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러너, 하루키 책을 출판하는 편집장, 문학평론가와 유쾌한 일러스트레이터, 배고픔을 참지 못하는 에디터. 이들이 모두 모여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하루키에 대해 말한다.

 

228 하루키

 

지극히 자연스러운 단편 – 장선정(출판사 비채 편집장)

“무슨 일 하세요?”라는 질문에 “문학 편집자입니다. 주로 일본 소설을 담당하고요”라고 대답하면, 으레 대화는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지곤 한다. 좋아하느냐, 왜 좋아하느냐, 어느 작품이 인상적이었느냐, 장편소설파냐, 단편소설파냐, 아니면 에세이파냐 등등. 아무튼 여러차례의 이런 대화 끝에 나도 자연스럽게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었는데, 요컨대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이고, 그중에서 어느 쪽인가 하면 단편소설파이다. 그런데 왜 좋아하느냐에 대한 결론은 단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고민을 거듭해보면 일단,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압도적인 스토리텔링과 담박한 문장이 끌리고, 극도로 부지런하게 매일같이 달리고 또 글을 쓰면서 틈틈이 취미생활과 여행을 통해 일상의 밸런스를 유지하는 삶의 태도도 닮고 싶다. 하지만 재미있고 스타일리시한 문체를 가진 작가들은 상당히 많고, 자연인으로서의 매력이 넘치는 작가도 적지 않다. 그런데 왜 하루키일까.

히가시노 게이고의 드라마틱한 미스터리 소설처럼 퍼즐을 맞춰나가듯 수수께끼를 풀이하는 독서의 맛도 중독을 부르는 법이지만, 무엇보다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딱 잘라 대답할 수 없는 숱한 문제에 다소 관조하는 여유를 체득하게 해주는 지점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에 끌리는 듯하다. <어디가 됐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서>라는 단편은 도쿄의 고층 맨션 24층에 살고 있는 남자가 같은 맨션 26층의 부모님 댁에 간다며 집을 나가서는 홀연히 사라진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남자는 24층과 26층 사이의 계단 어디쯤에서 자취를 감춘 것이었는데, 20일 후, 전혀 의외의 장소에서 남자는 발견되지만 소설이 끝나도록 그 세세한 사정은 밝혀지지 않는다. 단편 <버스데이 걸> 역시 마찬가지다. 스무 살 생일을 맞은 주인공 소녀에게 노신사가 생일선물로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흘러 주인공이 친구와의 식사 테이블에서 오래전 스무 살 생일날을 추억한다. 친구가 묻는다. “질문 하나 해도 돼?” 주인공, “그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고 싶은 거지?” 다시 친구, “아니, 소원이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왜 그때 그 소원을 빌었는지가 궁금해.” 소원에 대한 이야기는 이렇게 계속되지만 끝끝 내 소원의 실체는 드러나지 않은 채 소설은 끝이 난다.

내가 워낙 우유부단한 사람이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살면서 물음표를 품은 채 그대로 살아가는 것도 그런대로 괜찮다고,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럽고 평범한 일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듯한 이야기는 은근한 위로랄까 안심이 되는 무언가를 전해준다. 같은 맥락에서< 해변의 카프카>에 등장하는 좋아하는 대사 한 대목. “만약에 주니치 드래곤이 모든 시합에서 이긴다면, 누가 야구를 보겠어?” 나는 오늘도 세상이 내가 생각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아서 재미있다.

 

식탁 위의 하루키 – 허윤선

오래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십대였다. 이 작품이 쓰여진 건 내가 태어나지도 않은 1979년이다. 십대부터 이십대에 이르기까지 읽었던 하루키의 글은 대부분 80년대에 쓰인 것이었고, 내가 그 모든 작품을 따라잡은 후에도 에세이며, 잡지 연재분이며, 소설이며 그의 책은 끝없이 나왔다. 시시하게 느껴지는 작품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좋아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나는 소설 중에서< 댄스 댄스 댄스>를 좋아한다. 에세이 중에서는 더 이상 작업에 대해 묻지 말라는 듯, 작정하고 자신의 일에 대해 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좋아한다. 좋아하는 구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나는 또 그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무심한 듯, 하지만 꽤나 정성스럽게 썼을 요리 장면을 좋아한다.

