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입고 싶은 옷을 디자인하며‘ 젠틀우먼‘’, 엘리트 시크’라는 신조어를 낳은 세린느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피비 파일로. 가장 세련되고 우아하고 지적인 하우스를 완성한 그녀가 세린느를 떠난다는 루머가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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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트렌치 코트를 드레시하게 변형한 2018년 봄/여름 컬렉션. 2 패션으로서의 주얼리 매치가 돋보였던 2014년 가을/겨울 컬렉션. 3 2011년 봄/여름 컬렉션의 루스하고 슬릭하며 드레시한 ‘팬츠 시크’를 기억하라. 4 레이어드의 신공을 보여준 2017년 가을/겨울 컬렉션. 5 그래픽적인 패턴과 평면적인 재단으로 독특한 룩을 연출한 2013년 가을/겨울 컬렉션. 6 피비 파일로는 자신의 삶을 녹여낸 스타일로 패션계에서 대체 불가능한 권위를 갖게 되었다. 7 2016년 봄/여름 컬렉션의 란제리 드레스는 세린느의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몇 해 전에도, 그 전에도 피비 파일로가 세린느를 떠날 거라는 루머가 꽤 그럴싸하게 나돌곤 했다. 그런데 지난달 공신력 있는 패션 뉴스지 <비즈니스 오브 패션(BOF)>이 피비 파일로가 사임할 것이며 후임으로는 빅토리아 베컴과 스텔라 맥카트니의 디자인 디렉터가 거론되고 있다고 구체적으로 보도했다. 충격을 받은 패션계는 이 뉴스를 퍼 나르느라 바쁘면서도 후임자에 관한 이야기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건 소문이 나돌던 몇 해 전이나 지금이나 패션계가 피비 파일로가 부재한 세린느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피비 파일로라는 이름은 여자에게도 특별한 여자를 상징한다. 그녀는 자신의 정치사회적 신념을 드러내거나 삶에 대해 계몽적인 제스처를 취한 적이 없고 유명세에 비해 사생활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디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의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We Should All Be Feminists)’고 쓰인 슬로건 티셔츠처럼 직접적으로 여성성을 쟁점으로 소환하거나, 멀게는 미우치아 프라다처럼 확고한 정치적 신념을 가지고(정치 전공자인 데다 60년대 말 여자 공산주의자 시위 현장에 드레스를 입고 참가한 멋쟁이로 유명하다!) 기성 세대의 질서를 교란시키는 대담하고 실용적인 스타일로 여성성을 선동하지도 않는다. 더 멀게는 가브리엘 샤넬처럼 옷, 슈즈, 액세서리 하나하나에 여성 해방이라는 거창한 수식을 붙인 적도 없다. 피비 파일로의 이미지는 요즘 유행하는 ‘걸 크러시’와는 거리가 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선보이는 컬렉션과 이를 보충하는 말 한마디가 현대 패션과 여성에게 강한 울림을 갖게 된 건, 자신을 특별하게 포장하지 않고 현실을 사는 보통의 여자로 표현하는 그녀만의 비범한 평범함에서 온다. 그 예로 과거 승승장구하던 끌로에를 뒤로하고 패션계를 홀연히 떠난 그녀가 남긴 ‘육아에 집중하고 싶다’는 말은 패션계의 전설이 되었다.
