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에서 가장 빛나는 배우들은 오늘도 부지런히 무대에 선다. 캐릭터에 대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온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작품을 표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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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플 컬러 시폰 드레스는 손정완(Son Jung Wan), 블랙 사이하이 부츠는 슈콤마보니(Suecomma Bonnie).

온전한, 정인지

배우 정인지는 2007년 뮤지컬 <위대한 캣츠비>로 데뷔했다. <그리스>, <스탑키스>, 연극 <보도지침> 등에 출연했으며 올겨울에는 작년 초연에 이어 재연을 앞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참여한다. 자야 역할로 제6회 ‘예그린 뮤지컬 어워즈’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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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자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어요. 자야를 표현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뭐예요?
자야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어요. 사실 지금도 자야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찾아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번에 재연을 준비하면서도 많이 찾아봤고요.

자야라는 캐릭터를 어떻게 이해하나요?
나조차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있듯이 어떤 캐릭터를 이해하는 건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캐릭터가 어떤 사람일까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조금은 그녀의 행동에 가까워질 수 있어요. 실존하는 인물은 더 어려워요. 자야를 준비할 때도 꿈속에 자야 여사가 나타나서 ‘너 틀렸어, 너 거짓말하고 있어’라고 꾸짖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걱정이 많았어요.

진심을 다해 작품을 하나 봐요.
아직 스킬이 부족해서 그럴 수밖에 없어요.(웃음) 무대는 ‘세상에서 내가 최고다’라는 생각으로 서야 하지만 매번 부족함을 느껴요. 무대에서 내려올 때 약간의 자괴감을 느끼거든요. 무대의 시간은 흘러가야 하니까 항상 내려오고 나면 해결하지 못한 부분을 해소하고 싶은 욕심이 나요. 재연에 참여하는 이유도 그래요. 재연을 한다고 하면 더 시간을 들여서 캐릭터를 표현하고 싶더라고요.

창작 뮤지컬만이 주는 매력이 있다면?
배우가 하나의 창작자로 참여할 수 있는 것. 라이선스는 ‘이 부분은 건드리지 말아달라’ 하고 정해진 부분이 있거든요. 하지만 창작 뮤지컬에서는 모두가 자신의 영역을 깨고 창작의 영역에 들어와야 하는 때가 있어요. 연출, 배우, 음악감독, 안무선생님 등 모두가 함께 작품에 대해 고민하는 지점이 재미있어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처음 보러 온 관객들이 어떤 것을 기대하면 좋을까요?
백석의 시죠. 총 22개의 시로 이루어져 있거든요. 요즘은 시대가 빠르게 돌아가서 혼자 고독을 즐기면서 책을 읽을 시간이 없잖아요. 연출자와 고독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고독은 외로움과 다른 부분이더라고요. 고독은 오롯이 내가 선택하고 즐기는 거예요. 공연에 오셔서는 백석의 시집 한 권을 나 혼자 고독을 즐기면서 읽는다고 생각해주세요.

예그린 어워즈 여우주연상 후보에 이름이 올랐던데 기분이 어때요?
정말 기뻤어요. 너무 기뻐서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요. 연기로 상을 안 받아봐서 상을 받으면 어떤 기분일지 모르겠지만 후보에 올랐다는 것만으로도 아마 상을 받으면 이런 기분이겠구나 싶었어요. 받을 수 있으면 얼마나 기쁠까요? 우리나라에 매력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이 많아요. 자야 같은 경우도 마냥 고울 것 같지만 사랑에 굉장히 진취적인 여자거든요. 그래서 이 작품으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게 저한테는 큰 의미가 있어요. 대학로의 작은 공연장에도 매력적인 배우가 많다는 걸 얘기하고 싶어요. ‘저 상 받은 거 보셨죠? 이 작품 인정받았어요. 그러니까 관객들도 많이 찾아줬으면 좋겠고 이렇게 멋있고 주체적인 여자들이 중심이 되는 작품도 많이 써주세요’라고요.

당신의 첫 무대를 기억하나요?
중학생 때 처음 무대에 섰어요. <한여름 밤의 꿈>의 티타니아 역할이었는데 암전 때 무대에서 내려오다가 엄청 크게 넘어져서 그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어요. 잊을 수 없죠.