웬만한 분량이라면, 요리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작품을 찾을 수 없을 만큼 하루키는 음식을 딱 적절한 위치에 접시처럼 내려놓는다. 미식가로 알려진 무라카미 류가 화려하고 탐욕적으로, 때로 섹스처럼 음식을 묘사 한다면, 하루키에게 음식은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자기 전에 양치를 하는 것과 같은 일상의 한 단계다. 그런데 바로 그 점이 미뢰를 자극 하기 시작한다. <태엽 감는 새>에서 ‘나’는 구미코와 이야기를 나누며 중화 냄비를 들고 있다. 이것은 아마 ‘웍’을 말하는 것일 텐데, 불맛 나는 중국 요리를 만들려던 모양이다. <상실의 시대>의 미도리는 달걀말이 전용 사각 프라이팬까지 갖춰둔 여자였다. 직접 차린 일본 가정식 요리로 ‘나’ 뿐만 아니라 이 책을 읽은 모든 남자에게 여성의 원형이 되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는 일주일 분량의 비프 스튜를 만들고, <댄스 댄스 댄스>에는 햄을 더한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와 면도날처럼 얇게 자른 양파를 넣은 훈제 연어 샌드위치를 만든다. “제대로 만든 햄버거를 먹으러 가자. 겉은 바삭바삭하면서도 안에는 육즙이 흐르는 고기에, 토마토 케첩을 듬뿍 바른”이라는 말은 담백하지만 대단히 유혹적이다. 소설을 떠나 직접 음식을 만드는 에세이에서 음식의 맛은 더 진해진다. 일본된장국에 갓 잡은 생선으로 초무침을 만들고, 도미로 도미밥을 짓는 식이다. 평범해 보이지만 아내와 머물던 그리스의 섬에서 만들던 요리다. 어릴 적 이 음식은 그저 상상으로만 존재했다. 도대체 연어알은 무슨 맛이고, 지리멸 초무침은 뭘까? 일본식 떡국과 치라시스시, 또 먹물오징어 링귀네의 맛은? 맛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난 어른이 되었고, 이제 모든 음식의 맛을 안다. 때로 번역상의 오류를 잡아내기도 한다. 복잡한 심경과 스트레스를 요리를 하면서 달래게 된 지경에 이른 지금은, 하루키에게 이렇게 묻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된 장국에는 ‘아카미소’를 씁니까? ‘시로미소’를 씁니까?

 

그림으로 남은 남자 – 이크종(일러스트레이터)

무라카미 하루키의 얼굴을 그리는 것은 무척 간단하다. 아마 세상 어떤 작가를 그리는 것보다 쉬울 거다. 일단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고 그 안에 ‘ㄱ자’를 그려준다. 너무 고민할 필요 없이 적당히 그으면 된다. 슥슥 하고. 벌써 올드패션드를 좋아할 것 같은 아저씨의 얼굴형과 깔끔한 헤어 스타일이 완성되었다. 남은 공간에 대충 눈코입을 그려주고 올드패션드를 한모금 마셔주면 끝이다. 정말이지 간단하다. 표정을 고민할 필요도 없다. 그저, 무표정인 걸로도 충분하니까.

익숙한 건지 성의가 없는 건지, 잘 그린 건지 못 그린 건지, 정성을 다한건지 대충 그린 건지 알 길 없는 저 간단하기 짝이 없는 하루키 얼굴은, 하루키와 1981년부터 길고 긴 인연을 쌓은 일러스트레이터 안자이 미즈마루의 그림이다.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은 사람이라면 머릿속에 바로 떠오를 그 그림이다. 그런데 이 느슨한 그림이 하루키의 짤막한 글들과 찰떡같이 맞아떨어진다. 유쾌한 리듬의 글 사이에 보란 듯이 앉아 있는 헐렁한 일러스트다.