그 후 3년이 지난 2008년 세린느로 복귀한 그녀는 2010년 리조트 컬렉션을 통해 기존의 세린느 하우스가 가진 모든 것을 지우고 완전히 새롭게 태어난 피비의 세린느를 선보였다. 솔드아웃을 기록했음은 물론이다. 그녀는 수많은 인터뷰를 통해 특별한 영감이나 뮤즈보다는 자신이 입고 싶은 옷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파이낸셜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선 “어떻게 입고 싶은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정직하게 표현해보고 싶었어요. 그러자면 좀 더 심플하고 현실적인 스타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죠”라고 말한 바 있다. 거대한 와이드 벨트를 더한 슬릭한 와이드 팬츠와 슬라우치 팬츠, 하이웨이스트에 허리가 코르셋만큼 잘록한 밀리터리 코트, 소매가 비정상적으로 긴 간결한 니트 톱 등 클래식을 독창적으로 재해석한 시그니처 아이템은 ‘쿨하지만 온화한’, ‘우아하지만 유니크한’,  ‘지적이지만 도발적인’과 같은 미묘한 충돌이 특징인 깨끗하고(Clean), 우아한(Elegance) 미니멀리즘이라는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었다. 특히 남성의 옷에서 빌려온 듯한 코트와 팬츠 위주의 룩은 ‘젠틀우먼’이라는 유행어를 만들기도 했다. 이처럼 지적이고 고상한 하이소셜라이트처럼 보이고 싶은 여자의 마음을 꿰뚫어볼 수 있었던 건 끌로에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그만두고 평범한 여자로 지낸 기간이 있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아이를 출산하고 양육하며 파자마로 연명하며 집에서 지낸 동안 자신의 정체성을 두고 혼란에 빠지기도 했을 테고 끌로에 시절의 능력 있는 엘리트로 보이고픈 마음과 치열하게 싸웠던 시간도 가졌을 것이다. 한 인터뷰를 통해 경제적인 문제 또한 패션 디자이너로 복귀하게 된 동기 중 하나라고 이야기했는데, 그건 남편의 수입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독립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경제적인 독립은 여자에게 필수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갤러리스트 남편, 딸과 두 아들을 둔 아내이자 엄마인 그녀는 또한 케이트 부시에게 영감 받아, 그녀의 노래 중 ‘Woman’s Work’를 테마로 한 2015년 봄/여름 컬렉션 직후 자신에게 ‘여성의 일’이란 엄마이자 여동생, 친구, 그리고 패션 디자이너라고 대답하며 그 모든 역할들이 똑같은 무게로 중요하며 똑같은 감도의 성취감을 준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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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과장된 벨 슬리브와 아플리케 장식의 화려한 여성미가 돋보인 2015년 가을/겨울 컬렉션. 9 세린느의 상징적인 와이드 벨트 룩은 2012년 봄/여름 컬렉션. 10 클린하고 우아한 미니멀리즘이라는 찬사를 받은 2010년 가을/겨울 컬렉션. 11 세린느가 선보여 온 와이드 팬츠는 ‘젠틀 우먼’ 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2016년 가을/겨울 컬렉션. 12 보다 예술적이며 다른 시즌에 비해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돋보였던 2017년 봄/여름 컬렉션. 13 2014년 봄/여름에는 그래피티, 스트리트 시크를 하이패션으로 정제해냈다. 14 2012년 가을/겨울 컬렉션에는 가죽, 퍼, 실크를 소재로 예술적인 믹스매치를 선보였다.

나는 지난 2014년 세린느의 가을/겨울 컬렉션을 베이징에서 재현한 행사에 참석했던 적이 있다. 호텔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우연히 피비 파일로와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었는데, 가까이서 본 그녀는 쇼장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왜소했고, 오랜 비행과 쇼 준비 때문인지 꽤나 지쳐 보였다. 그럼에도 그녀가 입고 있던 소매가 지나치게 긴 매니시한 블루 셔츠와 아이다스 스탠스미스 운동화의 시크한 콤비네이션을 잊을 수가 없다! 비슷하게 매 시즌 쇼 현장에서 어린 딸과 함께 있는 그녀의 모습은 사진가 유르겐 텔러와 작업하는 세련되고 감도 높은 광고 비주얼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세린느의 매력을 어필하는 듯하다. 늘 그녀의 옷을 그대로 입고 싶을 정도니 말이다.
우리는 그녀에게 많은 것을 얻었다. 오버 사이즈의 미학, 구조적인 멋을 더해주는 와이드 벨트의 매력(2012 S/S), 에르메스 스카프에서 벗어나 젊고 세련된 룩을 완성할 수 있는 스카프 룩(2012 F/W), 란제리와 스포티즘의 쿨한 믹스, 그리고 버켄스탁!(2013 S/S). 클러치백을 멋지게 드는 요령(2013 F/W), 스커트와 코트 그리고 커다란 머플러로 변신한 누빔 패딩(2015 F/W), 그래피티라는 예술의 재발견(2014 S/S), 주얼리가 아닌 패션으로서의 귀고리와 팔찌 그리고 백을 폼 나게 드는 법(2014 F/W), 란제리 룩을 일상에서 입게 하는 묘책(2016 S/S), 모던 레이어링의 기술(2016 F/W), 와일드한 가죽 소재의 쿨한 매력(2017 F/W) 등. 뿐만 아니라 ‘잇백’이 사라진 요즘 러기지, 카바스, 클래식, 트라이 폴드, 벨트백 등 히트 디자인을 줄줄이 선보이며 ‘머스트 해브 아이템’의 유행을 재현했다. 하이패션의 이미지를 입은 버켄스탁은 런웨이에서는 사라졌을지 몰라도 리얼웨이에서는 인기가 여전하다. 덕분에 그녀가 진두지휘한 지난 10년간 세린느의 매출은 2억 유로에서 7억 유로 이상으로 성장하며 패션의 역사를 새로 쓸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들이 피비 파일로가 세린느라는 브랜드 네임에 앞서 패션계에서 대체 불가능한 이름이 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