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진짜 두렵게 하는 건 고독이 아니라 고립이다.

0129-223

올해도 어김없이 몹쓸 밸런타인데이가 다가오고 있다. 나도 한때는 밤사이 현관문 앞에 몰래 초콜릿 상자를 두고 간 남자친구가 있었다.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은? 초콜릿은 고사하고 문틈 사이로 동네 주민센터에서 보내온 독거 세대주 신청 고지서만이 나를 반긴다. 혼자 사는 청장년층 독거자들을 보살펴주겠다는 친절하고 사려 깊은 제안. 30대 독신녀에게 “왜 싱글이에요? 멀쩡하게 생겨서 눈이 너무 높은 것 아니에요? 참 이상한 일이네요”라며 걱정을 가장한 타박을 하는 것 보다는 훨씬 예의 바르고, 깔끔하며 실용적이다. 지난해부터 유난하게 기승전결혼으로 닦달하던 엄마의 잔소리는 올해 들어서자 “그렇게 혼자 살다가 갑자기 아프거나 하면 어떻게 할래?”로 업데이트됐다. 더욱 구체적이고 노골적인 서커 펀치. 연애와 결혼에 대한 압박에는 늘 “알아서 할게”로 일관하던 내가 처음으로 말문이 막혔다. “그러게, 어떻게 하지?”

혼자 사는 독립 생활의 즐거움은 말하지 않아도 누구라도 공감할 것이다. 아무 때나 내가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내키지 않으면 청소도 패스하고, 속옷을 훌러덩 벗고 있어도 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는 완전한 자유, 평온, 해방! 다만 ‘전화기를 전부 뒤져봐도 딱히 보고 싶은 사람도 없지만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지금 누구라도 보고 싶어’라는 오지은의 노래 가사처럼 이따금씩 옅은 우울함과 외로움이 엄습할 때는 있다. 그러나 뭐,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삶이다.

그런 내가 별안간 혼자 사는 생활에 대한 불안함에 휩싸였다. 발단은 건강검진 결과. 평소 잔병치레 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건강은 자부했는데, 심전도 결과에서 동성서맥이라는 예상치 못한 소견을 들었다. 의사는 맥박수가 정상적인 심박보다 다소 느리게 뛰는데 심리적으로 긴장을 하거나, 검사 당일 컨디션에 따라 일시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증상이니 큰 우려는 안 해도 된다고 이야기했다. 우선 안심했지만,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다 말고 “잠깐, 그럼 샤워하다 갑자기 심근경색으로 죽을 수도 있는 거 아니야? 그럼 얼마 만에 발견될까? 아 그럼 나체로 발견되는 건데… 안 되는데”라는 걱정이 물줄기를 따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신발장 위에 대충 던져뒀던 독거 세대주 신청 고지서를 집어 들고 꼼꼼히 읽었다. 청장년 1인 거주 세대자 네트워크에 등록하면 정기적으로 지자체에서 복지사와 소통을 하며 긴급 상황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 몇 달 전 한 여배우가 혼자 살던 오피스텔에서 사망한 지 2주 후에 발견되어 안타까움과 충격을 준 일이 떠올랐다.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불쑥 엄마의 잔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문득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봤다. 배스 타월을 뒤집어쓴 내 몰골이 지난주에 본 데이비드 로워리 감독의 영화 <고스트 스토리> 속 유령 C의 모습과 환영처럼 겹쳐 보였다. 영화에서 사랑하는 연인을 남겨두고 죽은 C는 영안실에서 눈을 뜬다. 유령이 된 그는 하얀 이불보를 뒤집어쓰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함께 살던 사랑하는 여인 M이 떠난 그 작고 낡은 집에서 지독한 고립과 상실감에 갇히게 된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의 시 빈집을 먹먹한 마음으로 되뇌었다. 그렇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혼자라는 건, 혼자 남겨진다는 건 두렵다. 불쑥불쑥 찾아드는 외로움이나 고독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립감에 대한 공포다.

시대는 변하고 있다. 굳이 통계청의 자료를 증거로 들지 않아도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싱글로 살거나,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싱글 여성들의 인생의 바이블인 미국 드라마 <섹스앤더시티>의 작가 리즈 투칠로는 첫 장편 소설 <싱글로 산다>에서 우리가 앞으로 세상의 모든 싱글들에게 해야 할 질문은 “왜 싱글이에요?”가 아니라 “싱글로 어떻게 지내고 있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나도 내가 35살까지 이러고 살 줄은 몰랐다. 나는 스타벅스에 앉아 이 글을 쓰면서 주변 풍경을 살핀다. 적절한 간격을 유지하고 저마다의 일에 몰두한 사람들. 적절한 연대감과 안도감이 느껴진다. 굳이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카페에 나와서 하는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초콜릿과 남자친구가 아니라, 적당한 거리에서 나를 지켜봐줄 타인과 나의 접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