행위 그 자체가 주는 행복이 있다. 특히 잔뜩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질소가 가득한 큰 부피의 과자 봉지, 아기자기한 비주얼의 액세서리나 문구 등을 구입하곤 한다. – 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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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 1초가 급한 마감이 끝나고 나면 찾아오는 짧은 여유. 그럴 때면 어김없이 프로젝터로 밀린 영화를 본다. 여기에 달큼한 과자와 맥주가 함께라면 이것이야말로 나의 소박하지만 가장 확실한 행복이 아닐까. 이번 마감이 끝나면 또 어떤 영화를 볼까? 벌써부터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다. – 김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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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남편과 다퉜다. 우주에 홀로 남은 느낌으로 침대에 누워 한숨을 쉬었는데, 푸찌가 ‘총총 총총’ 발소리를 내며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곤 고개를 한 번 갸우뚱하더니 가까이 와 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나의 강아지 푸찌. 평생 온전한 내 편일 이 생명체가 나를 바라보는 모든 순간이 위로이자 행복이 아닐까? – 이정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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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따뜻하고 포근한 침대에 엎드려 누워 만화책을 보며 귤을 까먹는 그 순간! 오늘 나를 힘들게 한 일들은 기억도 나지 않고 행복이 밀려온다. – 예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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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좀 위로하고 싶은 날 하얀 장미를 산다. 꽃 시장에서 제일 하얀 것으로 골라서 대충 종이로 말아 쥔다. 화려한 포장 없이도 우아한 꽃봉오리, 코 끝으로 올라오는 맑은 장미향, 살결처럼 부드러운 꽃잎까지. 싱싱한 그 꽃잎이 하나 둘 떨어지고 하얀 장미가 시들어 마를 때까지. 그 모든 순간을 보는 것이 행복하다. – 홍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