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한, 아니 세계가 사랑한 김연아 선수가 은퇴한 것이 2014년. 그 후 3년이 지난 오늘의 피겨 스케이팅은 어떨까? 평창동계올림픽이 바짝 다가온 지금, 새로운 선수들이 빙판을 녹이며 넥스트 김연아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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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겨 스케이팅은 특별하게 아름답고 잔인한 종목이다. 얼음 위에서 얇디 얇은 스케이트 날에 모든 체중을 싣고, 그날의 방향을 규칙에 맞게 사용하며 아름답고 큰 원을 얼음 위에 그리고, 스핀에서의 회전수를 정확히 채우며, 2회전 반 혹은 3회전 혹은 4회전 점프를 한 다음 흔들림 없이 얼음 위에 착지해야 하고, 그 와중에 상체도 우아하게 움직이며 손가락 끝까지 연기를 해야 한다. 동시에 좋은 음악을 고르고, 그 음악에 맞는 멋진 안무를 결정하고, 그에 어울리는 의상을 갖춰야 한다. 그러니까 피겨스케이팅은 정교하고 특별한 기술과 아름다운 연기가 곁들여져야 하는, 댄서이자 배우이자 운동선수로서 단 몇 분 동안 관객과 심판을 사로잡아야 하는 종목이다. 여자의 경우 쇼트 경기 2분 40~50초, 프리 경기 4분~4분 10초 동안, 남자의 경우 쇼트 경기 2분 40~50초, 프리 경기 4분 30~40초 동안 완벽한 연기를 펼쳐야 한다.
그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선수들은 수도 없이 빙판 위에서 넘어지고 쓰러진다. 미국의 올림픽 피겨 스케이팅팀 코치 톰 자크라섹은“쿼드러플(4회전 점프)은 얼음 위에 착지할 때 발목에 체중의 일곱 배 정도의 압력이 가해진다. 어떤 선수는 쿼드러플 시도 중 얼음 위에 넘어질 때 창자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처럼 고통스럽다고 표현한 바 있다”고 전했다. 그런데도 더 높이, 더 빨리, 더 멀리 뛰어서 최고의 점수를 받고자 하는 욕망에는 끝이 없다. 관계자들은 1~2년 내로 4회전 반 점프가 등장할 것을 예상하고 있다. 심지어는 5회전 점프도 어쩌면 가능하다는 얘기까지 흘러나오고 있다.

 