처음 연기에 매력을 느끼게 된 계기가 있다면?
연기를 먼저 시작하고 그 다음에 이 길이 내 길이라고 느꼈어요. 특별히 어떤 계기가 떠오르지는 않아요. 매번 공연을 하고 캐릭터를 만날 때마다 매력을 느껴요. 연기를 통해 내 자신을 찾아가고 있거든요.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데뷔작이에요. 혼이 엄청 났거든요. 스물세 살에 오디션으로 <위대한 캣츠비>의 주인공을 하게 됐는데, 얼마나 부족한 게 많았겠어요. 선배들한테 엄청 혼나면서 무대가 무서운 곳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연기가 짜릿했던 순간이 있다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초연 때 제가 두 번째 공연을 서고 더블 캐스트였던 배우가 첫 공연을 섰는데 두 번 다 전석 기립 박수가 나왔어요. 무대에 작품을 올리기 전에는 과연 이 작품으로 관객과 소통이 될까 걱정이 많았거든요. 자극적인 소재도 아니고, 노래도 시잖아요. 과연 관객들이 좋아해줄까 했는데 기립 박수가 나오는 순간, 너무 짜릿했어요.

무대에 오르기 전에 준비하는 나만의 의식이 있나요?
저는 머릿속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런’을 한 번 돌지 않으면 굉장히 불안해해요. 어디로 등장하고 퇴장하는지, 어떤 노래를 부르는지, 무대 위에서 뭘 하는지를 떠올려봐요. 런을 돌다가 막히기 시작하면 그 장면만 뱅글뱅글 돌기도 해요.

어떤 배우로 기억에 남고 싶어요?
매번 최선을 다하는 배우로 기억에 남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관객들은 관람에 두 시간을 투자하는데 이게 몇 백 명의 두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가치가 너무 크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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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이프 패턴 슈트는 럭키 슈에트(Lucky Chouette), 파이톤 소재 앵클 부츠는 슈콤마보니, 터틀넥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활짝 필, 이예은

배우 이예은은 2010년 뮤지컬 <미스 사이공>으로 데뷔했다. 그 후 <베어 더 뮤지컬>, <위키드>, <더 데빌> 등의 작품에 참여했으며 11월 말부터는 <올슉업>의 나탈리가 된다.

 

올해 제1회 한국 뮤지컬 어워즈에서 여우 신인상을 받았어요. 기분이 어땠어요?
사실 못 받을 줄 알았거든요. 상을 받는 모습을 많이 상상해봤는데 막상 받으니까 기분이 되게 이상했어요. 제 오랜 꿈이었거든요. 원로 선생님들부터 선배님들이 계신 자리에서 상을 받으니까 더 감사하고, 소중한 기억으로 남았어요. 되게 떨리더라고요. 특히 롤모델이라고 생각했던 조승우 선배님께 트로피를 받아서 더 의미 있었죠.

신인상의 무게가 작품을 준비할 때 영향을 미치나요?
아뇨, 그렇지는 않아요. 어쨌든 상을 받는 그 순간을 만끽하는 거고 또다시 일을 할 때는 그렇게 크게 의식되진 않아요.

뮤지컬 <올슉업>만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엄청 밝은 뮤지컬이거든요. 춤, 노래 전부 흥이 넘치고, 사랑이 넘치는 뮤지컬인데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걸 보여드리고 싶어요. 디테일한 부분을 잘 표현해서 관객들이 좀 더 공감할 수 있는 뮤지컬을 만들고 싶어요.

나탈리라는 캐릭터에서 중점을 두는 게 있다면?
나탈리가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남장을 하면서 에드라는 인물이 되잖아요. 사실 되게 소심했던 나탈리가 에드로 지내면서 오히려 몰랐던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 그래서 변화하고 치유받고 성숙해가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표현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요즘 그 부분을 굉장히 고민하고 있는데 풀리는 듯 안 풀리고 그래요.

엘비스 프레슬리의 곡 중 가장 좋아하는 곡은 무엇인가요?
사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많이 듣고 자란 세대는 아니에요. ‘Love Me Tender’나 ‘All Shook Up’처럼 유명한 곡만 알고 있었거든요. <올슉업>에 참여한다고 했을 때, 엘비스 프레슬리의 원곡을 계속 들었어요. 들어보니 참 세련되고 좋은 거예요. 제 노래도 좋지만, ‘If I Can Dream’이라는 노래가 있어요. 약간 성가 같기도 한데, 합창곡으로 완성됐을 때 그 앙상블을 이루는 에너지가 너무 좋아요.

당신의 첫 무대를 기억하나요?
기성 무대에서 데뷔는 <미스 사이공>으로 했는데 학교에서 처음 제가 배역을 맡아서 연기를 했던 건 <스핏 파이어 그릴>이라는 뮤지컬이에요. 거기서 펄시라는 역할을 맡았는데 그때는 신입생이어서 공연을 정말 단 한 번밖에 못했거든요. 그 한 번이 참 기억에 남아요.