서점에서 하루키의 책을 보면 안자이 미즈마루의 그림이 있나 없나부터 확인했다. 어떤 글이 실렸는지보다 그게 더 중요한 일이었다. 요샌 부러 들춰보진 않는다. 일본에선 꽤 오래된 책이 이제서야 번역이 되어 나오는 경우도 있고, 이미 나왔던 책이 출판사가 장정이나 제목만 바꿔 새로 내놓는 경우도 왕왕 있지만 새 글에 새 그림이 얹힌 건 볼 수가 없으니까. 하루키보다 나이도 많은 데다가 운동은 훨씬 덜 좋아했을 것이 분명한 미즈마루 씨는 2014년,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일러스트레이터 안자이 미즈마루가 생전에 꼽은 최고의 하루키 그림은 잡지 <BRUTUS> 표지에 실린 ‘달리는 무라카미 하루키 그림’이다. ‘그가 내 쪽으로 달려오는 듯한 착각이 들어서 좋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저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내겐 마치 하루키가 더 신나게 달려갈 수 있게 안자이 미즈마루가 힘을 보태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어깨동무를 하고 이인삼각을 하고 있는 느낌이다. 서로의 글과 그림에 기대서 좀 더 멀리까지 달려갈 수 있었던, 부럽기 짝이 없는 동행이다. 물론 혼자서도 하루키는 우직하게 달려나갈 테지만 새삼, 그 동행이 끝이 났다는 게 아쉽다.

 

참으로 매력적인 시시함 – 변준수(소니뮤직 홍보팀)

처음 접한 책은 <상실의 시대>였는데, 노골적인 성애 묘사는 당시 순진했던 중학생에게 깊은 상실감을 남기고 말았다. 그러나 이어서 읽은 에세이집 <무라카미 라디오>는 달랐다. 산뜻하고 유쾌했다. 그의 소설이 비교적 무겁고 진지한 것과는 달리 에세이는 가볍다. 본인 말로는 ‘맥주회사가 만드는 우롱차’ 같은 감각이란다. 우리나라로 치면 과자 만들던 회사가 짓는 아파트 정도일까? 아무튼 이 한 권을 완독하자마자 나는 뻔뻔스럽게도 사람들에게 하루키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무라카미 라디오>에 ‘영양가 있는 음악’이라는 글이 있다.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누구나 인정하는, 그리고 스스로 꽤 티를 내는 음악광 하루키가 빔 벤더스의<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을 보러 극장에 간다. 하지만 이사하면서 6천 장이나 되는 레코드 – 이렇게 또 티를 낸다-를 옮기며 진을 뺀 그는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곧 잠이 들고 만다. 꿈까지 꿨다면서도 ‘머리가 아니라 몸 전체로’ 영화를 이해했다고 한다. 거창하게 ‘몸의 저 깊숙이까지 배어든 영화의 영양분을 쭉 빨아들인 듯한 느낌’이라고도 한다. 그냥 푹 자고 일어났더니 개운했다는 이야기 같은데 말이다. 마지막엔 ‘세련된 뮤직비디오는 요즘 얼마든지 있지만 정말 근사하고 효용이 있는 영상은 되레 얻기 어려워진 것 같다’라며 갑자기 꼰대스럽게 글을 맺는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곯아떨어진 그가 여기서 말하는 ‘효용’이란 뭘까? 시니컬한 셀프디스인가?

어쨌든 지식인의 통렬한 자기비판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기본적으론 영화보다 졸아버린 시답잖은 에피소드다. 수록된 다른 글도 마찬가지다. 김밥을 말다가 내용물을 관찰하고, 러브호텔 이름을 뭐로 지을까 고민한다. 역시나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닌 거 같다. “아니 이 사람은 어쩜 이렇게 창의적으로 시답잖은 소리를 늘어놓는 거지?” 침 흘리듯이 실소를 흘리며 읽어 내려가다 보면 “머리가 아니라 몸 전체로” 책을 본 것 같은 홀가분한 기분이 된다. 그러고 나면 시답잖은 일상도 조금은 유쾌하게 보인다. 나에겐 <무라카미 라디오>의 이 창의적인 ‘시답잖음’이 효용이고 영양이다. 요즘엔 이렇게 ‘근사하고 효용이 있는 글’은 되레 접하기 어려워진 것 같다.