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한 지 25년이 넘은 중년 개그맨 김생민이 때아닌 전성기를 맞았다. 그 성공의 이유가 단지 ‘그레잇’, ‘스튜핏!’이라는 유행어 때문일까? 그가 던진 메시지 때문에 변한 우리의 일상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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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226-2어느 쇼퍼의 고백 
정지윤(회사원)
모아둔 돈? 비밀. 월급 대비 저축하는 돈의 비율? 그것도 비밀. 특별한 재테크 비결은 제로. 돈 모으는 재미도 글쎄다. 쇼핑하는 재미만 최고 인 나는 쇼퍼홀릭이다. 월급쟁이로 산 지 10년이 지났지만 경력과 함께 쌓인 건 자산은커녕 스트레스와 만성 피로뿐이다. 굳이 변명하자면 난 생존을 위해 쇼핑에 탐닉 해왔다. 위시리스트에는 내 옷장 속으로 들어갈지 모를 잠 재 아이템들이 쌓여갔고 , 그중 일부가 품절됐다는 소식 에 통탄을 금치 못하곤 했다. 이런 내 삶에 아주 작은 균 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다름 아닌 <김생민의 영수증(이하 ‘영수증’)>. <송은이, 김숙의 비밀보장> 열혈 애청자로서 듣기 시작한 <영수증>이 나비의 날 갯짓이 될 줄이야. 처음엔 무한 증식해나가는 ‘스튜핏’의 종류와 ‘커피 대신 면수 마시기’ 같은 말도 안 되는 ‘어프로치’에 빵 빵 터지기 일쑤였지만 회가 거듭될수록 더 이상 웃으며 들을 수 없었다. 30 대 ‘그루밍남’의 사연이 결정적이었다. 빚을 져서라도 자신을 치장하는 남자 의 얘기였다. 김생민의 한숨 소리는 다트가 되어 내 고막 에 정확히 꽂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루밍남은 지금 어떻 게 살고 있을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의 영향 덕에 내 스트 레스 해소 패턴은 물론 멍 때리며 시간 보낼 때의 양상까지 조금씩 변하는 중이다. 우선 위시리스트에 올리기 전 심사숙 고하는 나를 발견한다. ‘이거 진짜 나한테 잘 어울리려 나? 내 옷장에 비슷한 게 있었던 것 같은데? 흠, 디테일 은 좀 다르지만 입었을 때 느낌은 비슷할 것 같은데? 패스.’ 예전 같았으 면 ‘보았노라, 매장에서 입어보았노라, 0.5 초의 망설임 없이 긁었노라’였 을 게 뻔하다. 옷장 속 가득 걸려 있는 아이템들을 보며 뿌듯해하던 것도 다 옛날 일, 이젠 모두 짐처럼 느껴진다. 뭐가 많아도 너무 많으니 늘 입 던 것만 입게 되고, 그러면서 ‘입을 옷 없다’ 툴툴거리기까지 했으니 이건 누가 봐도 ‘울트라 맥심 이제 작작 좀 해라 스튜핏’ 수준. 김생민의 극약 처방 중에 이런 게 있었다. 저축은 저축대로 하되, 하루하루 절제해 모은 돈을 다음 달로 넘기고, 같은 방식으로 또 이월시켜 꽤 큰 액수가 쌓이면 한꺼번에 확 써버리라고. 이제는 이 처방전에 따라 살아보려 한다. 기왕 쓰는 돈, 먼지처럼 사라지는 쇼핑의 순간적인 쾌감 대신 돈 잘 썼다는 보람을 오랫동안 느껴보는 게 목표다.  여행, 운동, 아니면 누가 봐도 가치 있다 여길 만한 패션 아이템이나 가구…? 하하, 쇼핑을 좋아하는 이 죽일 놈의 천성은 어쩌질 못할 것 같다. 그래도 10년 쇼퍼홀릭치고 선방한 거 아닌가? 이 정도면 스스로에게 ‘그레잇!’ 한번 줘도 괜찮은 거 아닌가?