넥스트 김연아를 꿈꾸는 선수들
한국의 경우 김연아라는 선수, 피겨 스케이팅 역사를 통틀어 손에 꼽히는 위대한 선수를 ‘뜬금없이’ 배출 했지만, 김연아가 은퇴한 이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피겨 스케이팅은 다시금 관심 밖이 된 것 같다. 김연아가 그토록 간절히 희망했던 피겨 전용 경기장은 정치인들이 몇 번 공수표만 날린 채 결국 설립되지 않았다. 초등학생까지 섞여 있는 어린 선수들은 여전히 쇼트트랙이나 아이스하키용 빙질의 경기장을 한밤중에 혹은 새벽에 대여해 시간을 쪼개 연습하는 실정이다. 피겨 스케이팅에 알맞은 빙질은 다소 무른 편이어야 하는데, 얇은 연습복을 입은 어린 선수들은 쇼트트랙이나 아이스하키에 필요한 딱딱한 얼음 위에서 온몸을 던져 점프 연습을 한다. 그래서 한국 선수들의 부상은 유독 고질적이며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악조건을 이겨내며 김연아 이후의 선수들은 부지런히 박차를 가하고 있다. 김연아를 지켜보며 피겨에 대한 꿈을 키운 어린 소년소녀들 중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이름은 박소연이다. 세계선수권대회에서 9위를 기록했고 시니어 그랑프리 대회를 네 시즌 연속으로 출전하는 등 김연아 이후 최고의 기록을 세웠다. 파워풀한 점프와 우아한 연기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고, 평창 올림픽 무대에 서는 것이 가장 큰 목표라고 거듭 말했던 박소연의 꿈이 이뤄지지 않으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2016년 말 박소연은 발목이 골절되는 큰 부상을 입었고, 몇 개월 동안 세 차례의 수술과 긴 재활을 거쳤다 .
올림픽 출전자를 뽑기 위해서는 국내 대회 세 번에 걸친 기록의 총점을 합산해야 하는데, 박소연은 아직 부상에서 덜 회복된 여파 때문에 현재까지 열린 1~2차 선발전에서 순위가 조금 처져 있다.
평창 무대에 서게 될 두 명의 여성 스케이터 중 한 자리를 차지할 것으 로 가장 확실시되는 선수는 최다빈이다. 어릴 때부터 ‘점프 신동’이라는 얘기가 오갈 정도로 속칭 ‘컨시,’ 즉 경기할 때 기복이 덜하고 점프 실수가 거의 없는 선수였다. 다만 표현력과 연기력이 약점으로 지적되었다. 점프는 기본이며 그에 더한 아름다움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최다빈의 점수는 늘 약간씩 부족했다. 그런 그가 작년부터 달라졌다. 미국에서 스케이팅 스킬과 표현력에 대한 훈련을 받고 돌아온 그가 몸을 쓰는 것이 달라졌다. 훨씬 부드럽게, 우아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평창 무대에 서고 싶다는 그의 간절한 노력은 보답받았고, 작년 말에서 올해 초 그는 선수 커리어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다. 최다빈은 세계선수권대회 01위, 동계아시안게임 금메달, 4대륙선수권대회 5위 등의 성과를 내며, 평창올림픽 피겨 여자 싱글 부문의 한국 출전권 두 장을 따온 주인공이기도 하다.
김나현과 김하늘, 안소현 역시 주요 여자 스케이터로 꼽힌다. 이 중 표현력 면에서 탁월한 평가를 받는 김나현은 지난 시즌 휘트니 휴스턴의 히 트곡 ‘I will always love you’에 맞춰 연기한 쇼트 프로그램으로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었다. 그러나 역시 작년 말 불의의 큰 부상을 당하면서 아직까지 완전하게 회복하지 못해 팬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김하늘과 안소현은 표현력 면에서 혹은 점프의 정교함에서 조금씩 못 미치는 성적을 거두었다가, 절치부심한 올해에 월등히 좋은 성적을 기록하고 있어 평창 출전의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언론에서 집중적으로 조명한 ‘주니어 3인방’ 선수들이 평창 후보에 왜 이름을 올리지 못하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김예림, 유영, 임은수는 현재 중학교 1~2학년 학생들로서, 평창에는 나이 제한 때문에 나가지 못한다. 그들의 눈은 이미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맞춰져 있으며, 작년부터 세계 주니어 대회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이목을 집중시키는 중이다. 특히 국내 기록에서 김연아 선수 주니어 시절의 점수를 뛰어넘으며 김연아로부터도 “당시의 나보다 훨씬 잘한다”는 찬사를 끌어낸 유영은 얼음 위에서 폭발하는 에너지로 보는 이들까지 전염시키는 매력을 선보인다. 임은수는 주니어 무대에 등장하자마자 피겨 해설자들과 심판들을 단숨에 매혹시키는 광채를 발했고, 도저히 그 나이대라고는 믿기지 않는 포커페이스와 성실함을 갖춘 김예림은 타노 점프(양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는 어려운 점프 포지션으로서, 일반적인 점프보다 배점이 더 높다)를 갖춘 기술적 완성도로 주목받고 있다.

