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러너, 하루키 책을 출판하는 편집장, 문학평론가와 유쾌한 일러스트레이터, 배고픔을 참지 못하는 에디터. 이들이 모두 모여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하루키에 대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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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리마스터링 – 박찬용(<에스콰이어> 피처 에디터)

에세이보다 단편, 단편보다 장편, 구작보다 신작이라고 생각한다. 이 명제에 대입한다면 지금 가장 훌륭한 하루키 씨의 작품은<기사단장 죽이 기>다. 실로 그렇다. 이 소설은 잘 다듬어진 회고록이자 무라카미 하루키 씨가 좋아하는 주제를 한번 더 주장하는 선언문이자 -노벨 문학상을 노 렸다면-노회한 전략의 결과물이다. 물론 아름다운 소설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을 원심분리기에 넣고 돌린다면 매번 비슷한 요소 가 나온다. 도시 남자의 여자가 사라진다. 이유는 모른다. 남자는 여자가 사라져서 궁금하고 고통스럽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를 찾아 떠난다. 여 정에서 비현실적인 친구들이 나타나 비현실적인 일들로 주인공을 이끈 다. 그 여정에서 교훈이 떠오른다. 교훈을 얻고 나니 여자까지 돌아와 있 다. 여자의 실종, 남자의 이동, 비현실적 체험, 경험과 교훈.

무라카미 하루키가 꼼 데 가르송 공장에 다녀와서 쓴 에세이가 있다. 거기서 그는 꼼 데 가르송의 옷을 ‘겉에서 보면 이상하게 생겼는데 입어보면 의외로 편하다’고 표현했다. 하루키의 소설도 비슷하다. 비슷한 줄거리, 일견 유치한 초현실적 설정, 촌스러울 정도로 물건과 음악과 자동차에 의미를 많이 부여하는 습관. 하지만 읽다 보면 의외로 페이지가 잘 넘어간다. 하루키는 본인의 소설을 패션 디자이너의 컬렉션처럼 운용한다. 스스로의 기본적 틀이 있다. 여자를 잃고 여행 갔다 돌아오는 남자. 거기에 매번 더해지는 본인만의 리듬이랄까 터치가 있다. 두 개의 달, 고양이의 말을 알아듣는 노인. 마지막으로 ‘시즌 컬러’라 할 만한 별도의 디테일이 붙는다. 이 셋이 붙어서 이번 시즌 하루키 씨 최신작이 완성된다.

하루키 2017 S/S 컬렉션, 아니 <기사단장 죽이기>는 그의 최신작이다. 남 자의 아내가 사라진다. 이유는 모른다(<태엽 감는 새>). 남자는 고통을 느 끼며 낡은 푸조 207을 타고 전국을 돈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여자와 잔 다(거의 모든 소설). 처음 보는 동네에 가서 머무르다<(해변의 카프카>) 머리가 흰 사람(<스푸트니크의 연인>)을 만났는데 거기서 대단한 예술 작품(<해변의 카프카>)을 만나고 미지의 세계(거의 모든 소설)로 들어간다. 하루키의 하루키적 요소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반복된다. 그러나 그 사이로 점차 두드러지는 게 있다. 하루키의 모국인 일본의 국적성이다. <기사단장 죽이기>는 완연한 일제다. 하루키의 소설 중에서도 가장 일본색이 짙다. 제목이 된 <기사단장 죽이기> 자체가 일본식 그림의 이름 이다. 이 그림의 화가는 서양화가로 시작해 동료 일본인보다 먼저 세계를 본 후 돌아와 서양화를 접고 일본화를 그린 사람이다. 노벨 문학상을 노린다는 면에서도 좋다. 서양인들은 고향 이야기와 동양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서양에서 고향의 정체성을 깨달은 동양인은 전략적으로 괜찮은 선택일 것이다.

이런 이야기와 별도로 <기사단장 죽이기>는 감동적인 이야기다. 이 소설은 사람에게 사랑이 어떤 의미인지 표현한다. 이야기를 더 알고 싶은 호기심이 인간의 가장 강력한 본성임을 묘사한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힘이 사람의 가장 강력한 힘임을 간파한다. 좋은 이야기를 믿으며 전진할 때 인간은 가장 행복해질 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기사단장 죽이기>의 마지막에 하루키는 주인공의 입을 빌려 말한다. “이 세계에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는지 몰라. 하지만 적어도 무언가를 믿을 수는 있어”. 나도 사랑과 이야기와 믿음의 힘을 믿는다. 그래서 이 셋의 가치를 쉬지 않고 말하는 하루키를 좋아한다. 그는 마지막 문장까지 이렇게 맺는다. “너는 그걸 믿는 게 좋아.”