 

건전한 예능을 응원함 
이숙명(<혼자서 완전하게> 저자 겸 프리랜스 에디터)
코미디의 기본은 풍자와 해학이다. 현실을 비틀어 허를 찌르거나 대중이 못하는 얘기를 대신해 카타르시스를 주거나. 그런 의미에서 한 때 깐족거리거나, 타인을 비방하거나, 루저를 자처하거나, 부도덕을 과시하는 게 재밌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까마득한 옛날 일이다. 이제는 그런 위악이 더 이상 전복적이지도, 해학적이지도 않다. 이제는 오히려 ‘모범생’이 희귀한 시대에 이르렀다. 김생민의 시간이 온 것이다. 이른바 ‘누구누구 라인’이라는 이름 아래 서로 꽂아주고 생색 내며 방송을 독점하는 남성 카르텔과 무관하게 탄생한 스타라는 점에서 김생민의 성공은 의미가 크다. <김생민의 영수증>은 정보와 예능을 결합한 인포테인먼트의 부활, 온라인 개인 미디어가 대형 방송국의 파일럿을 대체할 정도로 영향력이 커진 현실, 저성장 시대의 소비문화가 맞물려 탄생한 히트작이다. 유능한 기획자 송은이와 동시대 여성 대중의 마인드를 가장 잘 대변하는 김숙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 김생민은 수시로 송은이, 김숙, 정성화 같은 이들과의 건강한 우정을 자랑한다. 이 그룹의 화법은 매우 여성적이다. 서로를 헐뜯기보다 배려하는 쪽이고, 고작해야 “안 웃겨, 하차해”가 가장 심한 악담이다. <영수증>은 남성 전문가와 여성 바람잡이라는 흔한 포맷임에도 김생민이 맨스플레인을 한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그가 여성을 존중하고, 여성들과의 스몰토크에 능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거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는 게 당연시되는 한국 예능에서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캐릭터가 장외에서,여성들의 도움으로 스타가 된 것이다. ‘알탕 문화(남성들만의 문화)’에 길든 한국 방송계에 모처럼 자극이 될 만한 사건이다. <SNL> 김생민 편에서는 ‘양꼬치엔 칭다오도 6개월 갔다’며 그의 인기가 곧 식을 거라 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김생민은 연기에 능한 코미디언도 아니고, 당장에 메인 MC를 꿰찰 만큼 언변이 화려하지도 않다. <영수증>에서 그는 종종 애드리브 타이밍을 놓치는데, 눈치 빠른 송은이와 김숙이 매번 티 안 나게 무마해준다. 하지만 파트너 없이 출연한 <SNL>과 <라디오 스타>에서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고, 자주 버벅거렸다. 과연 그에게 또 다른 기회가 주어질까? 적어도 실험해볼 가치는 있다. 기존 한국 예능에 지치고 배신감 느끼던 시청자들이 김생민에게 환호하는 이유를, 제작자들이 깊이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이상형은 김생민 
전소영(< 얼루어> 피처 에디터)
금수저로 태어나 자만감으로 가득 찬 남자와 헤어졌다며 우울해하는 친구를 보며 김생민을 떠올렸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 연애 아니 , 결혼을 하려거든 김생민 같은 남자를 만나야 한다. 김생민은 완벽한 남자는 아니지만, 썩 괜찮은 남자의 표본임은 틀림없기 때문이다. 근거는 다음과 같다. 그는 촌스러울 만큼 우직하고 성실하다. 20 년 동안 <연예가 중계>에서 리포터로 활약하고 있으며(쓸데없이 방송 외적으로 톱스타와의 인맥을 과시하지 않으며 그들과 비교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동물농장>은 17 년(덕분에 반려동물을 좋아하며 키우고 있다!), <출발 비디오여행>은 19년간(그래서 영어, 특히 ‘r’과 ‘t’의 발음이 의외로 좋은 걸까?) 장기 고정 출연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현실적이다. 경제관념은 두말할 나위 없다. 김생민은 일찍이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이 유재석, 강호동, 신동엽만큼 웃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충실하게 인생을 산 사람은 김생민의 나이인 사십대 중반쯤 되면 타인의 삶을 자신만의 엄격한 기준으로 평가하기 마련이다. 전문용어로 ‘꼰대’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나에게는 엄격하게, 타인에게는 너그럽게. 그 역시 후배들에게 끊임없이 잔소리를 하지만, 사람들의 성격마다 달리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방송에서도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부터 파악하고 , 자신의 충고를 들으라고 당부한다. 인생의 우선순위도 잘 안다. 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는건 가족이다. 그래서 가족에게 돈을 쓰는 것에 매우 관대하다. 출산 후유증에 시달리는 아내에게 샤넬백을 선물하고, 언젠가는 꼭 아내와 단둘이 하와이 여행을 하는 것이 인생의 꿈이라고 말한다. 짠돌이지만, 낭만은 있다. 실제로 김생민과 아내의 삶이 어떤지는 알 수 없다. 그의 아내만 따로 불러 대화를 해보면 “남편 따라 짠순이로 사느라 힘들었어요”라고 답할지도 모른다. 김생민의 아내는 그가 <라디오 스타>에 출연한다는 소식에 무척 흥분했다고 한다. 남편이 그의 친한 선후배만큼 더 유명해지길 바라는 마음이 들었을 수도 있고, 늘 다른 사람을 돋보이게 했던 남편이 드디어 빛을 발한다는 생각에 대견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의가족은 물론이고, 친한 선후배들까지 김생민의 성공을 축하한다. 이 인기가 언제까지 갈지 모르겠지만, 거품 같은 인기가 꺼져도 그는 카메라 앞에서 성실히 제 역할을 해낼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나는 그런 사람을 곁에 두고 싶다. 그의 영향을 받으며 나 또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김생민은 나의 이상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