처음 연기를 하고 싶었던 이유는 뭐예요?
어릴 때 가족들끼리 모이면 어른들이 ‘노래 한번 해봐’ 하잖아요. 저는 은근히 ‘나 왜 안 시키지? 나 보여주고 싶은데’라고 생각하는 스타일이었어요. 남들 앞에 서는 걸 좋아해서 시립 합창단도 하고 어릴 때부터 춤, 노래, 연기를 자연스럽게 접했어요. 예전에는 진짜 쑥스러움이 없었어요. 오히려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프로 무대에 서면서 무대를 알면 알수록 겁이 나더라고요. 워낙 훌륭한 배우가 많아서 나는 정말 가진 게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거예요. 배우로서 자존감이 떨어지는 시기도 왔고요. 무대는 정말 알면 알수록 어려운 거 같아요.

무대만이 줄 수 있는 매력은 뭘까요?
한 달 반에서 두 달 정도 연습하는 시간부터 공연하는 기간까지는 거의 같이 산다고 생각하면 돼요. 누구보다 끈끈한 정, 그리고 서로에 대한 신뢰로 이루어진 집단 안에서 같은 꿈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호흡을 맞출 수 있다는 게 매력이죠. 이예은이라는 사람도 연기를 하면서 몇 개월 동안 다른 사람으로 살 때, 그 캐릭터의 인생 안에서 제가 배우고 성장하는 게 많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게 매력이지 않나 싶어요.

무대에서 연기가 가장 짜릿한 순간은 언제인가요?
제가 연기를 할 때 가장 중점적으로 생각하는 건 무대에서 연기를 어떻게 자연스럽게 표현할까에 대한 부분이에요. 노래를 할 때 상황과 대사와 분리되면 안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사실 연기를 할 때 갑자기 노래가 나온다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잖아요. 그게 얼마나 자연스럽게 진행되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그런 일련의 과정이 하나도 불편하지 않았을 때, 연기가 짜릿해요. 노래가 너무 신경 쓰이는 날도 있지만 그런 생각 없이 무대가 그냥 쓱 흘러갈 때가 있어요. 그럴 때 특히 연기의 묘미를 느껴요.

뮤지컬 배우로서 언젠가 연기해보고 싶은 배역은?
대학교 입시 곡으로 뮤지컬 <맨 오브 더 라만차>의 알돈자 노래를 부른 적이 있어요. 몇 개월 동안 그 노래를 연습하면서 언젠가 무대에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또 <위키드>의 초록마녀도 해보고 싶어요. 작년에 네사로즈로 <위키드>에 참여했는데 내공이 좀 더 쌓인 후에 다른 역할로 하게 된다면 의미 있을 거 같아요.

드라마 <The K2>와 <듀얼>에서 연기를 선보였어요. 어땠나요?
아무래도 많이 다르죠. 그 자리에서 바로 호흡을 맞춰야 하니까, 순발력도 필요하고 순간적인 집중력이 중요해요. 확실히 낯선 환경에서 온전히 집중한다는 게 참 어렵더라고요. 어쨌든 무대는 연습을 해서 이것저것 시도를 해보고, 그중에서 제 것을 골라 쓰는 건데 드라마는 현장에서 바뀌는 게 너무 많더라고요.

그럼 드라마의 매력은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무대에서는 제가 아무리 디테일을 찾아도 관객과의 거리가 있잖아요. 사실 무대에서는 내가 표현한 만큼 관객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래서 힘을 빼고 진짜 생활연기를 해보고 싶다는 갈증이 컸는데 그 부분은 해소가 되죠.

지난 20대는 어떻게 기억되고 있나요?
작품을 스물한 살 때부터 했거든요. 지금 스물아홉인데 매년 작품을 했어요. 정말 쉬운 건 하나도 없었고 할 때마다 어려웠거든요. 매번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참 빈틈없이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행도 많이 다니고. 스스로를 쓰다듬어주고 싶어요. 20대를 참 알차게 보냈다고 생각해요. 후회는 없어요.

앞으로 올 서른에 기대하는 게 있다면?
20대 때는 사회 초년생으로서 다가올 미래를 예측할 수 없고 계획을 세운다고 해서 뜻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고 두려웠어요. 스스로도 너무 괴롭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그런 시기가 지나가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저는 그 다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고 앞으로도 힘들겠지만 그게 두렵지는 않아요.

어떤 배우로 기억에 남고 싶어요?
좋은 에너지를 내뿜는 배우요.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제가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죠? 선한 에너지를 갖고 있으면 그 사람이 어떤 역을 해도 설득력이 있고 사람들도 좋은 에너지를 받아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