 

하루키의 논픽션 – 박혜진(문학평론가)

산문 중에서는 논픽션.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무례하지도 방관하지도 않는 솔직 담백한 인터뷰어로서의 하루키가 내게는 가장 하루키적이다. 미래의 하루키가 지난 모든 소설을 뛰어넘는 불멸의 작품을 쓴다 해도 나는 <언더그라운드>에 이어 <약속된 장소에서>를 읽었을 때 받은 충격과 감동을 사수할 것이다. 하루키 스스로 ‘공정한 의문’에 의거해 썼다고 밝힌 <약속된 장소에서>는 하루키만이 할 수 있는 도전이었다.

<언더그라운드>는 1995년 도쿄 지하철에서 일어난 사린 테러사건 피해자와 관계자에 대한 인터뷰집이다. <약속된 장소에서>는 사린 사건 가해자들이 속해 있던 옴진리교 옛 신자들을 인터뷰한 책이다. <언더그라운드>에서 하루키는 보도되지 않은 이야기를 발굴해 읽기 쉬운 문장으로 옮겨 썼다. 이 작업으로 “상처받은 순진한 일반 시민”이라는 허구적, 가상적 이미지에 갇혀 있던 피해자들이 표정과 느낌을 가진 생생한 인물이 된 건 물론이다. 효과는 컸다. 많은 독자가 사린 사건을 자기 일처럼 체험했다. 놀라운 건 그 다음이다. 하루키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흔히들 ‘언더그라운드 2편’이라 부르는 <약속된 장소에서>는 단단한 세계관과, 무엇보다 용기가 필요했던 작업이다. 누구도 가해자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 입장에 서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건 두려운 일이고 감당 못할 본질적인 문제와 당면하는 것도 불편한 일이기 때문이다. 모르고 싶고 모를 수 있는 일은 덮어두는 게 미덕인 세상에서 하루키의 인터뷰는 슬픔에 그치고 싶은 사람들을 흔들어 깨우는 알람이었다. 반듯한 충격이었고, 이성의 반격이었다.

스스로 비겁하다고 느낄 때, 타협한다고 느낄 때, 자유롭지 않다고 느낄 때, 나는 하루키가 던졌던 질문을 떠올리며 완성된 개인이 되려고 애쓰는 편이다. 그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편견과 판단을 중지한 채 옴진리교 신자였던 사람들에게 물었다. “혹시 당신이 사린을 뿌리라는 명령을 받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이 질문은 인터뷰이만을 향하지 않았다.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향했다. 악마의 테러라고 선 그으면 모두 다 만족 한다는 걸 하루키가 몰랐을 리 없다. 거짓된 편안함보다 진실한 불편을 좇는 이 ‘직업적 소설가’에겐 그것이 공포와 맞서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뿐. 그 단순한 용기에 반한 내게는 ‘하루키’가 방법이다. 공포 앞에서, 또 생활 앞에서.

 

달리기의 즐거움 – 황선우(<W Korea> 피처 디렉터)

지난 주말 11km 러닝 대회에 나갔다. 넉 달 전 하프 마라톤을 세 번째로 완주할 때만 해도 그 절반 거리인 10km 정도는 부담 없는 목표로 여겨졌는데 막상 달려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늦더위와 많은 약속과 업무 스트레스 같은 걸 핑계로 연습에 소홀했기 때문이다. 뛰지 않을 핑계는 언제나 뛰어야 할 이유보다 훨씬 많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러닝 에세이이자 회고록인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이하< 달리기를 말할 때>)>에도 그런 구절이 나온다. 내가 달리기를 시작한 뒤로는 이 책의 어디를 펼쳐서 다시 읽어도 진실을 꿰뚫지 않는 페이지가 없었다.

하루키의 소설보다는 수필을 늘 좋아했다. 잘 쓴 문장은 기본이라 치면 에세이의 매력은, 바라보는 시선이 참신할 때 나온다. 더플 코트라든가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빌리 와일더의 영화와 윈튼 켈리의 음악에 대해 쓸 때의 하루키는 세련되고 귀여웠으며 20대 내내 재즈 바를 운영하다가 야구장 외야에서 공이 날아가는 걸 보고 갑자기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다든가 하는 에피소드는 비현실적으로 산뜻했다. 그렇긴 한데 나는 갈수록 취향보다는 행위가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것들에 흥미를 느낀다. 무엇을 좋아하는가보다는 매일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지가 누군가를 설명해준다고 믿게 되었다. 무라카미를 떠올릴 때면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의 스웨트 셔츠를 입고 레이밴을 쓴 이미지 같은 게 떠오르는데, <달리기를 말할 때>는 그 셔츠를 적시는 ‘피 땀 눈물’에 관한 부분이다.