 

메달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한국에선 피겨가 ‘여자 운동’이라는 인식 때문인지 남자 싱글 선수 층이 무척 얇은 편인데, 그중에서도 특별한 선수들은 존재한다. 현재 평창동 계올림픽 남자 선수 출전권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을 펼치는 이준형, 차준 환 선수를 주목해야 한다. 이준형은 현재 남자 싱글계의 대세인 쿼드러 플 점프는 아직 온전하게 장착하지 못했지만, 놀라운 곡 해석력과 아름다 운 스케이팅 스킬로 남자 피겨의 매력을 만끽하게 한다.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쿼드러플 점프를 안정적으로 성공시켰고 뛰어난 안무 소화력 을 보여주는 차준환 선수는 작년 시즌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까지 진출 하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아직까지 국내 대회 총점으로는 이준형 선수 가 앞서고 있고, 올해 초부터 부상에 시달리는 차준환 선수는 완전히 회 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올림픽 출전권은 아무래도 이준형에게 돌아갈 확 률이 높다. 이 외에도 피겨 스케이팅 아이스댄스 부문에서 민유라와 알 렉산더 게멀린 조가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고, 페어 스케이팅 부문에서 김 규은&감강찬 조가 출전을 노리고 있다.
그렇다면 평창의 ‘실제 메달’을 차지하게 될 선수들은 누굴까? 여성의 경 우 지난 2년간 금메달을 휩쓸다시피 한 러시아의 예브게니아 메드베데 바가 강력한 후보인데, 지난 소치 올림픽에서의 러시아 선수 도핑 스캔들 때문에 평창에선 러시아의 국가적 참가 자체가 금지된 상태다. 메드베데 바는 조국의 이름을 버리고 개인 자격으로 참가할 수 없다는 입장인데, 안나 포고릴라야 등의 다른 러시아 선수들의 선택도 마찬가지일지는 아 직 확실하지 않다. 기술적으로 가장 뛰어난 러시아 선수들이 불참한다면 그 다음 후보로는 캐나다의 케이틀린 오스몬드, 이탈리아의 카롤리나 코 스트너, 일본의 미야하라 사토코 등을 꼽을 수 있다. 김연아 같은 ‘완벽한’ 우승 후보가 현재 없는 상황에서, 경기 당일 얼음 위에서의 아주 작은 실 수 하나가 점수를 가를 것이기 때문에 이들 중 누가 금메달을 차지하더 라도 그리 큰 이변은 아닐 것이다. 남자 스케이터의 경우 좀 더 흥미진진 하다. 지난 소치에서 금메달을 거머쥔 일본의 하뉴 유주르가 연2패를 노 리는 가운데, 미국의 네이든 첸이 그 앞을 가로막고 있는 형상이다. 서로 다른 종류의 쿼드러플을 한 경기 내에서 다섯 번까지 뛰면서도(대부분의 선수들은 단 한 번 뛰는 것도 쉽지 않다) 그 기술적 완성도에 결코 떨어 지지 않는 아름다운 표현력까지 갖춘 이 침착한 소년에게 현재 피겨계가 열광하고 있다. 아이스댄스의 경우 캐나다의 테사 버추/스캇 모이어 조 가 가장 강력한 후보인데, 부디 이들의 경기를 TV 중계로라도 절대 놓치 지 않으시길 바라는 마음이다. 얼음 위에서의 움직임이 이렇게까지 아름 답고 정교하구나라고 실감케 하는 현역 최강의 팀이 다. 혹시라도 지금까지 언급된 선수들 중 누군가가 궁 금해진다면, 유튜브 창을 열고 그 선수의 이름을 넣어 보길. 국제 대회 영상의 경우 해설자의 코멘터리가 있 는 버전을 보시길 권한다. 해설자들이 그 선수의 어떤 면에 감탄하고, 어떤 테크닉이 부족한지 예리하게 지 적하는 걸 듣고 있노라면 피겨라는 스포츠에 대해 조 금씩 배워나갈 수 있다. 곧 경기가 시작된다.

 

김연아가 은퇴한 이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피겨 스케이팅은 다시금 관심 밖이 된 것 같다. 김연아가 그토록 간절히 희망했던 피겨 전용 경기장은 정치인들이 몇 번 공수표만 날린 채 결국 설립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