잘 알려진 여러 권의 책을 낸 작가가 우직하고 튼튼한 러너라는 사실은 평범한 사람에게 조금 위안이 된다. 책에서는 글쓰기의 형이하학적이고 육체노동적인 면모가, 달리기와 교차해서 펼쳐진다.  아침마다 운동화 끈을 묶고 길로 나가 자신의 내면에 집중해서 일정 시간을 견뎌내고 매일의 습관으로 몸에 익히는 이 지난한 일이 글쓰기의 체력적 바탕이 되어줄 뿐 아니라 장편소설 쓰기와 많은 부분 닮았다는 것이다. 매일 10km를 뛰며 스물 몇 번째의 풀 코스 완주를 이뤄내는 성실함의 기록이지만 이 책이 밝은 성공담이나 활기찬 운동전도서는 아니다. 러너로서의 쇠락, 목표에 미치지 못하는 좌절, 완주하고 나서의 허무와 우울까지도 그늘처럼 드리워 있다.

<달리기를 말할 때>는 자신의 묘비에 써넣고 싶은 문구로 끝난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그리고 러너)/ 1949~20**/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100km를 하루에 뛰는 울트라 마라톤에 나가 무라카미는 크루즈 컨트롤을 작동시킨 자동차처럼 무념무상의 상태에 접어드는데, 마침내 완주를 하지만 그 이후로 기록이 하락세에 접어든다. 하지만 뛰는 걸 멈추지 않는다. 다시 목표를 정하고, 한 발 한 발 내딛는 발걸음에 집중하고, 지나가는 풍경을 눈에 담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오직 자신의 두 다리를 믿으며. 소설가로서의 하루키보다는 수필가로서의 하루키를 좋아한다. 그리고 러너로서의 하루키는 존경한다.

 

여행 친구 – 진명현(영화사 무브먼트 대표)

여행을 갈 때 적절한 두께는 아니지만 늘 하루키의 소설을 챙긴다. 지금까지 가장 많이 동행한 책은 <해변의 카프카>이고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크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도 꽤 여러 번 여행을 함께 다녀왔다. 혼자 하는 여행의 기운과 두 작품의 정조가 닮았다<. 해변의 카프카>가 가진 묘하고도 주술적인 기운은 공항 버스 안에서부터 떠나는 자의 설렘을 부채질하고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크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의 고독한 정조는 낯선 침대 위에 부는 바람과 근사한 마리아주가 된다.

대낮의 나른한 수면을 위해 읽을 때도 있고 공항의 줄을 견디면서 읽을때도 있다. 얼마 전의 여행에서는 이미 세 번도 넘게 읽은 <1Q84>와 한달여를 함께 다녔다. 다행스럽게도 손에 꼭 들어오는 앙증맞은 문고본이 출간되었고 여정의 대부분을 주머니 속 친구로 함께했다. 하루키의 장편 소설들은 결코 호흡이 짧진 않지만, 쓸쓸하고 애틋한 데다 어딘가 모르게 공간에서 부유하는 인물들과 함께하는 낯선 시간은 그 자체로 이국적인 공기를 느끼게 한다. 하루키의 많은 이야기가 그렇지만 <1Q84>는 내게 유난히 선명하게 그림으로 떠오르는 작품이다. 둥글게 뜬 달의 이미지, 고가도로를 내려가는 아오마메의 날렵하고 단단한 실루엣, 어딘지 모를 과거를 유영하는 덴고의 무겁고 슬픈 눈, 그리고 얼굴은 잘 떠오르지 않는 후카에리의 길고 검은 머릿결이 자동반사적으로 떠오른다. 이번 여행에서는 여러 번 읽는 이 이야기에 새로운 재미를 더해보았다. 이 책이 영화화된다면? 하는 가정하에 책을 읽는 순간 순간 가상 캐스팅을 해본 것이다. 다이아몬드로 만든 칼날 같은 아오마메 역할에는 누가 어울릴까, 달처럼 가깝지만 멀고, 은은하지만 슬픈 빛을 내는 덴고라는 묵직함에는 어떤 배우의 형상이 겹쳐질까, 그리고 여전히 비밀스럽게 온 정신을 빼앗는 후카에리의 실루엣은 누가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국내외를 막론하고 여러 배우의 얼굴이 이국의 하늘에 두둥실 떠올랐다. 공효진과 하정우 그리고 전소니라는 배우의 이름이 돌아 오는 비행기 안에 같이 앉아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